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 회사채 마구 껴안는 부실기업 구세주… 국민혈세 검증없이 투입하고 사후관리 허술  
   
  현대증권이 ‘바이코리아펀드’로 한창 잘 나가던 시절인 지난 98∼99년에 당시 이익치 회장은 정주영 명예회장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현대 관계자들의 전언에 따르면, 바이코리아펀드의 수신고가 하루에 1천억 단위로 늘어날 때면 이익치 회장은 어김없이 계동 현대그룹 사옥의 명예회장실로 바로 출근해 “아버님, 어제도 기천억원 들어왔습니다”라며 보고했다고 한다. 마치 ‘현대가 쓸 수 있는 돈이 이렇게 많이 모였으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으시냐’는 듯. 
  실제로 현대증권은 ‘바이(Buy) 코리아’를 외치며 고객들한테 거둬들인 돈을 ‘바이 현대’에 많이 동원했다. 직접 현대 계열사의 주식이나 회사채를 사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금융기관으로 돈을 한 바퀴 돌려서 현대 계열사에 넣기도 했다. 고객돈을 계열사 주가띄우기에 동원한 적도 있다. 이익치 회장의 경영사전에 ‘금융기관의 선관의무’(고객재산에 대한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의무)란 말은 없었던 모양이다. 
   
