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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돈 넣고 상품권 따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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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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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게임기 설치해놓고 ‘잭팟’ 터지면 상품권 주는 성인 경품오락실 번성
게임장 근처 환전소에서 수수료 떼고 돈으로 바꿔주며 ‘사행성’ 논란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오늘 기계들이 다 박력이 없어.” “저 23번 기계, 내가 돈 많이 잃었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야.”

지난 12월20일 오후 4시, 서울 신촌역 근처에 있는 한 성인 경품오락실. 정아무개(57)씨가 한 손에 수북이 만원짜리 한 뭉치를 쥔 채 멀찌감치 서서 게임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앞뒤 좌우 4대의 게임기에 돈을 넣고 동시에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게임이 진행됨에 따라 19번 게임기의 26인치 LCD 화면 중간에 쓰인 ‘CREDIT’ 숫자가 계속 줄어들면서 ‘250’을 가리키고 있었다. 곧 ‘0’으로 떨어질 것 같자 정씨가 만원짜리 한 장을 게임기 투입구에 새로 집어넣었다. 크레딧은 순식간에 숫자를 다시 올리더니 9900을 찍고, 게임이 계속 이어졌다. “저 기계, 어제 저녁에는 진상이었는데 오늘은 좀 되네.” 정씨 바로 옆 자리에서 같은 게임을 하고 있던 중년 남자가 말을 받았다. “열대어 나온 다음엔 이제 가오리가 나와야 하는데…. 물보라 좀 터지고 잠수함도 나올 때가 됐는데, 오늘 이상하네?” 중년 남자는 입에 담배를 물고 오른손엔 만원짜리 대여섯 장을 쥐고 있었다.


1만3천 개 오락실 중 1만1천 개

건물 지하 1층에 자리잡은 이 아케이드 게임장은 100평 남짓되는데 신종 성인용 릴게임기 100여 대를 갖추고 있었다. 릴게임 방식은 대충 이렇다. 화면 상단에서 황금 동전이 약 2초당 하나씩 계속 나타나 화면 아랫부분으로 떨어지는데, 화면 중간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릴’(REEL), ‘꽝’ 등의 그림이 끊임없이 흘러간다. 그리고 황금 동전이 릴에 운 좋게 맞으면, 화면 아랫부분의 ‘BAR’ ‘7’ ‘종’ ‘과일’ 등 스핀이 휘리릭 한 바퀴 돌아간다. 스핀이 몇 초간 돌다가 멈춘 결과 ‘쓰리바’와 ‘잭팟’ 등이 터지면 배당금(GIFT)이 올라가는 식이다. 객장 손님은 8명 정도로 다소 한산했는데, 한쪽 구석에는 환갑을 넘은 것 같은 나이 든 여성 한 명이 죽치고 앉아 게임에 푹 빠져 있었다. “저 13번 기계, 누가 오늘 (게임)했나?” 객장에 있던 손님들은 여기서 매일 살다시피 하는지 다들 서로 아는 눈치였다.

성인 경품오락실은 주택가에까지 우후죽순 난립하고 있다. 오락실 근처에 상품권 환전소가 있게 마련이다. (사진/ 한겨레)

‘INSERT COIN’이라고 큼지막하게 써놓고 손님들을 기다리는 게임기들을 빼고, 실제 게임이 진행되고 있는 기계들은 게임 도중에 수시로 ‘상품권 배출 중입니다’라는 메시지를 화면에 찍고 있었다. 그러면 게임기는 왼쪽 배출구를 통해 5천원짜리 상품권을 몇 장씩 토해냈다. ㅅ업체에서 발행한 ‘사랑나눔상품권’인데, 상품권 한쪽 절취선에는 ‘경품용 상품권’이라고 적혀 있다. 이 상품권에는 문화·서적·공연 등 이용할 수 있는 가맹점 표시가 선명했다. 하지만 게임하던 사람들이 상품권을 받아서 책 사고 영화를 보러가는 건 아니다. 가맹점이 몇 개 있긴 하지만 경품용 상품권은 사실상 오락실 안에서만 쓰이는 ‘칩’ 역할을 하는 데 불과하다. 이 성인오락실을 나와 10m쯤 걸어가면 ‘상품권’이라고 붙인 환전소가 있다. 환전소 바깥 창구에는 ‘1장 4500원, 10장 4만5천원, 100장…’ 하는 식으로 환전 조견표가 나붙어 있었다.

오락실 업주들로 구성된 ‘한국컴퓨터게임산업중앙회’에 따르면, 현재 국내 오락실은 전국적으로 1만3천 개다. 이 가운데 2천여 개가 청소년 오락실이고 나머지 1만1천여 곳은 성인 경품오락실로 추산된다. 성인 경품오락실은 웬만한 주택가에도 우후죽순 난립하고 있다. 현재 성업 중인 대표적인 성인오락실 게임기로는 ‘상어도 잡고 고래도 잡는다’는 바다이야기·황금성·오션 파라다이스·대물·극락조·남정·나이트호크 등이 꼽힌다. 이들은 속칭 ‘오락실 재벌’로 불린다. 서울 시내에서 성인오락실을 운영하고 있는 박아무개씨는 “우리 업소에서 쓰고 있는 게임기는 대당 50만∼60만원짜리 옛날 것이다. 서울의 성인오락실은 황금성·바다이야기·오션 파라다이스 등 3대 메이저가 사실상 평정하고 있는데, 이들 오락실은 한 대당 700만원짜리부터 990만원짜리 값비싼 고급 기계 수십 대를 들여놓고 영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메이저 업소는 수억원의 돈이 들기 때문에 혼자서 운영하기 어렵고, 지분참여 방식으로 몇 명씩 동업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국내 성인오락실 시장규모가 연간 40조원에 이른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성인 경품오락실이 번창하면서, 그전에는 오락실과 전혀 무관한 일을 하던 사람들이 2005년 초부터 대거 성인오락실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인형에서 상품권으로 바꿨으나…

