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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고구마와 보온밥통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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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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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이민 1.5세대 출신’ 한국피자헛 조인수 사장이 전체 피자시장의 46%를 장악하게 되기까지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어느 한곳 그렇지 않은 데가 있을까만, 대표적인 외식업계인 피자 시장에서는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점점 까다로워지는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 수많은 업체들이 다퉈 달려들고 있는 터에 내수 위축세가 좀처럼 풀리지 않는 탓이다. 이런 형편에서도 업계 1위인 한국피자헛(미국계 ‘얌 레스토랑 인터내셔널’의 자회사)은 해마다 20% 가까운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으며 전체 피자 시장의 약 절반(지난해 말 기준 46%)을 굳건하게 점유하고 있다.

IMF 역이용, 명동 금싸라기땅 확보


(사진/ 류우종 기자)

1985년 2월 서울 이태원에 피자헛 1호점을 열면서 한국에 피자를 처음으로 소개한 한국피자헛의 중심에는 브라질 이민 1.5세대인 조인수(53) 사장이 서 있다. 조 사장이 한국피자헛에 발탁돼 대표 자리에 정식으로 오른 것은 1997년 11월27일. 공교롭게도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에 들어간다는 선언을 하기 사흘 전이었다.

“사장 취임 3일 만에 IMF 사태가 터지고 나니, 달러값이 치솟고 부동산값은 떨어지고… 난리였다. 9900원짜리 피자를 내놓은 게 그때였다.” 서울 삼성동 한국피자헛 본사에서 만난 조 사장은 옛날 일을 돌이키며 감회 어린 표정을 지었다.

한국피자헛이 IMF 사태라는 충격을 맞은 상태에서 값싼 제품을 내놓은 대응책은 곁가지였다. 조 사장은 되레 투자 확대 정책을 폈다. 전국 곳곳에 대형 매장을 확보하며 판매망을 대거 늘린 것이다. 서울 명동역 부근에 매장을 확보한 게 이때였다.

그 어려운 시기에 매장을 늘렸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달러화를 갖고 있는) 외국회사로서는 싸게 투자할 수 있다는 메리트(장점)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불투명한 때가 아니었나?

“첫 번째는 오기였다. 또 하나는 실제로 괜찮아질 것으로 확신했고. 전문가들도 한국의 금융 시스템에 일시 문제가 생긴 것으로 봤다. 외국 회사로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고, 이듬해 한국에 미국 본사 최고경영진한테도 그렇게 설명해 투자를 늘리라는 승인을 받아냈다.”

한국피자헛은 당시의 투자 확대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전국 요지에 매장을 확보하면서 터전을 다졌다. 외환위기로 부동산을 비롯한 자산의 가치가 뚝 떨어진 게 기회가 된 셈이다.

조 사장이 외국계 회사의 사령탑을 맡게 된 실마리는 이민의 역사로 거슬러올라간다. 그가 가족을 따라 브라질로 둥지를 옮긴 것은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1971년. 박정희 정권의 주도로 경제개발 붐이 일던 시절이었다. “다들 어려운 때였고, 이민 바람이 한창이었다. 이민? 당연히 가기 싫었다. 친구들이 여기 다 있었으니…. (웃으며) 여자친구도 있었고…. 어! (손을 내저으며) 이건 쓰면 안 되는데…. 당시엔 이민 가는 게 참 싫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나한테 잘된 일이었던 것 같다.”

핫 박스 배달 시스템, 대박 터뜨리다

이민 뒤의 생활사는 여느 이민자들이 겪은 바 그대로였다. “고생, 말도 못하게 많았다. 상파울루에 있는 스웨터 공장, 식료품 가게를 전전하는 생활이었다.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지만 그땐 어린 마음에 눈물도 많이 나오더라. 특별나다기보다 이민 간 이들이 하던 고생 그대로였다.” 식료품 가게에서 일할 때는 밤 12시에 트럭 뒤에 올라타고 새벽 1~2시까지 야채시장을 돌며 사들인 바나나 따위를 가게에다 부려놓는 식이었다고 한다.

한국피자헛의 리치골드피자는 한국 현지화 전략의 대표상품이다. 매장 내 전경. (사진/ 류우종 기자)

조 사장은 이민 간 지 2년 만인 1973년 브라질의 중공업 회사에 취업하면서 조금씩 미래를 준비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학교 공부를 병행한 게 이때였다. 그가 본보기(벤치마크)로 꼽은 주제 엑스페디토(Jose Expedito)씨를 만난 것도 여기서였다. “브라질 회사의 상사로 중학교 과정밖에 마치지 못했지만, 잘난 체 않으면서도 늘 자신감에 차 있는 사람이었다.”