  현대가 끝내 버틸 수 있는 든든한 배경 
   
 
이렇게 현대증권이 든든한 금고구실을 한 덕택에 현대그룹은 98∼99년을 풍성하게 보냈다. 이 기간 대부분 다른 재벌들이 몸을 잔뜩 움츠려 축소지향의 길을 걸은 반면에 현대그룹은 한화에너지와 LG반도체를 인수하고, 생명보험업에 새로 뛰어들고, 대북사업에 수천억원을 쏟아붓는 등 왕성한 자금력을 과시했다. 99년 말까지 부채비율을 200% 이하로 줄이라는 정부의 요구도, 부채총액을 줄이기보다는 주식시장에서 유상증자를 통해 자본금을 대폭 늘림으로써 거뜬히 충족시켰다. 99년 한해에만 현대 계열사들의 유상증자 규모가 14조원에 이른다. 그러나 이런 무늬만 갖춘 구조조정과 확장경영의 후유증이 2000년 상반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지금은 현대그룹에서 피어오른 먹구름이 한국경제 전체를 어둡게 하고 있다. 언제 걷힐지도 불투명하다. 자금시장에서는 현대 일부계열사들의 유동성 위기가 초대형 태풍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예보가 떨어진 지 오래다. 현대 계열사들이 현대증권의 도움을 얻어 금융시장에서 돈을 마구 끌어다 쓰기 시작한 것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로 기업들이 극심한 자금가뭄을 겪던 97년 말부터이다. 당시 은행기능이 마비된 상태여서 현대는 주로 회사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했다. 회사채 만기가 3년짜리라는 점을 감안하면 현대 계열사들은 2000년 말부터 자금순환에 문제가 생길 게 뻔하다. 아니나 다를까 2000년 12월부터 현대에는 ‘잔인한 달’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현대증권이나 현대투신이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인데 어떻게 해야 하나? 하지만 이런 곤란한 지경에 빠진 현대에 새로운 구세주가 등장했다. 바로 정부와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다. 정부는 지난해 12월26일 진념 재경부 장관 주재로 경제장관간담회를 열어 ‘자금시장 안정을 위한 회사채 발행 원활화 방안’을 발표했다. 올해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 총 64조원 가운데 차환발행이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 약 25조원은 산업은행을 이용하겠다는 게 이 방안의 골자이다. 즉 그냥 내버려두면 25조원이라는 기업빚이 부도를 낼 수 있기 때문에 산업은행을 내세워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를 ‘회사채 신속인수방안’이라고도 표현한다. 만약 만기가 돌아온 회사채를 자체 자금으로 갚지 못하는 기업에는 만기도래분의 20%만 감당하도록 하고, 나머지 80%는 산업은행이 신속하게 인수해 원리급 지급을 책임지는 방안이다. 산은이 인수한 회사채는 나중에 투신사와 은행들이 운영하고 있는 프라이머리CBO(채권담보부증권) 및 CLO(대출담보증권)에 70%를 편입시키며, 20%는 주채권은행이 인수, 나머지 10%만 산은이 끝까지 보유하도록 했다. 떵떵거리는 채무자… 부실기업의 국유화?
  정부가 이런 방안을 마련한 당일 오후 곧바로 산업은행 주관으로 채권금융기관협의회가 열렸다. 적기 지원해야할 대상기업을 선정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 멋모르고 찾아간 금융기관 여신담당 임원들은 정부의 방안이 ‘현대 살리기’에 초점을 맞춘 것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채권단에 일방적으로 통보된 첫 번째 지원대상기업은 현대전자, 현대건설, 현대상선, 고려산업개발, 쌍용양회, 성신양회 등 6개사였다. 2000년 12월26일부터 올해 1월 말까지 만기도래하는 이들 6개사의 회사채 1조3737억원 가운데 80%인 1조988억원을 우선 지원한다는 내용인데, 현대전자 회사채 6787억원 등 현대계열 4개사에 대한 지원규모가 전체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단 1월 말까지 지원규모만 그렇다.  
  회사채 차환발행이 전혀 안 되고 있는 현대 계열사는 모두 정몽헌 회장이 거느린 회사들이다. 이미 지원대상에 선정된 4개사말고도 현대석유화학까지 포함한 5개사의 올해 회사채 만기도래액은 약 7조원에 이른다. 정부가 산업은행을 통해 인수하겠다고 밝힌 25조원의 4분의 1을 넘는다. 이렇게 정부가 7조원의 빚을 막아주기로 결정한 뒤 현대 계열사들의 태도는 더욱 가관이다. 한마디로 ‘도덕적 해이’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올해 만기가 끝나는 회사채 규모가 3조8450억원에 이르는 현대전자는 이미 지난해 12월26일 만기도래분 1천억원부터 산업은행에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산업은행과 채권은행들이 차환발행 회사채의 금리를 놓고 티격태격하는 바람에 인수절차가 지연되는 사이에, 현대전자 회사채를 보유한 금융기관들은 당연히 현대전자쪽에 계속 상환을 독촉했다. 그럴 때마다 현대전자에서는 “산업은행에서 원리금을 지급할 테니까 기다려봐라”는 식으로 답변했다. ㄷ투신사의 자산운용 담당자는 “현대전자에서는 산업은행으로 상환책임을 넘기고 산업은행에는 문의할 창구조차 없는 상태가 한동안 지속되고 있다”면서 채무자로서의 기본적인 자세마저 상실한 현대의 태도에 분개했다. 회사채는 어음과 마찬가지로 만기가 지나면 부도처리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현대전자 회사채의 경우 채권 금융기관이 부도대전을 띄우더라도 중간에 은행-증권예탁원-금융결제원으로 가는 사이에 금융당국의 지시로 유야무야되고 있다. 산업은행을 통한 불량 회사채 인수는 민간부실을 국유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산업은행이 인수한 채권이 부실화하면 고스란히 국민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이미 IMF사태 이후 산업은행에 투입된 재정자금이 4조8천억원에 이르며 올해 예산에도 1조2천억원의 산은 추가 증자재원이 반영되어 있다. 이렇게 들어간 국민세금은 정부가 발표하는 공적자금에 포함되지 않아 투입경위와 사후관리에 대한 감시도 허술하다. 
  일반은행의 경우에는 공적자금이 들어갈 때 금융감독원이 특별검사를 해 부실에 대한 원인규명을 하고 주주나 임직원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묻지만 산업은행에 대해서는 그런 절차가 없다. 금융감독원이 지난 99년 2월에 처음으로 재경부 의뢰를 받아 산업은행에 대한 종합경영실태 평가를 실시해 방만한 여신관리에 책임이 있는 전·현직 임직원 40여명을 적발했지만 문책권한이 있는 재경부가 그냥 봐줬다. 오히려 당시 문책대상이었던 이근영 산은 총재가 지금은 금융감독위원장으로 영전했다. 이 때문인지 금감원은 지난해 산업은행에 대한 정기검사를 생략했고 올해도 검사일정이 잡혀 있지 않다. 또 이번에 정부는 회사채 신속인수방안을 내놓으면서 산업은행에는 동일계열 여신한도제 적용을 예외로 하고 한은이 수시로 유동성 지원을 하며, 필요할 경우에는 1조2천억원으로 잡혀 있는 증자규모를 더 늘리는 방안까지 강구하기로 했다.  
 
“당신 돈이라면 그렇게 허비할 수 있나” 그러나 이렇게 추가증자를 해도 산업은행이 ‘클린뱅크’로 거듭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2000년 9월 말 현재 이자를 제때 받지 못하는 고정이하 부실여신이 7조2542억원으로 전체 여신 60조9617억원의 11.9%나 차지한다. 산업은행은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정부가 최후의 순간에 선택할 수 있는 카드이다. 정부가 우려하는 대로 올해 만약 25조원이나 되는 회사채가 부도를 낸다면 지금 우리 경제여건상 충격을 견디기 힘들다. 이런 측면에서 마지막 카드까지 빼든 정부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지원대상 기업의 중장기 생존가능성에 대한 분석과 사후 관리대책없이 단지 목숨을 연명시키는 차원으로만 풀어간다면 나중에 더 큰 재앙을 맞게 된다. 부실기업 지원을 하기 이전에 정부와 산업은행 관계자들은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한번 던져보면 좋을 것 같다. “네 돈이라면 그렇게 하겠냐?” 박순빈 기자sbpark@hani.co.kr

