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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독일과 외환위기, 그것은 나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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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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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부터 독일이라는 한 우물만 판 김한준 ‘만 트럭·버스 코리아’ 대표
효성독일에서 ‘악역’을 맡은 힘겨운 기억이 아시아 유일 현지인 사장으로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김한준(40) 사장의 이력서에는 ‘독일’이란 낱말이 곳곳에 쓰여 있다. 독일문학과(연세대) 졸업, 효성독일(효성물산 독일 현지 법인) 관리 총괄, 독일 기업인 바이엘 코리아 차장에 이어 역시 독일계 기업인 지금의 ‘만 트럭·버스 코리아’ 대표까지…. 사회 생활을 시작한 뒤 여러 회사를 옮겨다녔어도 늘 ‘독일’이란 낱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맹렬 학습, 꿈 속에서도 독일어 할 정도


김한준 사장은 기업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직원들 사이의 융합과 인화를 꼽는다. (사진/ 박승화 기자)

김 사장의 독일(어) 인연은 대학 문을 두드린 19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순위로 지망한 곳은 경영학과였는데, 뜻밖에 2지망인 독문학과에 합격하면서 독일어와 본격적으로 씨름을 벌이게 됐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공부한 적이 있거든요. 1지망은 아니었지만, 한번 열심히 해보자고 맘먹었습니다.”

독일어 배우기가 좀 어렵지 않았나요? 저도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웠지만, 3년 공부하고도 할 줄 아는 말이라곤 ‘이히 리베 디히’(Ich liebe dich·나는 너를 사랑해)뿐인데…. (웃음)

“고생 좀 했죠. 고교 때 배운 것과는 차이가 많이 나서….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으니 학원을 다니고, 남산에 있는 독일문화원에서도 독일어 공부를 했습니다. 독일문화원에서 공부한 덕을 많이 본 것 같아요.” 당시 독일문화원의 수업 일정은 말하기 위주로 1주일에 3회(1회 4시간)씩 진행될 정도로 매우 빡빡했다. 그렇게 6개월을 하고 나니 꿈속에서도 독일어를 할 정도였단다. 독일문화원에서 1년 반 정도 공부한 뒤부터 그는 독일어에는 웬만큼 자신감을 갖게 됐다.

독일어 공부를 하면서도 늘 관심의 첫 대상은 기업 경영쪽이었다. 학과 선택에서 1순위로 경영학과를 써냈던 것이나, 군(공군) 제대 뒤 연세대 경영대학원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거쳤던 데서 이를 엿볼 수 있다. 독문학과 대학원(연세대)을 마치고 종합상사인 효성물산에 입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가 효성물산에 입사하던 1990년대 초 종합상사는 취업 준비생들한테 단연 인기였다. 외국에서 주재원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처음에 회사에선 영업 분야로 갈 것을 권했는데, 저는 관리 부서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영업은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관리쪽을 맡는 게 외국에 갈 기회를 빨리 잡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요. 운 좋게 입사 3년 만인 1994년 말에 독일에 가게됐습니다.” (웃음)

그는 효성독일에서 영업지원부터 시작해 자금·회계 업무를 맡다가 나중엔 관리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독일 사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은 시기였다. 한국 사회를 일대 위기로 몰아넣은 외환위기를 맞은 것도 독일 현지에서였다. 타국에서 맞은 외환위기는 그에게 쓰라린 고통을 안겼다.

‘금 모으기 운동’ 덕택에 살았다?

종합상사의 업무 특성상 외환위기 때 어려움이 컸을 듯합니다.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수출입 업무를 중심으로 하는 종합상사는 자금 차입 규모가 컸거든요. 은행들이 신규 여신을 중단했을 뿐 아니라 이미 꿔준 자금마저 회수하고…. 한마디로 정신없었죠.”

자금 압박 이상으로 그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독일인 종업원들을 내보는 악역(관리 총괄)을 맡아야 하는 일이었다. 독일의 법 체계에선 회사가 어려움에 처해도 해고를 하는 게 쉽지 않은데, 한국 본사에선 몸피를 줄이라고 연일 닦달을 해대는 통에 가운데 끼인 그의 처지는 옹색하기만 했다. 그래도 별 수는 없었다. 본사의 지침을 따라야 하는 형편이니 소송을 불사하고 독일인 직원 20명 가운데 15명을 내보내는 대대적인 감원 조처를 단행했다. 소송이 잇따랐음은 물론이다.

그런 중에 자금 압박은 더욱 거세어져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때는 되레 외국계 은행들이 낫더군요. 외국계의 경우 비즈니스 특성과 자금 흐름을 설명하면서 분할상환한다고 하면 인정해주는데, 국내 은행들은 무조건 갚으라고 하니…. 그만큼 다급했기 때문이겠지요.”

국내 은행들한테 좀 섭섭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그즈음 고국에서 들려온 감동스런 소식이 그의 곤경을 덜어주는 뜻밖의 일을 경험한다. 그에겐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드라마틱한 순간이었다. 그 감동스런 소식이란 바로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금 모으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뉴스였다.

