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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새우깡은 방사선에 젖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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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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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식품기준청의 농심 식품 수입 금지 논란의 진실은 어디에
농심쪽은 “방사선 살균 없었다” 주장, 표시와 검증 시스템 마련 시급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런던=줄리언 체인 전문위원 juliancheyne@hotmail.co.uk

신라면, 새우깡 등 농심 제품의 방사선 처리 여부를 둘러싼 소동이 절정으로 치달은 지난 7월5일.
발단이 된 영국 식품기준청(FSA) 홈페이지(www.foodstandards.gov.uk)에 접속해 관련 내용을 뒤져보고서 좀 의아스러운 점을 두 가지 발견했다. FSA는 우리나라로 치면 식품의약품안전청으로, 방사선 처리 사실을 표시하지 않았다며 농심 제품의 수입금지 조처를 내린 것으로 알려진 터였다.

금지가 아니라 ‘경보’ 수준


FSA 홈페이지에서 농심 관련 내용을 보고 의아스러웠던 것 하나는 발표 날짜가 6월15일로 한참이나 지났다는 사실이었다. 또 한 가지는 그 내용이 국내 언론에 알려진 것과는 좀 달랐다는 점. FSA가 수입금지 조처를 내렸다는 사실은 찾아볼 수 없고, ‘농심 제품의 수입 업체인 코스타 앤드 컴퍼니(G.Costa & Company Ltd)가 방사선 처리 표시를 하지 않은 일부 농심 제품을 수거하고 있다(withdraw)’는 사실을 전하고, 이에 따라 ‘FSA는 식품 경보(Food Alert)를 발동했다’는 내용으로 돼 있었다. 실질적인 효과에선 별 차이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FSA가 수입을 금지한 게 아니라 영국의 수입 업체가 문제점을 파악해 시장에서 거둬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FSA가 관계 당국과 소비자들한테 알리는 내용이었다.

전후 사정은 대략 이랬다. 애초 FSA가 홈페이지에 농심 관련 내용을 실었을 때는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했는지 영국 언론에는 전혀 실리지 않았다. 국내 언론에 이 소식이 다뤄진 것은 그로부터 약 2주일 뒤인 6월28일, <매일경제>를 통해서였다. 당시 기사는 ‘FSA가 새우깡, 신라면, 짜파게티 등 농심의 라면 및 스낵류 20종에 대해 수입 및 판매 금지 명령을 내렸다’고 전했다. FSA 홈페이지에 실린 내용이 뒤늦게 국내 언론에 포착되고 여기서 ‘수입 금지’로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국내 다른 언론에도 같은 내용으로 퍼진 것이다.

새우깡 등 농심 제품들이 방사선 처리 시비에 휘말렸다.

FSA는 <한겨레21>의 질문에 “FSA가 아닌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농심 제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뒤 코스타 앤 컴퍼니가 방사선 조사(照射) 여부를 테스트해 우리(FSA)에게 알려왔던 것”이라며 “(FSA가) 농심 제품의 수입을 금지한 것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농심 외에 다른 한국 업체들이 방사선 조사 규정을 어겼는지에 대해선 “명확한 답변을 할 순 없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어찌됐든 생명에 직결되는 ‘먹을거리’와 막연한 불안감을 안겨주는 ‘방사선’이란 낱말이 조합되자 파장은 컸다. 이에 화들짝 놀란 농심은 7월4~5일 연이틀 주요 일간지 1면에 이상윤 대표이사 이름으로 ‘방사선 살균 처리를 한 적이 없다’는 내용의 반박 광고를 실었다.

소비자들이 가장 궁금한 점은 농심 제품이 방사선 처리된 것인지, 또 방사선 처리를 한 식품의 안전성은 어떤지 하는 것일 텐데, 지금으로선 어느 것 하나 속시원히 풀리지 않고 있다. 우선, 방사선 처리 여부 문제를 보자.

농심쪽에선 ‘진공 스팀 살균설비’를 갖추고 있어 방사선 처리를 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하지만, 중국산 제품 등 원료가 방사선 처리 과정을 거쳤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라면용 스프에 들어가는 원료가 많게는 90가지에 이른다고 하니 농심쪽도 모르는 새에 방사선 처리 제품이 원료로 포함됐을 수도 있다. 유럽연합(EU) 기준에선 이런 경우에도 방사선 처리 표시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반면, 미국이나 우리나라 기준은 좀 느슨해서 최종 제품(라면용 스프의 경우 포장된 상태)에 방사선 처리를 하지 않았다면 별도 표시를 하지 않아도 된다.

농심의 최호민 차장은 “우리 회사 연구소에서 정밀 조사를 벌이고 있다”며 “철저히 조사한 데이터를 보내 (영국 당국에) 받아들여지면 판매를 재개하겠다는 답변을 수입 업체로부터 받아놓았다”고 말했다. 농심과 코스타 앤 컴퍼니는 8월 초 만나 이 문제에 대해 협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방사선 처리 식품의 안전성은 어떨까?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안전성에 별 문제가 없다고 밝힌다. 식약청 식품규격과의 한상배 연구관은 “방사선 조사는 농산물의 발아 억제, 숙도 지연(천천히 익게 하는), 병원균 살균, 해충 사멸 등을 위해 이온화 에너지(방사선)를 활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건이나 핵실험에서 누출된 방사능 물질에 오염된 식품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표시 규정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영국 수입업체가 방사선 처리 표시 규정을 어긴 농심제품들을 수거하고 있다고 알린 영국 식품기준청(FSA)홈페이지.

한 연구관에 따르면 세계보건기구(WHO), 세계식량기구(FAO)가 1980년에 방사선 처리 식품에 대해 “독성학적 장애를 일으키지 않아 식품 안전성·건전성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1992년에는 WHO와 세계소비자연맹(IOCU·현 CI) 공동으로 방사선 조사 식품의 안전성을 재확인했다. 또 1997년에 WHO, FAO,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다시 한번 안전성·건전성에 문제가 없다는 내용을 발표한 바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김재옥 ‘소비자 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소시모) 회장은 “WHO나 FAO 등은 정부간 협의기구일 뿐 뭘 결정하는 데가 아니다”라며 “1992년 국제소비자기구 회의에서도 안전성을 재확인한 게 아니라 각국이 알아서 하되 소비자들이 알 수 있게 표시하도록 결정했던 것”이라고 반박했다. 안전성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식품위생법 규정은 감자, 밤, 양파, 마늘, 복합조미식품, 건조 채소류, 건조 향신료 등 26개 품목에 대해 10kGy(킬로그레이·방사선 에너지량 단위) 안에서 방사선 조사를 허용하고 제품 용기에 이를 표기하도록 돼 있다. 그렇지만 이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시중에서 판매되는 식품 어디에서도 방사선 조사 처리 표시를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방사선 조사 업무를 전담하는 2명의 식약청 직원으로는 역부족이란 얘기도 들린다. 당장 결론을 내기 어려운 안전성 논란보다 방사선 처리를 했는지 여부를 소비자들이 알 수 있게 표시하고 이를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우선 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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