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기업 한국인 CEO]
창립자인 아버지의 대를 이어 경영을 맡은 한독약품 김영진 대표이사 부회장
노사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국내합작 기업 가운데 대표적 성공사례 이끌어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외국계 기업에서 아버지-아들로 대를 이어가며 경영하는 예를 찾아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 특이한 사례의 대표 격으로 김영진(49) 한독약품 대표이사 부회장을 꼽을 수 있다. 김 부회장은 한독약품의 전신인 연합약품 창립자인 김신권(83) 한독약품 회장의 아들이다. 김 부회장은 한독약품의 대주주가 독일계 훽스트에서 프랑스계 사노피 아벤티스로 바뀌는 와중에도 여전히 굳건하게 경영자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공장 이전, 직원들에게 믿음 주다 국내 기업과는 다른 풍토의 외국계 기업인데, 아버지가 경영하는 회사를 피하고 싶지는 않았을까? “요즘 들어 아버님이 그러시데요. ‘난 (한독약품 입사를) 강요한 적 없고, 네 결정이었다.’ (웃음) 굳이 말하자면 복합적이었죠. 제 스스로도 자격이 된다면 (한독약품에) 들어가서 일해보고 싶었습니다.” 김 부회장이 한독약품에 정식 입사한 것은 1984년.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1979)에 이어 미국 인디애나대학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마친 무렵이었다. 당시 직책은 경영조정실 부장. MBA 출신이라지만 파격적인 발탁 인사인 듯하다. 창업자 2세에 대한 특혜였을까?
“합작회사여서 창업주 아들이라고 바로 들어가 일할 체제는 아니었습니다. 적절한 트레이닝(훈련)을 거쳐 (당시 대주주인) 훽스트의 동의 아래 입사한 것이었습니다. 부장으로 일하기 전에 훽스트 본사에서 훈련을 받으며 검증을 받았습니다.” 쉽지 않은 검증을 거쳐 입사한 무렵, 회사 형편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필 입사 첫해부터 매출액은 마이너스 추세로 돌아서고 이익도 감소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김 부회장은 이를 되레 ‘행운’으로 여겼다고 말한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으니 앞으론 좋아질 일밖에 더 있겠느냐”는 것이었다고.
회사 분위기가 크게 바뀐 것은 1990년대 초반. 서울 상봉동에 있던 생산 공장을 충북 음성으로 옮기면서부터였다. 당시 그는 부사장으로 경영 일선에 나서고 있었다.
“상봉동에서 음성으로 옮긴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우선 상봉동 공장은 더 이상 확장하기 어려워 지방으로 이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땅값이 싼 지방으로 이전함으로써 부채 비율을 낮춰 재무 구조 개선을 꾀할 필요도 있었고….”
지금은 한신아파트로 바뀐 상봉동 공장 터는 1만2700평으로 1992년 당시 520억원에 팔렸다고 한다. 한해 매출이 800억~900억원에 이르던 시절이었다. 한독약품은 이렇게 마련한 돈을 포함한 600억원을 투자해 음성에 2만7천평짜리 GMP(미국 규격을 충족하는 우수 의약품 제조기준 설비) 공장을 95년 준공하게 된다.
공장 이전 과정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상봉동 땅을 매입한 주택조합쪽의 내분으로 제때 대금결제가 이뤄지지 않아 경영진의 애를 태웠을 뿐 아니라 200여명에 이르는 직원들이 공장 이전을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삶의 터전을 지방으로 옮겨야 하는 데 따른 불편과 고용 불안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설득에 나선 그는 ‘파이 키우기’를 제안했다. “공장을 옮기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으면 작아지는 파이(몫)를 나눠 먹을 수밖에 없다. 변화를 추구해 파이를 키워야 직원들의 몫도 커진다.”
이런 논리적인 설득에 덧붙여 출퇴근과 잠자리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아울러 제시했다. 지방에서 지낼 이들에게는 무료로 기숙사(아파트)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하고, 서울에 남아 있는 이들을 위해 통근버스를 제공했다. 지금도 40명가량은 서울에서 버스로 출퇴근하고 있다고 한다. 상봉동에서 음성까지는 버스로 1시간30분 정도 걸리는데, 상봉동에서 서울 역삼1동 본사까지 오는 게 더 오래 걸릴 때도 있다면서 김 부회장은 웃었다.
