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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토익이 무슨 이익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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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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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기업에선 점차 하한선 낮추고 가산점 없애는 추세
고득점자 많아 변별력 없고 시험의 신뢰성에도 의문 제기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지난 5월부터 인턴사원 100명을 뽑기 위한 채용 절차를 진행 중인 기업은행은 이번 시험 때부터 토익(TOEIC) 점수 제한을 없앴다. 지난해까지는 토익 800점 이상자들만 응시할 수 있도록 해오던 것을 바꾼 것. 기업은행은 100여명을 추가로 뽑는 하반기 공개채용 시험에서도 토익 점수 제한을 두지 않을 계획이다.

영어 면점 등 실질적인 능력 평가 중시


국민은행은 신입 직원을 뽑을 때 제시하는 토익 점수 기준을 꾸준히 낮춰왔다. 지난 2002년 말 공채 때 860점(이공계는 800점)이던 기준을 2004년 말 800점으로 하향 조정한 데 이어 올 4~5월 채용 시험에서는 다시 700점으로 떨어뜨렸다. 토익 점수가 더 높다고 해서 추가적인 혜택(가점)을 주지도 않는다. 공기업인 한국토지공사는 필기시험 때 토익을 비롯한 영어시험 성적의 비중을 현행 4분의 1에서 8분의 1로 낮추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토익의 하한선은 700점으로 제시하고 있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삼성 계열사들은 서류 전형에서 토익의 기본 점수를 인문계 730점, 이공계 620점으로 제시하고 있을 뿐 높은 점수에 가점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LG전자를 비롯한 LG 계열사들도 이와 비슷해 하한선 700점만 두고 있을 뿐 토익 고득점에 대한 별도의 혜택은 주지 않고 있다. 두산그룹은 토익 점수 수준에 따라 차별적인 가점을 주던 방식을 바꿔 올 상반기 채용 때부터 하한선 500점만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영어시험의 대명사 격인 토익의 평균 성적은 꾸준히 오르고 있는데도 기업체의 인력 채용에서 토익의 가이드라인이나 비중은 도리어 낮아지는 흐름을 보이는 것은, 우선 토익 시험의 변별력 하락 탓으로 풀이된다. 취업난으로 토익 시험 경쟁까지 드세져 대부분 800~900점대의 고득점을 따내기 때문에 사람을 뽑는 쪽에서 볼 땐 토익 점수를 채용의 잣대로 삼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금융권을 중심으로 토익 같은 외국어 능력보다 영업력 ·창의력을 채용의 우선적 기준으로 제시하는 움직임이 있다. 기업은행 인턴사원 채용을 위해 6월22일 실시된 실무자급 면접. (사진/ 윤운식 기자)

KT 인력관리실의 공준서 과장은 “토익 시험은 이제 변별력을 상실한 상황이며, 단지 기본적인 역량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을 뿐”이라고 전했다. KT는 한때 750점과 800점, 900점대에 따라 차등을 두다가 지금은 하한선(750점)만 두고 있다. 유영천 기업은행 홍보실장은 “요즘엔 다들 기본적인 외국어 소양은 갖추고 있어 토익 점수로는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은행은 “합격자의 토익 점수 평균이 900점을 넘고 만점자도 보통 10여명씩 나온다”고 밝힌다.

다들 높게 받는 토익 점수는 이제 별로 신경쓰지 않는 항목이 돼버렸다는 것인데, 이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대목이 있다. 점수가 높아짐에도 굳이 기준선을 낮춰 잡는 이유를 뭘로 봐야 하느냐는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각 기업체 채용 담당자들과 접촉해본 결과 이는 대략 두 가지 이유로 풀이된다. 토익을 비롯한 외국어 점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항목이 부각되고 있다는 점과, 토익 시험 자체에 대한 신뢰도 하락이 그것이다.

