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욕심과 고집, 인터넷을 만나다

583
등록 : 2005-11-03 00:00 수정 :

크게 작게

검색 시장의 옛 영광 되찾기에 팔 걷어붙인 성낙양 야후코리아 사장
검색 데이터베이스보다 동영상까지 확장된 웹검색에 승부수 던지다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성낙양(41) 사장을 인터뷰 후보에 올리고 접촉을 시도한 것은 한참 전이었다. 회사 쪽의 첫 반응은 연재물 문패에 최고경영자(CEO)가 붙어 있는데, 경영총괄 대표(COO) 직함을 단 성 사장도 괜찮겠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성 사장은 야후의 한국 업무를 사실상 총괄하면서도 부사장급인 COO를 맡고 있던 터였다. 대표 타이틀을 달고 있는데 어떠랴 싶었지만, 인터뷰 약속은 이런저런 이유로 자꾸 미뤄지다 10월24일로 잡혔다. 공교로운 점은 인터뷰 약속과 만남 사이인 17일 그가 야후코리아의 CEO로 발탁됐다는 사실이다.


유학을 위해 깨끗이 사표 던져

성낙양 사장은 "욕심 많고 고집 센 건 차남 기질인 것 같다"고 말한다. (사진/ 윤운식 기자)

서울 대치동 야후코리아 본사에서 만난 성 사장의 첫 일성은 “아, 저번에 봤었지요?”였다. 갑자기 머리 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지난 10월12일 야후코리아의 동영상 검색 서비스인 ‘야미’ 시연회 자리를 두고 한 말인 듯했는데, 수많은 참석자들로 인해 얼굴을 각인시킬 수 있는 성격의 자리가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직감이나 홍보 담당자의 도움에 따른 의례적인 인사성 발언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지만 사진팀의 윤운식 기자를 향해 “이분은 처음 보는 것 같고”라는 걸 듣고선 그런 느낌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는 노하우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매킨지에 이어 액센추어에서 경영컨설턴트(자문역)로 활약하던 그가 야후 쪽의 영입 제의를 받은 것은 지난해. 헤드헌터를 통해서였다. “경영 컨설팅을 하면서 인터넷 기업에 관심을 갖긴 했어도 딱히 야후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지는 않았는데, 제리 양(야후 창업자)을 만나고 나서 곧바로 결정했습니다. 비전과 열정에 감명받았던 거지요.” 성 사장은 “인터넷 시장의 잠재력이 10이라면 야후가 발휘하는 역량은 아직 2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과, 야후의 비전은 단지 수익성에 국한된 게 아니라 고객들에게 활력을 주는 것이라는 데서 공감대를 이룰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 서 있는 자리와 대학 시절의 전공(연세대 화학공학)은 거리가 좀 먼 듯합니다.

“공학과 경영학 쪽 공부를 두루 하고 싶었는데, 경영학을 먼저 공부하면 나중에 공학 쪽 공부를 못하거나 해도 길어질 것 같았습니다. 선배들한테서 조언을 구해 공학 중 화학공학 쪽으로 우선 방향을 잡았던 겁니다.” 그는 훗날 애초 마음에 품었던 대로 미국 유학을 떠나 버클리대학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마침으로써 ‘공학·경영학’을 아우르게 됐다.

1990년대 초 대학 졸업과 미국 유학 사이의 3년 동안 그는 삼성물산 화학산업부에서 일했다. 삼성물산을 비롯한 종합상사의 인기가 높던 시절이었다. 그룹 공채시험을 통과한 뒤 희망 계열사를 선택할 때나 3년 만에 회사를 떠나던 때의 일을 듣다 보면 그가 밝혔듯 ‘욕심 많고 고집 세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그룹 공채시험에서 합격한 250명 가운데 삼성물산 쪽으로 배치된 이들은 10명이었습니다. 계열사 배치 전에 희망 계열사를 1·2·3지망으로 나눠 써내라고 했습니다. 1~3지망을 모두 삼성물산으로 써냈더니 인사 담당팀장이 ‘안 될 경우에 대비해 2·3지망은 다른 데로 하라’고 하더군요. (웃으며) 그래도 끝까지 고집해 결국 뽑혔습니다. 그때 삼성물산에 같이 입사한 공대생은 3명뿐이었습니다.”

이필곤 사장 시절 모범사원상을 받을 정도로 그럭저럭 잘 적응하던 그가 유학을 위해 사표를 내겠다고 하자 회사에선 말렸다고 한다. 회사를 떠나지 않고도 유학을 다녀올 수 있는 장학금 제도가 있기도 했다. 그런데도 굳이 회사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은 ‘유학 뒤 5년 의무근무’라는 짐을 벗어나 마음 편히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재산은 못 물려줘도 공부는 시켜주겠다’는 아버지의 말에 힘을 얻기도 했을 듯하다. 운수업체를 경영하는 아버지 덕분에 차남인 그를 비롯한 3남1녀는 모두 외국 유학을 다녀왔다.

경영자를 키운 매킨지의 하드 트레이닝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나 명문대학과 외국 유학으로 연결되는 탄탄대로만 걸었을 것 같은 그에게도 어려운 시절은 있었다. 대학 입시에서 한 차례 쓴잔을 마신 것이야 워낙 흔한 일이니 제쳐두더라도 유학 1년 만에 갑작스럽게 닥친 아버지의 별세는 심적인 충격에 더해 당장 재정적인 압박으로 이어졌다. “공부를 마친 뒤 아버지 사업을 뒷바라지하고 형님과 사업을 이어갈 생각이었는데….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시고 나선 사업을 정리하게 됐습니다.” 그즈음 진로를 두고 고민하던 그는 ‘서머 인턴’(여름방학 동안 일하는 임시직)으로 매킨지와 인연을 맺었으며 버클리대 MBA 과정을 거친 뒤 정식으로 매킨지에 입사하게 된다.