사진/누구를 위한 국책은행인가. 산업은행이 막무가내식 회사채 인수를 통해 부실기업 구세주 노릇을 톡톡히 하고있다.(강창광 기자)
이렇게 현대증권이 든든한 금고구실을 한 덕택에 현대그룹은 98∼99년을 풍성하게 보냈다. 이 기간 대부분 다른 재벌들이 몸을 잔뜩 움츠려 축소지향의 길을 걸은 반면에 현대그룹은 한화에너지와 LG반도체를 인수하고, 생명보험업에 새로 뛰어들고, 대북사업에 수천억원을 쏟아붓는 등 왕성한 자금력을 과시했다. 99년 말까지 부채비율을 200% 이하로 줄이라는 정부의 요구도, 부채총액을 줄이기보다는 주식시장에서 유상증자를 통해 자본금을 대폭 늘림으로써 거뜬히 충족시켰다. 99년 한해에만 현대 계열사들의 유상증자 규모가 14조원에 이른다. 그러나 이런 무늬만 갖춘 구조조정과 확장경영의 후유증이 2000년 상반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지금은 현대그룹에서 피어오른 먹구름이 한국경제 전체를 어둡게 하고 있다. 언제 걷힐지도 불투명하다. 자금시장에서는 현대 일부계열사들의 유동성 위기가 초대형 태풍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예보가 떨어진 지 오래다. 현대 계열사들이 현대증권의 도움을 얻어 금융시장에서 돈을 마구 끌어다 쓰기 시작한 것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로 기업들이 극심한 자금가뭄을 겪던 97년 말부터이다. 당시 은행기능이 마비된 상태여서 현대는 주로 회사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했다. 회사채 만기가 3년짜리라는 점을 감안하면 현대 계열사들은 2000년 말부터 자금순환에 문제가 생길 게 뻔하다. 아니나 다를까 2000년 12월부터 현대에는 ‘잔인한 달’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현대증권이나 현대투신이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인데 어떻게 해야 하나? 하지만 이런 곤란한 지경에 빠진 현대에 새로운 구세주가 등장했다. 바로 정부와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다. 정부는 지난해 12월26일 진념 재경부 장관 주재로 경제장관간담회를 열어 ‘자금시장 안정을 위한 회사채 발행 원활화 방안’을 발표했다. 올해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 총 64조원 가운데 차환발행이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 약 25조원은 산업은행을 이용하겠다는 게 이 방안의 골자이다. 즉 그냥 내버려두면 25조원이라는 기업빚이 부도를 낼 수 있기 때문에 산업은행을 내세워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를 ‘회사채 신속인수방안’이라고도 표현한다. 만약 만기가 돌아온 회사채를 자체 자금으로 갚지 못하는 기업에는 만기도래분의 20%만 감당하도록 하고, 나머지 80%는 산업은행이 신속하게 인수해 원리급 지급을 책임지는 방안이다. 산은이 인수한 회사채는 나중에 투신사와 은행들이 운영하고 있는 프라이머리CBO(채권담보부증권) 및 CLO(대출담보증권)에 70%를 편입시키며, 20%는 주채권은행이 인수, 나머지 10%만 산은이 끝까지 보유하도록 했다. 떵떵거리는 채무자… 부실기업의 국유화?

사진/정부는 산업은행을 통해 현대그룹이 지고 있는 7조원의 빚을 막아주기로 했다. 사진은 현대건설 채권회의 모습.(윤운식)

“당신 돈이라면 그렇게 허비할 수 있나” 그러나 이렇게 추가증자를 해도 산업은행이 ‘클린뱅크’로 거듭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2000년 9월 말 현재 이자를 제때 받지 못하는 고정이하 부실여신이 7조2542억원으로 전체 여신 60조9617억원의 11.9%나 차지한다. 산업은행은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정부가 최후의 순간에 선택할 수 있는 카드이다. 정부가 우려하는 대로 올해 만약 25조원이나 되는 회사채가 부도를 낸다면 지금 우리 경제여건상 충격을 견디기 힘들다. 이런 측면에서 마지막 카드까지 빼든 정부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지원대상 기업의 중장기 생존가능성에 대한 분석과 사후 관리대책없이 단지 목숨을 연명시키는 차원으로만 풀어간다면 나중에 더 큰 재앙을 맞게 된다. 부실기업 지원을 하기 이전에 정부와 산업은행 관계자들은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한번 던져보면 좋을 것 같다. “네 돈이라면 그렇게 하겠냐?” 박순빈 기자sbpark@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