우선 토익 시험의 신뢰성 문제부터 보자. 기업쪽을 보면, 토익 시험 점수로는 영어 능력을 제대로 판가름할 수 없다는 불신감이 배어난다. 이는 삼성·LG 계열사들의 직원 채용 과정에서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입사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잘 알려졌듯이, 삼성그룹은 깐깐한 영어 면접 절차를 두고 있다. 삼성전자 인재개발연구소의 김현도 차장은 “자유롭게 영어로 말해보도록 함으로써 최고 5%(이공계), 10%(인문계)의 가점을 준다”고 밝혔다. 듣기, 읽기만 평가하는 토익 시험만으로는 온전한 외국어 실력을 볼 수 없는 결함을 자체적인 테스트 절차로 메운다는 것이다.

LG전자도 토익 시험보다 자체적인 영어 능력 평가를 중시한다. “2003년부터 실질적인 영어구사 능력을 따진다. 토익 점수가 높다고 영어를 잘하는 게 아니다. 900점 이상이 수두룩한 실정이다. 면접 때 특정 한자 성어를 제시한 뒤 ‘영어로 풀이해보라’, ‘LG의 사업 방향을 영어로 말해봐라’ 등을 요구한다. 실질적인 외국어 구사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류 문화를 영어로 설명해보라고 한 적도 있다.”(LG전자 홍보팀 박승구 차장)

토익 시장은 폭발적 성장 가도를 달려왔다. 대학가의 토익 강좌 안내 홍보물. (사진/ 류우종 기자)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능력보다 영업력, 창의력 등 다른 항목을 중시하겠다는 분위기도 조금씩 엿보인다. 기업은행이 좋은 예다. 기업은행은 응시자의 나이 제한을 없앤 데 이어 지역할당제를 도입하고 있다. 지역할당제(합격자의 일정 비율을 지방 출신으로 채우는 것)에는 지방 배려라는 정책적 고려와 함께 우수한 인력을 뽑는다는 전략이 함께 들어 있다.

외국어 능력보다는 영업력·창의력이다

“지방대 출신의 경우 학교 추천을 받아오는데 대단히 우수한 인재가 온다. 이른바 일류대 출신이라고 해서 뽑아놓으면 1년도 안 돼 도망가는 경우가 많다. 은행쪽에서 볼 땐 더 좋은 사람을 뽑을 기회를 잃어버리는 결과가 된다. 지역할당제를 실시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또 전국적인 네트워크(영업망)를 갖추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토익 시험의 경우 변별력이 없을 뿐 아니라 영업직 같은 데서는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다.”(강권석 기업은행장)

이런 방침에 따라 기업은행은 실무자, 임원 면접 과정에서 찬반 토론을 붙이는 등의 과정을 통해 열정, 대고객 관계 등을 중점적으로 따진다고 김기현 부장은 전했다.

토익 하하선으로는 파격적인 500점을 제시하고 있는 두산그룹도 그런 예다. 두산그룹 인사기획팀의 오영섭 차장은 “올 상반기부터는 영어 점수나 학점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며 “특히 토익 점수는 사람을 선발할 때 최소한의 기준일 뿐 퍼포먼스(업무 성과)와는 무관한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토익 점수를 아주 무시할 순 없다. 기준점이 낮아지고는 있어도 토익 점수는 각 기업체 채용에서 여전히 필수적인 절차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더욱이 사법·외무·행정·기술고시 등 국가 시험에서 영어 시험을 토익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사실도 감안해야 한다. 다만, 한발 빨리 앞서가는 민간 기업체를 중심으로 토익 점수의 비중과 가이드라인을 낮추는 추세는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토익 점수를 일정 수준(예컨대 800점)까지 올린 상태라면 점수를 추가로 딸 시간과 정력을 말하기 등 실제적인 언어구사 능력을 키우는 데로 돌리거나, 관심 대상 기업체나 해당 분야의 특징적인 요구 조건을 면밀히 파악하는 데 쏟아야 할 것이다.

