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경영 떠넘기기식의 이상한 기업구조조정… 재벌의 멋대로 장단에 정부는 어설픈 정책 일쑤  
   
  금융구조조정 가닥잡기를 둘러싸고 금융권이 국민-주택은행의 파업 등 일대 홍역을 치르는 사이에, 기업구조조정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정부가 ‘연내 기업·금융구조조정 마무리’라는 공언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인지 부실 재벌기업에 대한 처리계획을 졸속으로 내놓고 있다. 몇 가지 계획들은 원칙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채권단의 동의절차를 거치지 않아 이행여부도 불투명하다. 
  정부는 지난 12월19일 진념 재경부 장관과 신국환 산업자원부 장관,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 이기호 경제수석이 참석한 가운데 경제장관간담회를 열어 오래된 기업구조조정 메뉴인 빅딜(대규모 사업맞교환) 마무리 방안을 확정했다. 이 자리에서 정부는 현대·삼성·대우의 항공계열사 통합법인인 한국항공우주산업에 대해 5300억원 규모의 금융지원을 하고, 현대·대우·한진의 철도차량 통합법인 한국철도차량에 대해서도 채권단의 출자전환과 채무조정을 빨리 끝내기로 했다. 항공통합법인에 대한 채권단 금융지원은 △출자전환 750억원 △차입금 상환유예 3744억원 △신규자금 지원 800억원 등이다. 한국철도차량에는 채권단의 250억원 출자전환과 1226억원의 채무조정 방안을 정부가 확정했다.  
   
