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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임금 양보하라,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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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4-1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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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문제를 이유로 임금억제 공세 펴는 경총…양대노총은 ‘생계비’ 근거 들어 반발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지난 3월30일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정규직 노조의 양보도 동반돼야 한다”며 “대기업 노조가 올해 임금 동결에 협조한다면 올해 임금 인상분(3.9%)을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위해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경총은 올해 임금 가이드라인으로 ‘임금총액 기준 3.9% 인상, 1천명 이상 대기업은 임금 동결’을 제의했다. 경총 김영배 부회장은 “현대차의 경우 연간 인건비 2조9천억원 중 4%만 정규직 노조가 양보하면 약 1천억원의 자금을 창출해, 비정규직의 임금을 지금보다 60%가량 인상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올 임금협상 시즌을 앞두고 경총이 먼저 치고 나오면서 임금억제 공세를 편 것이다.

양대노총도 두자릿수 임금 인상 포기


이에 대해 민주노총은 올해 임금요구안으로 ‘정규직 9.3±2%(최소 7.3%, 최대 11.3%), 비정규직 15.6% 인상’을, 한국노총은 ‘정규직 9.4%, 비정규직 19.9% 인상’을 제시했다. 양대노총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임금인상 요구안을 따로 내놓은 건 올해가 처음이다. 또 외환위기 직후를 빼고 두 자릿수 임금인상안을 포기하고 한 자릿수로 제시한 것도 이례적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특히 양대노총은 비정규직 임금 수준과 관련해 장기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향후 8년간 단계적으로 ‘정규직보다 더 높은 비정규직 임금인상’을 쟁취해 2012년에 정규직 임금의 80% 수준으로, 한국노총은 7년 안에 85%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임금평등 목표를 설정했다. 물론 이 기간 중 정규직 임금도 계속 오르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예컨대 정규직 임금의 경우 1998∼2003년 평균인상률(7.2%)을 2012년까지 그대로 적용했을 때 한달 387만원이 되는데, 이때 비정규직 임금이 정규직의 80% 수준에 도달하려면 310만원이 돼야 한다. 현재 비정규직 임금은 정규직의 52% 수준에 불과하다. 민주노총 정경은 부장은 “올해는 비정규직 임금을 정규직의 53.5%까지 올리는 것이 목표인데, 이를 위해서는 비정규직 임금이 15.6% 인상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노총은 비정규직 임금을 올해 57%로 높이고 내년에 62%, 20011년에 85% 수준으로 높인다는 계획이다. 이에 따라 정규직 임금이 올해 9.4% 인상돼 225만8천원이 될 경우, 비정규직은 57%인 128만7천원이 돼야 한다. 비정규직 임금인상 요구안 19.9%는 이렇게 산출된 것이다. 물론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과학적 근거를 갖고 비정규직 임금획득 목표 80∼85%를 제시한 건 아니다. 한국노총 이민우 정책국장은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이 원칙이지만, 85% 달성은 1차적 목표이고 심리적인 선”이라고 말했다.

사실 경총의 ‘대기업 임금동결 및 비정규직 처우개선’론은 양대노총이 비정규직 임금인상안을 따로 내놓자 맞대응해 제기한 측면이 강하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 기득권’ 이데올로기와 기아차 채용비리,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폭력사태 등으로 노동계가 수세에 몰린 틈을 타 경총이 임금억제 공세에 나서고 있는 격이다. 작업장에서 저임금 비정규직을 광범위하게 활용해 돈을 벌면서, 한편으로는 명분싸움에서도 ‘비정규직 처우개선’을 앞세워 또 다른 방식으로 비정규직을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본격적인 임금교섭을 앞두고 내놓은 노사의 서로 다른 선언은 이른바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싸움’ 양상을 띠고 있다. 이런 와중에 민주노동당도 조심스럽게 비정규직 임금 쟁점에 개입하고 나섰다. 민주노동당 이해삼 비정규직철폐운동본부장은 “노동자 평균임금 이상을 받는 대기업 노조에서 과감하게 ‘물가상승률 수준’에서 임금인상을 최소화하고, 정당하게 인상받아야 할 부분이 있다면 비정규직 확산을 저지하는 기금이나 비정규직 임금 보전에 내놓겠다는 선언을 할 필요가 있다”며 “기아차 채용비리와 대의원대회 폭력사태 등으로 인해 지금은 투쟁의 진정성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이렇게 해야 노동계가 도덕적 명분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3월30일 열린 경총 '주요 대기업 노무담당 임원' 회의. (사진/ 경총 제공)

“표준생계비의 71.55% 수준까지 올려달라”