이민길에 오른 지 10년을 넘긴 1982년, 조 사장은 미국 시카고대 경영학석사(MBA) 과정에 입학하게 된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가족이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준에 이르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조 사장은 이때가 자신의 인생에서 ‘2차 도전기’였다고 회고했다.

굳이 MBA 과정을 시작한 까닭은 무엇인가?

“국제적인 감각과 경험을 쌓자는 목적이었다. 졸업할 때(1984년)쯤 되니 여기저기서 오라는 데가 많더라. 그때 P&G(프록터 앤드 갬블)와 연결돼 13년간 일하게 됐다.”

그가 P&G에 입사한 것은 외국계 회사에서 국제적인 감각을 익히는 동시에 한국과 다시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다. ‘88 서울올림픽’에 즈음해 한국에서 외국인 투자에 대한 규제를 대폭 푸는 분위기에 맞춰 P&G를 한국에 진출시키려는 뜻을 품게 됐던 것이다. “그전까지는 한국에서 합작사를 꾸릴 때 외국 자본의 비중이 49%로 제한되다 국제화 바람을 타고 풀렸다.” 조 사장은 당시 마케팅 이사로, 외국인 상사와 함께 합작사 설립을 위한 준비팀을 꾸린 데 이어 1989년 P&G 지분이 51%인 한국P&G(당시 서통P&G)를 설립하고 한국에서 이사로 일하게 된다. P&G의 한국 진출 때 세운 공로를 반영하듯 그의 한국P&G 사번은 ‘001번’이다.

조 사장이 P&G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 사실이 바깥으로 알려지면서 한국피자헛과 인연을 맺게 됐다. P&G에서 같이 일한 바 있는 대만인 친구의 소개도 한몫했다. “P&G 시절에는 기저귀 같은 제품을 만들면 디자인부터 판매까지 마치는 데 2~3년이 걸리는데, 외식업은 2~3개월 만에 쇼부(결판)가 난다. 그래서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월급도 많이 준다고 해서, 하하.”

조 사장은 외환위기 직전 사장으로 한국피자헛에 발을 들여놓은 데 이어 수석 부사장으로 미국 본사에 돌아갔다가 2002년 11월부터 다시 한국피자헛 사장을 맡고 있다. 첫 번째 사장 임기를 마치고 미국 본사로 돌아가기 전 조 사장이 가장 신경쓴 부분은 콜센터 설립 등 배달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배달 시장이 커질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핫박스 시스템’을 들여온 것도 그 일환이었다. 핫박스는 보온밥통처럼 열선이 장착된 특수 상자를 매장에서 뜨겁게 충전한 뒤 배달 중에도 피자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주는 장치로, 배달 시장에서 주도권을 발휘한 유력한 수단이었다.

성과 힘입어 일본 KFC 이사회장 겸임

조 사장의 한국피자헛은 불고기피자, 불갈비피자, 리치골드피자 등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제품을 선보이는 현지화 전략에도 역점을 뒀다. 특히 리치골드피자는 2003년 5월 출시 석달 만에 100만판, 6개월 만에 300만판 판매라는 기록적인 실적을 거두며 최고 인기 품목으로 떠올랐다. 피자 둘레에 토속적인 ‘고구마’를 두른 리치골드피자는 한국인 출신으로 미국계 기업의 대표 자리에 오른 조 사장을 상징하는 듯하다. 한국피자헛의 괄목할 만한 성과에 힘입어 조 사장은 현재 일본KFC 이사회 회장도 겸임하고 있다.

조 사장은 인건비·부동산값 상승, 소비 위축으로 당장은 어렵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 시장을 밝게 본다고 말했다. 주5일 근무제가 확대되고 있는데다 여성 취업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여서 외식업 시장은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게 조 사장의 진단이다.

조인수 사장은?

△1952년 인천 출생

△1971년 브라질 이주

△1984년 미국 시카고대 경영학석사(MBA) 취득

△1997년 P&G(프록터 앤드 갬블) 아시아지역 총괄 매니저

△1997년 12월~2000년 1월 한국피자헛 대표

△2000년 2월~2002년 10월 미국 본사 부사장

△2002년 11월~현재 한국피자헛 대표

△2004년 2월~현재 일본KFC 이사회 회장 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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