  ‘연내 마무리’ 공언에 발목 잡혔나 
   
 
이어 바로 그 다음날 금융감독원에서는 현대석유화학 주요채권단 소속 7개 은행 회의가 열려 1400억원 규모의 신규자금 지원방안을 논의했다. 현대석유화학이 연말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1천억원가량의 회사채를 제대로 상환할 수 없을 것 같아 각 은행들이 6개월 만기조건으로 막아주자는 방안이었다. 현대석유화학 역시 한때 빅딜 대상기업이었으나, 삼성(삼성종합화학)과 합병협상이 일찌감치 깨졌고 일본 미쓰이로부터 외자유치 계획도 무산됐다. 어쨌든 빅딜이 필요할 정도로 재무구조나 경영상황이 심각해 ‘2000년 말까지 정상화 방안을 확정’ 하기로 국민들에게 약속한 기업이다. 그렇다면 이들 빅딜 대상 업종의 구조조정이 정부의 방침으로 마무리될 수 있을까? 채권단은 물론 해당 기업 관계자들조차 “얼토당토 않는 소리”라고 고개를 젓는다. 채권단은 금융지원을 하려면 선결조건이 있는데 제대로 충족된 기업이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빅딜업종 주요 채권단 소속 4개 은행 가운데 하나인 외환은행 관계자는 “항공 통합법인의 경우 보잉 등 선진 6개 항공사로부터의 외자유치 협상이 결렬돼 사업성과 재무건전성 확보가 불투명해졌으며 철도차량은 주주사들이 먼저 출자를 해야 하는데 전혀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전하면서 지금은 금융지원 여부를 논의할 수 없는 단계임을 분명히 했다. 현대석유화학에 대한 금융지원에 대해서도 채권단은 난색을 표명했다. 9월 말 현재 현대석유화학은 부채가 2조6천억원에 이르는 반면에 2000년 예상매출은 1조6천억원에 불과해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제대로 갚지 못할 형편이다. 지난 3년 동안 내리 적자를 봐 자본금을 다 까먹었다. 게다가 석유화학 경기도 불투명하다. 석유화학 경기악화는 수요감소 탓도 있지만, 이보다 현대와 삼성의 무리한 설비확장 투자에 따른 만성적 공급과잉의 영향도 적지 않다는 게 국내외 석유화학 업계의 시각이다. 현대석유화학과 삼성종합화학의 에틸렌 생산능력은 연 155만t으로, 국내 생산능력의 32%를 차지한다. 이런 상태에서 채권단 금융지원으로 공장을 굴러가게 해주면 한 우물을 판 우량기업들까지 어려움을 겪게 하고, 무역마찰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게 채권단의 설명이다. 금융지원 선결요건을 충족시켜야 할 해당 재벌기업들의 반응은 한술 더 뜬다. 철도차량 통합법인은 현대, 대우, 한진이 4:4:2의 비율로 현물출자를 했는데, 정부는 경제장관간담회를 통해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절차를 밟고 있는 대우 지분을 현대와 한진에 넘겨 지분구조를 조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대모비스는 “전혀 그럴 계획이 없다”, 한진중공업쪽도 “지분비율만큼 인수할 수도 안 할 수도 있지만 대우로부터 정식으로 제의받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구상이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결국 정부가 시간에 좇겨 멋대로 그림을 한번 그려봤다는 얘기이다. 자구노력 없는 재벌 부실을 혈세로 떠맡아
  정부의 이런 ‘허겁지겁 정책’은 시장에 혼란을 줄 뿐만 아니라 기업구조조정의 기본원칙을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금융계로부터 강한 비판을 사고 있다. 98년 7월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빅딜은 ‘99년 말까지 부채비율 200% 미만 달성’과 함께 5대재벌 구조조정 방식의 한 중심축이었다. 하나는 과도한 차입경영을 해소하기 위해 재무구조 개선에 초점을 맞추고, 빅딜은 재벌의 문어발식 사업확장에 의한 과잉·중복투자 해소를 위한 사업구조조정 방안이다. 또 재벌들의 자율합의로 방식으로 추진해온 빅딜에 대해서는 정부와 채권단이 지금까지 요구해온 원칙이 있다. 그것은 빅딜 이전에 대주주와 계열사들이 먼저 자구노력을 해서 해당 사업이 온전하게 굴러갈 수 있는 여건을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재벌들의 무분별한 투자로 빚어진 막대한 부실의 청소비용을 채권단과 국민들이 부담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이런 원칙이 나왔다. 이는 ‘부실기업의 부채는 재벌총수의 사재로 먼저 해결한다’는 1기 노사정위원회의 합의에 부합하는 원칙이기도 하다. 
  그러나 반도체, 자동차-전자(삼성과 대우), 석유화학, 정유, 발전설비, 선박용엔진, 철도차량, 항공 등 8개 분야의 빅딜 추진과정에서 이런 원칙이 제대로 관철된 경우가 거의 없다. 오히려 빅딜에 대한 대가로 정부가 법인세와 특별부가세의 감면과 독과점 허용과 같은 혜택을 줬을 뿐 ‘재벌의 선손실 분담’이라든지 ‘과잉·중복투자 해소’와 같은 애초 빅딜 취지와 원칙은 빛을 바랬다. 또 빅딜 추진기업은 채권단이 부채비율을 산정할 때 대상에서 빼줘, 빅딜이 재벌들에 구조조정을 미적거리게 하는 빌미를 주기도 했다. 
  빅딜을 합법적인 인원정리와 대주주의 책임분담 없이 부실을 처리하는 데 악용된 사례도 있다. 빅딜 1호 통합법인인 한국철도차량 노조는 지난 10월10일부터 파업에 들어갔다. 지하철과 철도차량을 만드는 현대모비스(옛 현대정공) 창원공장, 대우중공업 의왕공장, 한진중공업 부산 다대포공장 등 3개 공장이 빅딜을 추진할 단계에서는 각사가 노조에 고용승계를 약속했으나 막상 통합법인 출범 뒤에는 새 회사가 248명의 고용승계를 거부한 게 파업의 발단이다. 또 주주 3사가 통합 당시 부실자산을 6300억원이나 떠넘기고, 현대의 경우 부실을 털어낸 상태에서 별도로 철도차량 제작사업에 뛰어들어 통합법인의 수주여건을 악화시키는 이중플레이를 하고 있는다는 게 노조의 주장이다. 왕기정 노조 기획실장은 “3사 통합과정에서 이미 500여 노동자가 반강제로 회사를 떠났는데 회사쪽에서는 주주사들로부터 떠맡은 과도한 부실 때문에 구조조정을 더욱 압박하고 있다”면서 “잘못된 빅딜의 피해를 노동자들만 고스란히 덮어씌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정부와 채권단은 재벌개혁 혼란만 초래 
   
