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의 외국기업 한국인 CEO]
화학공학 분야의 외길 걸어온 한국바스프 김종광 회장
일본·독일 회사와의 합작 사업으로 선진적 공장관리를 배우다 공고(한양공업고), 공대(서울대 화학공학과) 졸업에 동양나이론, 한·일 합작 동양폴리에스터, 한·독 합작 효성바스프, 독일계 화학회사인 한국바스프로 이어지는 김종광(60) 회장의 이력에선 도무지 틈새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공계 학생 시절을 빼고 사회생활로만 쳐도 35년 내내 ‘화학공학’ 분야로 빽빽이 연결된 외길이다. “당시(1960년대)엔 의대보다 공대가 더 인기였습니다. 산업화·공업화가 한창 이뤄지던 때였으니까. 공고, 공대에 대한 사회적인 평가가 높았고, 수요가 많아 취직하기도 쉬웠습니다. 공대 다니는 데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지요.” 오일쇼크, 위기는 곧 기회
강원도 원주 농촌마을에서 자란 그는 고교 때부터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유학했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이었지만, 서울에 터전을 잡고 있던 고모들의 도움으로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국립대여서 학비가 상대적으로 쌌고, 당시 상계동에 있던 서울대 공대에서 기숙사를 운영한 것도 농촌 출신인 그에겐 다행스런 일이었다. 1970년 육군 중위(ROTC)로 제대한 뒤 동양나이론을 통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당시만 해도 이 회사는 한국나이론(현 코오롱), 태광산업 등과 함께 인기 절정을 구가하고 있었다. 중합(重合·동일분자를 2개 이상 합쳐 분자량이 큰 화합물을 만드는 반응) 공장에 배치돼 생산관리 업무를 맡게 된 그는 이론과 현장의 격차를 실감해야 했다. “배관, 전기, 기계에 대한 현장 기술이나 경험이 없어서 적잖이 고생했습니다. 반응기(대형 탱크) 내부 청소를 해야 하는데, 밸브를 틀어도 물이 안 나오는 겁니다. 밸브가 거꾸로 달려 있는 것도 몰랐던 거지요, 허허.”
중합 공장에서 3년여 경험을 쌓은 그는 효성 계열 동양나이론과 일본의 화학회사 아사히케미스트리의 합작 사업인 동양폴리에스터 설립 업무에 투입된다. 그는 이 시기가 인생사에서 가장 중요한 때였다고 말한다. 합작회사 설립에 처음부터 관여하면서 외국의 앞선 기술을 익히고 합작 사업의 성공 비결을 배웠다.
“합작을 막 추진하던 때가 하필이면 1973년, 제1차 오일쇼크가 터진 때였습니다. 회사 안팎에서 우려가 많았습니다. 기름값이 치솟아 석유화학 제품의 값도 높아질 수밖에 없는데 장사가 되겠느냐는 것이었죠.” 안팎의 걱정에 대한 합작사업팀의 설득 논리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시장잠재력이 있다는 객관적인 수치를 대는 것이었습니다. 나일론이나 폴리에스테르의 1인당 소비량이 선진국의 10분의 1에 불과해 잠재력은 충분하다고 봤습니다. 둘째로 위기는 곧 기회라는 점을 강조했지요. 위기는 우리만 겪는 게 아니어서 전체적인 투자가 줄어들 테니 우리는 오히려 성장성 있는 곳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합작사업팀이 겪어내야 할 또 한 가지 난점은 일본쪽 파트너에게서 기술을 쉽게 이전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합작회사 출범 전 석달가량 일본에서 연수를 받았는데, 일본 공장의 책임자들은 ‘노하우’(know-how)만 배워가고, ‘노와이’(know-why)는 배우려 하지 말라더군요. 알려진 기술을 배우는 것도 벅찬데, 왜 자꾸 근본적으로 파고들어가는 질문을 하느냐는 것이었죠.” 일본쪽의 홀대에도 합작사업팀이 ‘노하우’ 이상의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일본으로 떠나기 전 미리 준비를 한 덕이었다. 3개월 동안 부랴부랴 일본어를 공부하고 기본적인 공장 운영 매뉴얼은 익히고 간 덕에 추가적인 질문을 던질 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1974년부터 시작한 한·일 합작 폴리에스테르 사업은 이듬해부터 성공적인 안착 단계에 접어들었다.