김한준 사장(왼쪽에서 세 번째)이 경기도 화성의 만 트럭 출고장에서 직원들과 포즈를 취했다. '만 트럭·버스 코리아'는 대형 트럭을 수입 판매하고 있다. (사진/ 만 트럭 코리아)

“정리해고된 독일인 직원 15명에 대한 소송을 담당한 판사가 그러더군요. ‘한국이 어렵다는 것 들어서 잘 알고 있다. 금붙이를 모아 나라 빚 갚자는 운동이 벌어진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런데 나라가 파산한다고 어떻게 개인이 자기 귀금속을 처분해 국가 부채를 줄이자고 하는지, 난 그런 국민 처음 봤다. 거기에 감명받았다’고.” 그러더니 그 판사는 15명에 대해 일괄적으로 1년 근무 기간당 1개월치의 급여를 지급하고 화해하라는 조정 결정을 내렸단다. 그런 조건이야 한국에서도 적용되는 것이니 안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김 사장은 “국민 도움을 많이 봤다”며 웃었다. ‘국민 도움 많이 봤다’는 대목에서 김 사장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만큼 절박한 시절이었으리라는 짐작과 함께, 해고당한 독일 노동자들 처지에선 ‘금 모으기 운동’이 반갑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좀 엉뚱한(?) 생각이 꼬리를 이었다.

사람 뽑을 때 친화력부터 따져

외환위기라는 폭풍 속에서 자금 돌려막기와 구조조정으로 전쟁을 치른 뒤 귀국한 것은 1999년 2월. 외환위기의 충격파가 채 가시지 않은 시절이었다. “근무 여건이 너무 안 좋아져 있더군요. 왜 있잖아요, ‘너 아니라도 일할 사람 많다’는 분위기. 그게 너무 싫었습니다. 그래서 노력한 만큼 대우받는 데로 떠나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당시엔 이름도 생소했던 헤드헌팅 업체에 명단을 올렸더니 오래지 않아 몇 군데서 입질이 왔고, 최종적으로 독일계 제약업체인 바이엘코리아에 입사하게 된다. 독일어 구사가 가능했던 게 이직에서 큰 강점으로 작용했다.

지금의 만 트럭·버스 코리아로 오게 된 것은 어떤 계기였나요?

“만 트럭이 국내에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럽에선 유명한 기업입니다. 이 회사의 주거래은행인 코메르츠방크의 지인이 소개해줬습니다. 독일 현지에서 일할 때 거래 관계를 맺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이엘코리아에 들어간 지 1년 반 정도 된 때였지요. 만 트럭이 한국에 설립하는 현지 법인의 관리를 맡을 사람을 찾고 있다고 해서 응했던 겁니다.” 2001년 만 트럭·버스 코리아 설립 때부터 참여한 그는 2003년 이사로 승진한 데 이어 지난해 마침내 최고경영자 자리에 올랐다. 만 트럭·버스의 해외 자회사 35개 가운데 현지인을 사장으로 두고 있는 데는 3곳뿐이며, 아시아 지역에선 한국뿐이라는 점에서 김 사장은 터전을 다진 셈이다.

김 사장이 회사 경영에서 가장 중시하는 점은 직원들 사이의 융합과 인화다. 그래서 사람을 새로 뽑을 때도 친화력이 있는지를 제일 먼저 따진다고 한다. 사람들과 잘 사귀고 친하게 지낼 수 있어야 업무도 쉽게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다. 물론, 외국계 기업이니만큼 어학은 기본적으로 중요한 요소인데, 여기에서도 시험 점수보다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대화 능력을 중요하게 따진다고 한다. 때문에 독일어든 영어든 해외 배낭여행을 가거나 나라 밖 현지 경험을 쌓으면서 배우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김 사장은 권했다.


대형 트럭 틈새를 노린다

디젤 엔진을 세계최초로 상용화한 만 트럭·버스의 한국 진입 작전

만(MAN) 트럭·버스는 1758년 독일 오버하우젠의 세인트 안토니 철공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내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회사이나, 세계 처음으로 디젤 엔진을 상용화한 기업으로 유럽·중동·아프리카권에서는 지명도가 높다. 세계 상용차 시장에서 벤츠(독일), 볼보(스웨덴)와 함께 선두권에 들어 있다. 회사 이름은 기계(Machine)와 회사의 발상지인 아우크스부르크(A)와 뉘른베르크(N)의 지명에서 따왔다고 한다.

만 트럭·버스의 전신인 ‘아우크스부르크 기계회사’의 기술자인 루돌프 디젤이 1893년에 만든 세계 최초의 디젤엔진이 만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만 트럭·버스의 한국 법인인 만 트럭·버스 코리아는 지난 2001년 설립됐다. 만 트럭코리아는 서울 논현동에 본사를, 경기도 평택에 물류센터를 두고 만 트럭의 덤프트럭, 견인차 등 대형 트럭을 수입 판매하고 있다. 회사 이름에 ‘버스’가 붙어 있지만, 아직 버스는 들여오지 않았다.

덤프차, 견인차 등 대형 트럭 수입업계에서 만 트럭·버스의 비중은 아직 낮은 편이다. 지난해 대형 트럭의 내수 시장 점유율을 보면, 현대자동차가 32.0%로 1위였으며, 스카니아(스웨덴) 24.4%, 볼보(스웨덴) 15.9%, 타타대우(대우상용차) 10.0% 차례였다. 만 트럭은 이보다 한참 뒤진 3.7%였다. 그래도 2002년 2.4%, 3.2%에 견줘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현대, 대우를 빼고 대형 트럭 수입업계에서만 볼 때 점유율이 2002년 2.4%, 2003년 3.2%, 2004년 6.4%로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

만 트럭 코리아는 “특장차 부문에서 뛰어난 강점을 바탕으로 군용 차량 및 버스 제품도 한국에 소개함으로써 시장 확대를 모색 중이며, 한국 법인을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본부로 삼을 방침”이라고 밝혔다. 또 올해 중 영업·서비스 조직을 재정비하고 부품 조달과 서비스센터를 확중함으로써 판매 확대를 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만 트럭·버스 코리아의 직원은 45명이며, 서비스 및 부품은 대리점 계약을 맺은 딜러 체제로 별도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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