물론 ‘적정 임금수준’을 둘러싼 노동계와 사용자쪽의 시각은 철학과 접근 방식부터 근본적으로 다르다. 노동조합은 임금을 ‘생계비’ 개념으로 보는 반면, 사용자쪽은 ‘생산성 및 기업 지불능력’에 따라 임금이 정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총은 “1987∼2004년 중 평균 임금인상률은 11.9%인데 생산성 증가율은 9.3%에 그쳐 고임금으로 기업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다”며 “고용안정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상당 기간 임금상승은 생산성에 비해 2% 이상 낮게 이뤄져야 하고, 대기업은 임금을 동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비정규직 임금인상 문제는 표준생계비 등에 기초한 ‘정규직’ 임금 수준과 무관할 수 없다. 비정규직 임금은 정규직 임금 수준과 비교해서 높다 혹은 낮다를 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 표준생계비를 둘러싼 노사간 논란은 비정규직 임금과 그대로 맞닿아 있다. 경총은 “민주노총은 승용차 구입·유지비를 생계비에 포함시키고 있고, 한국노총은 표준생계비에 소파와 컴퓨터를 넣고 있다”면서 양대노총의 표준생계비가 과대계상돼 있다고 주장한다. 생계비 산출의 근거가 되는 품목과 수량을 노동계가 자의적으로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7월 열린 현대자동차 임단협 장면. (사진/ 연합)

그렇다면 양대노총이 제시한 노동자 생계비는 얼마나 될까? 2005년 민주노총 표준생계비는 월 351만4천원(3.6인 가구 기준)이다. 그런데 민주노총 조합원의 현행 평균임금은 230만원(생계비 대비 65.5%) 수준이다. 한국노총의 생계비 모형에서 2005년 표준생계비는 340만2천원(3.46인 가구 기준)인데, 이 중 가구주가 근로소득으로 충족해야 할 생계비는 70.3%인 239만1천원이다. 양대노총의 표준생계비는 이론적으로 산출되는 게 아니라 조합원 생활실태 조사를 통해 작성된다. 한국노총은 “실태조사에서 4인 가구의 과반수가 소파를 갖고 있다고 응답했고, 4인 가구 소득 중 임금소득 외에 이자소득 등 다른 소득까지 있기 때문에, 이를 빼고 가구주의 순수한 임금소득 비중(70.3%)에 맞춰 생계비를 산정했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쪽은 “부족한 생계비 전부를 요구하려면 큰 폭으로 임금을 인상해야 하지만, 비정규·영세 노동자의 임금상승을 통한 임금차별 해소에 좀더 큰 목표를 둬서 정규직 임금인상폭을 한 자릿수로 정해 표준생계비의 71.55% 수준까지 올리는 안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양대노총과 경총이 제시한 임금요구안이 자료의 신빙성을 놓고 옳고 그름을 다투는 선에서 끝나고 마는 건 아니다. 이들 요구안은 각 개별 사업장에서 ‘임금투쟁 지침’으로 쓰인다. 임금교섭에서 노동조합마다 양대노총이 내놓은 생계비 자료를 근거로 제시하면서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한국노총 이민우 정책국장은 “개별 사업장마다 임금교섭안을 짤 때 경영성과와 지불능력도 따지지만, 기본적으로 노총이 제시한 생계비 가이드라인을 중요한 지표로 제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동자쪽만 양보해야 할 문제인가

과연 “비정규직 임금 향상을 위해 대기업 노동자들이 임금을 양보해야 한다”는 경총의 논리는 수긍할 만한 것일까? 또 사용자쪽이 만약 “비정규직 19.9% 임금인상을 수용할 수도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정규직 임금인상폭을 (양대노총이 요구한) 9%대가 아니라 4%대로 더 낮춰야 한다”고 제의할 경우 노동조합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노동계는 이를 “노동자들 내부에서 양보하고 갈라먹으라는 기존 논리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일축한다.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규직의 임금 양보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노동소득분배율을 보면 1996년 63.4%를 정점으로 2003년 59.7%로 하락했다”며 “정규직이 비정규직의 몫을 떼간 것이 아니라 사용자들이 비정규직 몫을 떼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노총쪽은 “비정규직 임금인상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 정규직 임금을 더 양보해야 한다는 논리가 등장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 내부적으로 검토했다”며 “그러나 노동자쪽만 양보할 문제가 아니다. 사용자쪽도 기여를 하고 정부도 세제 등 유인을 제공해야 논의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소장은 “노조 조직률이 10%대에 불과한 기업별 노조 체제에서 대기업 정규직이 임금인상을 자제한다해도 그만큼 중소영세·비정규직 임금인상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다”며 “대기업의 낮은 임금인상은 중소영세·비정규직의 더 낮은 임금인상으로 귀결되기 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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