  금융계에서는 재벌들이 빅딜을 들고 나왔을 때부터 별로 곱지 않은 시각이 많았다. 재벌들이 과다·과오투자로 골칫덩어리가 된 사업들을 모아 채권단에 떠넘기려는 의도가 뻔하다는 게 금융계의 빅딜에 대한 평가이다. 이렇게 되면 채권단의 손실을 결국 국민세금으로 다 메워준다. 실제로 빅딜에 따라 새로 탄생한 회사를 살려보겠다는 것보다 현재 안고 있는 부실을 가장 적은 손실을 내고 털어내겠다는 발상으로 빅딜에 나선 사례가 많다. 
  방송대 김기원 교수(경제학)는 “재벌개혁은 총수의 결단이라면 물불가리지 않고 마구잡이 투자를 하는 행태를 막을 수 있도록 소유·지배구조를 바꾸는 게 본질이었는데 정부와 채권단은 빅딜에 대해 지나치게 기대를 거는 바람에 재벌개혁에 오히려 혼선만 초래했다”면서 빅딜을 ‘첫 단추부터 잘못 꿴 정책’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정부는 아직도 빅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재벌들의 장단에 춤을 추고 있는 느낌이 든다. 
    박순빈 기자sbpark@hani.co.kr 
 
   
 
 
 
 

사진/정부의 석유화학업계 구조조정 방침에 대해 의문의 목소리가 많다. 사진은 삼성종합화학 대산유화단지.
이어 바로 그 다음날 금융감독원에서는 현대석유화학 주요채권단 소속 7개 은행 회의가 열려 1400억원 규모의 신규자금 지원방안을 논의했다. 현대석유화학이 연말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1천억원가량의 회사채를 제대로 상환할 수 없을 것 같아 각 은행들이 6개월 만기조건으로 막아주자는 방안이었다. 현대석유화학 역시 한때 빅딜 대상기업이었으나, 삼성(삼성종합화학)과 합병협상이 일찌감치 깨졌고 일본 미쓰이로부터 외자유치 계획도 무산됐다. 어쨌든 빅딜이 필요할 정도로 재무구조나 경영상황이 심각해 ‘2000년 말까지 정상화 방안을 확정’ 하기로 국민들에게 약속한 기업이다. 그렇다면 이들 빅딜 대상 업종의 구조조정이 정부의 방침으로 마무리될 수 있을까? 채권단은 물론 해당 기업 관계자들조차 “얼토당토 않는 소리”라고 고개를 젓는다. 채권단은 금융지원을 하려면 선결조건이 있는데 제대로 충족된 기업이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빅딜업종 주요 채권단 소속 4개 은행 가운데 하나인 외환은행 관계자는 “항공 통합법인의 경우 보잉 등 선진 6개 항공사로부터의 외자유치 협상이 결렬돼 사업성과 재무건전성 확보가 불투명해졌으며 철도차량은 주주사들이 먼저 출자를 해야 하는데 전혀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전하면서 지금은 금융지원 여부를 논의할 수 없는 단계임을 분명히 했다. 현대석유화학에 대한 금융지원에 대해서도 채권단은 난색을 표명했다. 9월 말 현재 현대석유화학은 부채가 2조6천억원에 이르는 반면에 2000년 예상매출은 1조6천억원에 불과해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제대로 갚지 못할 형편이다. 지난 3년 동안 내리 적자를 봐 자본금을 다 까먹었다. 게다가 석유화학 경기도 불투명하다. 석유화학 경기악화는 수요감소 탓도 있지만, 이보다 현대와 삼성의 무리한 설비확장 투자에 따른 만성적 공급과잉의 영향도 적지 않다는 게 국내외 석유화학 업계의 시각이다. 현대석유화학과 삼성종합화학의 에틸렌 생산능력은 연 155만t으로, 국내 생산능력의 32%를 차지한다. 이런 상태에서 채권단 금융지원으로 공장을 굴러가게 해주면 한 우물을 판 우량기업들까지 어려움을 겪게 하고, 무역마찰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게 채권단의 설명이다. 금융지원 선결요건을 충족시켜야 할 해당 재벌기업들의 반응은 한술 더 뜬다. 철도차량 통합법인은 현대, 대우, 한진이 4:4:2의 비율로 현물출자를 했는데, 정부는 경제장관간담회를 통해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절차를 밟고 있는 대우 지분을 현대와 한진에 넘겨 지분구조를 조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대모비스는 “전혀 그럴 계획이 없다”, 한진중공업쪽도 “지분비율만큼 인수할 수도 안 할 수도 있지만 대우로부터 정식으로 제의받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구상이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결국 정부가 시간에 좇겨 멋대로 그림을 한번 그려봤다는 얘기이다. 자구노력 없는 재벌 부실을 혈세로 떠맡아

사진/구조조정은 부실 떠넘기기? 지난 98년12월 김대중대통령이 5대 재벌 구조조정 계획을 확정한 정·제계 간담회.(강재훈 기자)

사진/지난해 12월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장관회의에 참석한 진념 재경부 장관과 이기호 경제수석등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