토익 시험은 우리나라 영어교육에 일정하게 이바지한 측면이있지만, 실제적인 영어구사 능력을 테스트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성을 띤다. 대형 서점의 주요 코너를 차지하고 있는 다양한 토익 수험서들. (사진/ 류우종 기자)


쓰기·말하기도 평가되나

듣기와 읽기만 평가하는 것이 토익의 가장 큰 한계

일본 기업체가 비즈니스 영어능력 평가를 위해 미국 교육평가위원회(ETS)에 의뢰해 탄생한 ‘토익’이 국내에 도입된 것은 1982년. 초창기 응시생은 한해 1천명을 약간 웃돌 정도였는데, 지난해엔 무려 168만4천명에 이를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토익 점수를 입사 기준으로 활용하고 있는 국내 기업체나 단체는 1천개를 웃돈다.

토익 문제 출제는 미 ETS가 담당하며, 한국에서 치러지는 시험의 관리는 시사영어사 전액 출자로 설립된 국제교류진흥회 산하 토익위원회에 맡겨져 있다. 토익위원회는 다달이 실시하는 시험 결과를 ETS로 보내 평가를 받아 수험생에게 전해주게 된다. 시험 뒤 개인별 점수 공지에 20일 정도 시일이 걸리는 것은 이처럼 시험지가 태평양을 넘나드는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만점 990점인 토익의 평균 점수는 현재 600점 수준으로, 초창기보다 20~30점 정도 높다.

토익 시장의 성장세에 힘입어 국제교류진흥회는 2003년 기준 646억원의 시험운영 수입을 거뒀다. 이는 2001년 328억원, 2002년 419억원에서 크게 늘어난 것이다. ETS에 지급하는 로열티 금액도 2001년 40억원, 2002년 51억원, 2003년 78억원 등으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토익은 ‘토플’에 비해 듣기를 강조함으로써 기업쪽에서 관심을 많이 뒀는데, 최근 들어선 한계가 많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듣기, 읽기만을 평가하기 때문에 영어구사 능력은 제대로 키울 수 없다는 점에서다. 상당수 기업체에서 토익 점수의 하한선만 둘 뿐 높은 점수에 대한 가점을 주지 않는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하한선도 낮아지는 추세다. 영어학원의 토익 강의가 정답 고르는 요령을 가르치는 족집게식으로 흐르는 현상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지난해 벌어졌던 문제 유출 사고로 공신력에 대한 시비도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정부 기관이나 평가 전문가들이 참여해 새로운 영어시험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일본영어검정협회에서 일본인의 영어 능력을 측정하기 위해 만든 ‘STEP’, 중국의 정부기관이 만든 ‘CET’ 같은 평가 방식을 만들어 토익 쏠림 현상을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동현 토익위원회 상무는 “토익의 듣기·읽기 평가를 통해 말하기·쓰기는 간접적으로 평가된다”며 “다달이 실시하는 시험의 응시생이 한번에 18만명을 웃돌기 때문에 말하기와 쓰기 직접 평가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한해 총 응시자가 8만명 정도인 토플 시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참여자가 많아 당분간은 현행 시험 방식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기업체 입사 시험 등에서 반영도가 낮아지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선, “지난해 응시자가 2003년보다 9% 정도 불어난 데서 볼 수 있듯 아직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며 “이게 수요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장기적으로는 쓰기, 말하기까지 평가하는 방식으로 바뀔 수 있다는 분위기도 엿보인다. 토플 시험이 컴퓨터를 통해 쓰기 능력을 매기고 있는 데 이어 올 9월부터 말하기까지 테스트할 예정인 것처럼 토익 시험도 바뀔 수 있다는 얘기다. 이동현 상무는 “토익 시험 방식의 개정 작업은 일상적으로 밥 먹듯이 이뤄지고 있다”며 “언제 가시화한다고 얘기할 순 없지만, 새로운 요구를 반영한 테스트 방식을 만들어내는 노력은 늘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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