“폴리에스테르 합작 사업에 참여하면서 선진적인 공장 관리, 경영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해외 시장에 대한 안목을 넓힌 좋은 기회였고…. 외국어의 중요성에도 눈을 뜬 시기였습니다. 우리 학교 다닐 때는 일본어를 배우지 않았고, 영어는 ‘헬로’ ‘예스’만 알 정도였지요. 합작회사에서 일본인은 우리말을 못하는데, 우리쪽은 일본어를 하는 것 자체가 상대적으로 높은 경쟁력이었습니다.”
스티로폼의 새 고객 창출
한·일 합작 동양폴리에스터 울산공장에서 근무하다 친정인 동양나이론 기술부장으로 복귀한 그는 1979년 한·독 합작 사업인 효성바스프 설립 작업에 참여한다. 한·일 합작 사업을 일궈낸 그의 경험 때문이었으리라. 당시 동양나이론은 흔히 스티로폼이라고 부르는 ‘발포폴리스티렌’(EPS) 사업권을 따내 정부에서 차관 제공 등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고, 바스프의 기술과 자금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그는 효성바스프 울산공장 설립의 총책임자였고, 훗날 울산공장장(상무)을 맡게 된다.
동양나이론 기술부장으로, 당시 동양나이론 울산공장장이던 홍성범 전무와 함께 합작사업 협상을 위해 독일에 간 때는 공교롭게도 ‘12·12 군사 쿠데타’로 한국의 정정이 극도로 불안했다. “12월13일인가 14일쯤 바스프 관계자가 쪽지를 전해주더군요. 그때 쪽지에 뭐라고 표현돼 있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12·12 사태가 났다는 뭐 그런 거였습니다.” 한국에 처음으로 직접 투자를 하게 된 바스프로선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바스프는 1954년부터 한국에 염료 등을 수출할 정도로 일찌감치 우리와 인연을 맺었음에도 현지 투자는 미뤄왔다. 이듬해 벌어진 ‘5·18 항쟁’까지 감안하면 한국에 대한 투자가 꺼려졌을 법했다.
바스프 내부적으로는 투자를 결정해놓고도 최종적인 사인을 하지 않는 유보 상태는 1980년 8월까지 계속됐다. 독일쪽에서 명시적으로 얘기하진 않았어도 정정 불안의 영향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한·일 합작 폴리에스테르 사업은 초기에 안착한 데 반해 한·독 합작 스티로폼 사업은 순탄하지 않았다. 1980년대 초기 효성바스프는 적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본잠식 상태에 빠질 정도로 극심한 경영 위기를 겪었다. 1982년 6월 공장 가동에 들어가 6개월 동안 2만t을 생산해놓고선 4천t밖에 팔지 못했다. 이는 스티로폼 시장의 선발 업체인 한남화학(→미원유화 → 금호석유화학)이 때맞춰 제품을 싼값에 대거 쏟아낸 데서 비롯된 바 컸다고 한다. 더욱이 건설회사 등 큰 거래선은 모두 한남화학에서 차지하고 있어 시장을 뚫기가 만만치 않았다.
“1984년부턴가 큰 고객을 뺏기보다 작은 고객, 새 고객을 만들어내는 데 주력하면서 활로를 열었습니다. 스티로폼 가공공장과 손잡고 스티로폼 과일상자를 새로 개발하는 식이었지요.” 또 하나의 전략은 제품 규격화의 필요성을 정부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일이었다. 예컨대 단열재 KS규격을 만듦으로써 품질이 뛰어난 바스프의 강점을 살릴 수 있도록 했다. 1970년대 후반 2차 오일쇼크를 겪은 터여서 단열재 보강 및 규격화는 에너지 절감 측면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주장이었다. 바스프의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국외 수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줬다.
