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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소매업의 수레바퀴를 굴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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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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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재의 5분 경영학]

시장 진입 땐 싸게 들어와서 점차 고급화, 다시 저가 신규진입자 생기는 순환
구멍가게든 글로벌 기업이든 계속 움직여야 생존할 수 있다는 경영학의 교훈

▣ 이원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timelast@seri.org

어느 주말 저녁, 대형 할인점에 물건을 사러 나섰다. 북적거리는 매장 한켠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카트를 끌고 가보니 웬걸, 꽤 괜찮은 놀이방 시설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싼 맛에’ 찾아갔던 할인점에 그런 훌륭한 고객 편의시설이 있다는 사실에 감동하고 돌아왔다. 알고 보니 그건 빙산의 일각이었다. 어느 대형 할인점에는 카펫이 깔려 있었고, 호텔 같은 최신 조명과 고급 마감재로 내부 장식이 되어 있었다. 어느 대형 할인점에는 앙드레 김 같은 유명 브랜드점에다 고급 음식점들까지 들어와 있다고 한다. 식품매장에 값비싼 친환경 유기농 제품을 잔뜩 들여놓는 것은 기본이다. 여기 ‘할인’점 맞아?


할인점이 호텔분위기?

조금만 기억을 더듬어보자. 1993년 이마트를 필두로 대형 할인점이 국내에 처음 소개됐을 때, 그건 그냥 값싸고 커다란 식품점이었다. 사람들이 오래 다니던 동네 구멍가게를 등지고 대형 할인점으로 몰려간 건, 좀 북적대고 멀어도 그 고통을 보상해주는 ‘싼 맛’ 때문이었다. 그 대형 할인점들이 이제 배신을 결심한 것일까? 할인점 경영자들은 ‘고급화’를 경영 목표로 내걸고 있다.

그러고 보니 백화점의 변신도 극적이다. 할인점 등쌀에 힘겹다고 아우성이던 백화점들은 이제 으리으리한 명품관을 지어놓고는 점점 더 고급스런 매장에서 점점 더 비싼 물건을 팔려고 안달이다. 들어가서 일반 잡화를 대충 골라 살 수 있던 시내 백화점 1층에는 이제 명품들이 잔뜩 들어찼다. 어렵다면서 한편으로는 고급화한다고 다들 야단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하버드 경영대학원 말콤 맥나이어 교수는 1958년 ‘소매업의 수레바퀴’(wheel of retailing)라는 가설을 발표한다. 내용은 이렇다. 소매업의 산업구조는 처음에 혁신적 신규 진입자가 싸게 들어와서 고급화하며 또 다른 저가 신규 진입자를 부르는 패턴을 반복한다. 새로 시장에 진입하는 점포는 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초저비용 초저가로 운영한다. 최소한의 서비스만 제공하며 손님을 끌어 시장에 터를 잡는다. 그러나 진입에 성공하고 나면 점점 더 세련된 설비와 서비스를 갖추게 된다. 가격은 슬슬 올라간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초저가 할인점포가 또 다른 혁신적 형태를 만들어내면서 치고 들어온다. 결과적으로 처음 들어온 할인점포는 고급점포가 돼버린다. 이 과정이 바퀴가 굴러가듯 반복된다는 것이다.

고급화를 경영 목표로 내건 대형 할인점들은 배신을 결심한 것일까? 유아 놀이방 시설을 갖춘 한 대형 할인점 매장. (사진/ 한겨레 김정효 기자)

국내 유통업계에서도, 맥나이어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소매업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은 ‘1천원 숍’이라는 이름의 진짜 초저가 할인점이 최저 가격 매장 자리를 슬슬 넘보고 있지 않은가. 1천원 숍도 처음 생겼을 때의 구멍가게 형태에서 벗어나, 슬슬 매장을 넓히면서 판매 물품 종류를 확대하고 있는 추세다. 대형 할인점의 공세에 고전하던 동네 슈퍼마켓에서도 ‘아이스크림 30% 할인’ 같은 이벤트를 마련하면서 최저가 매장으로 스스로를 다시 자리매김하면서 생존 방법을 찾고 있다.

소매업의 수레바퀴가 강력한 설명 도구인 이유는, 그 바퀴가 소매업뿐만 아니라, 또는 개별 산업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황을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현대자동차의 성장 과정에서도 수레바퀴의 움직임이 보인다.

현대자동차는 1986년 당시로서는 초저가 자동차인 엑셀을 미국 시장에 선보여 큰 인기를 얻었지만 ‘값싸고 질 나쁜 자동차 만드는 기업’이라는 이름도 같이 얻어야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소나타 같은 중형차나 산타페 같은 레저용 차량을 내놓으면서 고급화하고 있다.

현대자동차에 앞서, 이제 세계 1위 자동차 기업이 된 도요타 역시 똑같은 길을 걸었다. 도요타의 1965년 미국 자동차보다 작고 값싸고 간단한 코로나- 1980년대의 엑셀급인- 를 내놓으면서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그러다가 1983년 중형차 캠리를 내놓아 성공시키면서 한 단계 고급화했고, 현대차가 엑셀을 내놓은 얼마 뒤인 1989년에는 최고급 렉서스를 출시했다. 이제는 도요타에 추월당한 지 오래인 포드도 값싼 대중적 자동차 ‘모델T’로 시작해 링컨 컨티넨털에까지 다다랐다.

돌고 도는 세상, 개와 정승의 시간

세상은 돌고 돈다. 소매업의 수레바퀴는 이런 만고불변의 진리가 산업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준 경영학 이론이다. 구멍가게든 글로벌 기업이든 처음에 계속 노력하고 움직여야 생존할 수 있다는 이야기니 피곤한 일이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말도 있지만, 개같이 벌던 기업도 노력만 하면 정승같이 벌 수 있다는 교훈이기도 하니 희망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다. 어느 쪽에 동의하든 분명한 것은, 처음부터 누구는 개로 태어나고 누구는 정승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개가 진화하면 정승이 된다. 정승이 되려거든 쉬지 않고 수레바퀴를 굴려라.

이주의 용어

소매업의 수레바퀴(wheel of retai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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