그는 1996년부터 3년 동안 일한 매킨지 시절에 큰 의미를 둔다. “일을 논리적으로 진행하고, 에너지와 열정을 필요로 하는 곳이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는 점에서다. “하드 트레이닝(강훈련)을 통해 기업 경영자로 일하는 데 바탕을 쌓은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선배들도 많이 만났고요.” 그가 매킨지 시절 인연을 맺은 이들로는 김용성 두산 전략기획본부 사장, 유정준 SK그룹 전무, 최병인 효성 정보통신부문 사장 등이 있다.

야후코리아는 포털 서비스에서 나아가 인터넷 미디어를 지향하고 있다. 서울 대치동 야후코리사 본사. (사진/ 윤운식 기자)

CEO로 선임됐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소감은.

“(웃으며) 물론 좋았지만, 그 자체가 큰 감격을 주진 않았습니다. 지난 1년간 야후코리아의 경영을 이미 총괄해왔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턴 제 이름을 걸고 본격적으로 야후코리아의 성장에 기여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더 많이 가지게 됐습니다.”

이를 의례성 발언이라고만 볼 수 없는 건 야후코리아를 둘러싼 환경 때문이다. 야후코리아는 2002년까지만 해도 국내 인터넷 포털 및 검색 시장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다가 최근 들어 네이버, 다음에 밀려나 있는 상태다. 전임 염진섭, 이승일 사장에 이어 3대 CEO에 오른 그로선 옛 영화를 되찾아야 할 무거운 짐을 지게 됐다. 감격에 앞서 책임감을 더 느낄 만한 처지다.

“국내 인터넷 시장은 편집에 의존한(수작업을 필요로 하는) ‘검색 데이터베이스(DB)’ 위주로 짜여 있습니다. 편집이 아닌 기술에 의한 ‘웹 검색’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는 해외 시장과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자체 확보한 DB에 바탕을 둔 편집 검색보다 웹 검색에 강점을 띠는 야후코리아가 국내에선 상대적으로 부진할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다.

편집에 의한 검색은 수익성에 한계 있어

“한국의 인터넷 인프라(기반시설)는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는 초고속 환경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또 트렌드 변화가 대단히 빠릅니다. 인터넷에서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온라인을 통해 관계를 지속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시장이기도 합니다. 한국 사용자들의 입맛에 맞는 서비스를 그때그때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편집에 의한 정보를 필요로 하는 것이죠.”

성 사장은 야후코리아의 부흥을 꾀할 전략으로 ‘웹 크롤링’(웹에 분산 저장된 문서나 파일들을 수집해 검색 대상의 색인(indexing)에 포함시키는 것) 같은 기술에 바탕을 둔 검색 서비스 제공을 들고 있다. 자체적으로 확보한 기존 DB 안에서 검색을 해주는 것보다 웹상에 떠다니는 수많은 자료를 검색하는 것을 위주로 하여 문서에서 동영상 등으로 서비스 영역을 확대해나간다는 것이다. 성 사장은 “현재 국내 검색시장의 주류를 이루는 편집에 의한 검색은 수작업에 따른 인적·시간적 비용 탓에 수익성에서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욕심과 고집으로 원하는 것은 대체로 이뤘다고 자부하는 성 사장이 국내 인터넷 역사를 새로 쓸 수 있을지 주목된다.


포털에서 미디어로

방문자 수는 떨어졌으나 줄곧 흑자기조 유지한 야후 코리아

세계 최대 인터넷 포털 사이트인 야후의 6번째 해외 법인으로 1997년 9월 서비스를 시작했다. 검색 서비스를 중심으로 뉴스, 커뮤니티, 엔터테인먼트, 전자상거래, 음악, 영화 등 60여 항목의 서비스를 네티즌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또 기업들에는 온라인 마케팅 통로로 활용돼 포털 서비스 중심에서 인터넷 미디어로 거듭나고 있다.

한국 진출 초기 인터넷 포털 및 검색 시장을 휩쓸며 2002년까지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다 네이버(NHN), 다음(다음커뮤니케이션) 등 토종 업체들의 거센 도전에 맞닥뜨려 최근엔 기세가 많이 꺾였다. 인터넷 조사전문 업체인 코리안클릭에 따르면 지난 9월 한달 야후코리아 방문자 수는 2167만5천 명으로 추정됐다. 이는 네이버 2761만7천 명, 다음 2665만6천 명, 네이트(SK케뮤니케이션즈) 2403만7천 명에 이어 4위 수준이다. 1998년 10월 서비스 개시 1년 만에 300만 페이지뷰를 돌파하고 1999년 9월 국내 최초로 2천만 페이지뷰를 기록했던 것과 대비된다. 검색 엔진 시장에서도 네이버에 크게 뒤져 있다.

지난 2003년 111억원에 이르렀던 야후코리아의 흑자(당기순이익) 규모가 지난해 62억원 수준으로 떨어진 데서도 이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인터넷 기업으로는 이례적으로 설립 뒤 지금까지 줄곧 흑자 기조를 유지해 수익성에선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매출은 2003년 506억원에서 지난해 619억원으로 늘어나 성장세 또한 꾸준하다. 올해 10월 동영상 검색 서비스인 ‘야미’를 출시한 데 이어 검색과 커뮤니티를 연동한 차세대 검색 서비스를 선보일 방침이다.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