효성바스프 사장으로 처음 최고경영자(CEO) 반열에 오른 때는 하필이면 외환위기를 맞은 1997년 12월이었다. 외국계인데다 수출 비중이 높아 상대적으로 덜 어려웠어도 ‘이제 한국은 끝났다’는 외국 애널리스트들의 분석에 따라 한국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나돌던 때였다. 그렇지만 바스프는 한국 투자를 되레 늘리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화바스프의 한화쪽 지분을 인수하고, 동성화학의 폴리올 사업, 대상그룹의 라이신 사업을 인수하며 덩치를 키워 한국 투자 사업을 한국바스프 한 곳으로 합쳤다.
‘다섯 가족’ 아우르는 ‘용광 전략’
한국바스프는 3개 회사, 2개 사업 부문을 한데 묶은 ‘한 지붕 다섯 가족’이다. 이 때문에 CEO는 이들 다섯 가족을 하나로 녹여내는 ‘용광로’가 돼야 한다. 김 회장의 ‘용광 전략’은 두 가지다. 하나는 순환보직을 통해 직원들을 두루 섞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인트 프로젝트’를 통해 부문별 시너지 효과를 내도록 하는 것이다. 조인트 프로젝트는 예컨대 현대자동차와 계약을 할 때 플라스틱만 공급하는 게 아니라 외장 코팅 등 자동차 관련 서비스를 일괄적으로 제공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다섯 부문을 하나로 묶어내는 방식이다. ‘화공’과 ‘합작’으로 잔뼈가 굵어 이제 환갑에 이른 김 회장의 꿈은 ‘존경받는 회사’를 만드는 것이라고.
일본·독일 회사와의 합작 사업으로 선진적 공장관리를 배우다 공고(한양공업고), 공대(서울대 화학공학과) 졸업에 동양나이론, 한·일 합작 동양폴리에스터, 한·독 합작 효성바스프, 독일계 화학회사인 한국바스프로 이어지는 김종광(60) 회장의 이력에선 도무지 틈새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공계 학생 시절을 빼고 사회생활로만 쳐도 35년 내내 ‘화학공학’ 분야로 빽빽이 연결된 외길이다. “당시(1960년대)엔 의대보다 공대가 더 인기였습니다. 산업화·공업화가 한창 이뤄지던 때였으니까. 공고, 공대에 대한 사회적인 평가가 높았고, 수요가 많아 취직하기도 쉬웠습니다. 공대 다니는 데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지요.” 오일쇼크, 위기는 곧 기회
강원도 원주 농촌마을에서 자란 그는 고교 때부터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유학했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이었지만, 서울에 터전을 잡고 있던 고모들의 도움으로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국립대여서 학비가 상대적으로 쌌고, 당시 상계동에 있던 서울대 공대에서 기숙사를 운영한 것도 농촌 출신인 그에겐 다행스런 일이었다. 1970년 육군 중위(ROTC)로 제대한 뒤 동양나이론을 통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당시만 해도 이 회사는 한국나이론(현 코오롱), 태광산업 등과 함께 인기 절정을 구가하고 있었다. 중합(重合·동일분자를 2개 이상 합쳐 분자량이 큰 화합물을 만드는 반응) 공장에 배치돼 생산관리 업무를 맡게 된 그는 이론과 현장의 격차를 실감해야 했다. “배관, 전기, 기계에 대한 현장 기술이나 경험이 없어서 적잖이 고생했습니다. 반응기(대형 탱크) 내부 청소를 해야 하는데, 밸브를 틀어도 물이 안 나오는 겁니다. 밸브가 거꾸로 달려 있는 것도 몰랐던 거지요, 허허.”

'화공'과 '합작'으로 잔뼈가 굵은 김종광 회장은 '존경받는 회사'를 만드는게 꿈이라고 말한다. (사진/ 윤운식 기자)

독일계 화학회사 바스프는 '스티로풀'을 처음 개발한 회사로 정평이 나 있다. 바스프의 한국 투자 사업을 총괄하는 한국바스프 울산공장. (사진/ 한국바스프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