1980년대는 청소년 전자오락실의 황금기였으나 2001년께부터는 펌프댄스게임(DDR)이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그 뒤 히트 게임물이 나오지 않고 청소년들이 온라인·모바일게임으로 이동해버리면서 청소년 오락실은 시들해졌다. 대신 성인오락실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현재 인기를 모으고 있는 아케이드 전용 성인게임기는 빙고 게임(로얄빙고·미니빙고·멀티빙고 등)과 릴게임, 포커게임 등이 있다. 현행 경품 취급 기준은 베팅액은 1시간당 9만원 이내, 1회 당첨금은 최대 2만원 이내로 제한하고 있다. 게임기는 투입한 금액의 80% 이상이 손님한테 돌아가도록 배당성향(Payout ratio)이 설계돼 있다고 한다.

성인오락실을 둘러싸고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건 ‘경품용 상품권’이다. 정부는 성인오락실을 ‘사행성’과 ‘게임’ 성격의 중간 영역으로 보고 게임에 참여하는 손님들한테 뭔가 줘야겠다고 판단해 처음에는 인형 등 실물을 경품으로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문화관광부는 지난 2002년 성인오락실의 경품 환전 행위를 막고 문화산업을 활성화한다는 명분으로 5천원짜리 ‘상품권 경품제도’를 도입했다. 문화관광부 쪽은 “그전에 성인오락실에서 경품으로는 주는 것이 자질구레하고 조잡한 중국산 토기·곰인형 같은 것이어서 이를 바꿔 책도 보고 영화도 보라는 건전한 취지에서 문화상품권 경품을 도입했다”고 설명했다. 성인오락실에서 경품으로 상품권을 주는 곳은 우리나라가 유일한 것으로 알려진다.

성인오락실 광풍이 불면서 '오락실 재벌'까지 등장하고 있다. 한 성인 오락실의 내부 모습. (사진/ 한겨레)

그런데 현행 경품고시는 경품용 상품권은 현금으로 환전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 게임장은 업소 코앞에 환전소를 둔 채 수수료를 10∼25% 정도 떼고 버젓이 상품권을 돈으로 바꿔주고 있다. 경품고시 규정이 ‘게임장 내에서’ 환전 또는 환전 알선을 하지 못하도록 할 뿐 게임장 바깥에서 이뤄지는 환전은 별다른 규제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인오락실에서 경품용 상품권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국게임산업개발원이 지정한 문화상품권은 총 10개다. 1999년 상품권법이 폐지돼 사업자등록만 하면 누구나 상품권을 발행할 수 있게 됐는데, 2002년 성인오락실에서 경품용 상품권이 도입되자 가맹점을 거의 갖추지 않은 상품권 발행업체가 난립했다. 당시 한 장에 10∼20원 하는 환전 전용 ‘딱지 상품권’이 수백 종류나 뿌려지기도 했다. 그러자 정부는 2005년 7월 경품취급고시를 다시 고쳐 경품용 상품권 ‘인증제도’를 ‘지정제도’로 바꿨다.

‘점수제’로 법안 개정하자

업계에서는 성인오락실 경품용 상품권의 연간 유통량을 10조원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게임기 한 대당 한번에 5천원짜리 상품권 200장 정도가 들어가는데, 한국컴퓨터게임산업중앙회 쪽은 한 게임장에서 평균적으로 하루 2천 장 정도의 상품권이 유통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현금으로 치면 하루 1천만원이다. 영업이 잘되는 업소는 게임기 한 대당 하루 400장(200만원) 이상 상품권이 배출된다고 한다. 한국컴퓨터게임산업중앙회 관계자는 “상품권 유통규모는 연간 크게 잡아 10조원 정도인데, 업소의 실제 매출인 손님 이용요금은 전국적으로 연간 8천억원 정도”라고 말했다. 지난 5월 제주시 연동에서는 성인오락실에서 손님이 딴 5천원권 경품 상품권을 수수료(10%)를 공제하는 방식으로 환전해주면서 10개월간 수억원의 돈을 챙긴 상품권 교환소 주인이 구속되기도 했다. 게임장 업주와 공모(알선)해 환전을 했다는 혐의였다.

이처럼 경품용 상품권 환전이 말썽을 빚자 국회에서는 성인오락실에서 상품권을 못 쓰도록 하는 법안 개정이 논의돼왔다. 한국컴퓨터게임산업중앙회 쪽은 “성인오락실은 성인 놀이문화이지 돈 넣고 돈먹기가 아니다. 그런데 게임하면서 돈을 투입할수록 딴 상금만큼 상품권이 자판기처럼 계속 나오는 시스템이다 보니 상품권이 손님의 손에 수북이 쌓이게 되고 당연히 환전 욕구가 생기게 된다”며 “게임기 프로그램을 고쳐서 딴 점수를 누적되게 하면 만원짜리 현금을 계속 넣지 않고 게임기에 쌓인 크레딧 점수만 갖고 계속 놀아도 된다. 나중에 자리에서 털고 일어설 때 남은 점수만을 상품권으로 받도록 하면 된다”고 말했다. 손님들이 상품권을 많이 뽑지 않도록 하면 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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