지방으로 터전을 옮기는 기업으로선 그 정도의 배려는 당연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한데, 회사와 노조 사이에 그동안 쌓인 신뢰 덕에 공장 이전 합의가 무난히 이뤄진 것이다. “노사간의 신뢰는 거창한 것보다 작은 약속이라도 지키는 데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1992년에 ‘비전 2000’을 발표하면서 2000년까지 업계 평균 수준인 급여를 최고로 끌어올리고 14위권이던 매출을 5위권으로 높이겠다고 목표를 제시한 뒤 이를 앞당겨 달성했습니다. 이렇게 차근차근 약속을 지키면서 믿음이 높아졌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노사관계라면 아버지인 김 회장의 덕을 톡톡히 봤다는 생각이 든다. 창업자인 김 회장은 노조 설립을 막기는커녕 되레 노조를 만들도록 먼저 권유했다. 1974년 노조 설립 31년을 맞은 지금까지 한번도 노사 분규를 겪지 않은 데는 이런 바탕이 깔려 있다. 지난 1985년 업계 처음으로 주 5일 근무제를 도입하고, 78년부터 임직원 자녀 2명에 대해 대학까지 학자금 전액을 지원하는 등 복지제도를 일찌감치 실시한 것도 노사관계를 부드럽게 한 요인으로 꼽힌다.
영세한 국내 제약업계의 구조조정을
아버지에서 아들의 ‘약속 지키기’ 릴레이는 노사관계에서 나아가 주주관계와 회사 실적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한독약품은 설립 뒤 지난해까지 50년 연속 흑자 배당을 실시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설립 10년 만인 1964년 첫 한-독 합작사로 전환한 이 회사가 국내 합작기업 가운데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히는 이유다.
김 부회장은 제약업의 앞날을 밝게 보면서도 업계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편다. 인구 노령화와 건강에 대한 관심 고조로 의료 서비스의 수요가 높아지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고만고만한 제약업체들이 난립해 과당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에서다. “7조원에 이르는 제약 시장에 대략 300개 회사가 경쟁을 벌이는 실정입니다. 세계 1위인 미국 파이자의 연매출이 500억달러(50조원), 연구·개발(R&D) 투자가 150억달러(15조원)인 것과 비교할 때 너무나 영세합니다.” 일본처럼 국내 업체들끼리 인수·합병(M&A)을 통해 최소한의 규모를 갖춰야 한다는 얘기다.
노사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국내합작 기업 가운데 대표적 성공사례 이끌어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외국계 기업에서 아버지-아들로 대를 이어가며 경영하는 예를 찾아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 특이한 사례의 대표 격으로 김영진(49) 한독약품 대표이사 부회장을 꼽을 수 있다. 김 부회장은 한독약품의 전신인 연합약품 창립자인 김신권(83) 한독약품 회장의 아들이다. 김 부회장은 한독약품의 대주주가 독일계 훽스트에서 프랑스계 사노피 아벤티스로 바뀌는 와중에도 여전히 굳건하게 경영자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공장 이전, 직원들에게 믿음 주다 국내 기업과는 다른 풍토의 외국계 기업인데, 아버지가 경영하는 회사를 피하고 싶지는 않았을까? “요즘 들어 아버님이 그러시데요. ‘난 (한독약품 입사를) 강요한 적 없고, 네 결정이었다.’ (웃음) 굳이 말하자면 복합적이었죠. 제 스스로도 자격이 된다면 (한독약품에) 들어가서 일해보고 싶었습니다.” 김 부회장이 한독약품에 정식 입사한 것은 1984년.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1979)에 이어 미국 인디애나대학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마친 무렵이었다. 당시 직책은 경영조정실 부장. MBA 출신이라지만 파격적인 발탁 인사인 듯하다. 창업자 2세에 대한 특혜였을까?

김영진 부회장은 "노사간의 신뢰는 작은 약속부터 지키는 데서 생긴다"고 말한다. (사진/ 윤운식 기자)

한독약품은 설립 뒤 50년 연속 흑자 배당을 실시한 기업으로 유명하다. 충북 음성 공장. (사진/ 한독약품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