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 ‘정판사 사건’이 가장 큰 파장 일으켜… 최근에는 위조하기 쉬운 5천원권 위폐 급증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지난 2003년 방영돼 큰 인기를 끈 TV 역사드라마 <다모>에 조선시대 위조 엽전의 폐해가 비중 있게 다뤄졌던 것을 떠올리면, 가짜 돈의 역사는 곧 돈의 역사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동전에 견줘 내재가치가 훨씬 작은 지폐가 돈의 주류를 이루면서 위조의 욕망을 키워놓은데다 컬러 복사기를 비롯한 기기의 발달로 정교한 위폐를 만들기는 점점 쉬워지고 있다.
일본인 철수 때 인쇄판 빼돌리다
한국은행이 4월10일 내놓은 ‘1분기 중 위조지폐 발견 현황’은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올 1분기 중 한은 화폐 정사(整査·못쓰게 된 돈이나 가짜 돈을 가려내는 일) 과정에서 찾아내거나 금융기관 또는 일반 국민이 발견해 한은에 신고한 위폐는 모두 3153장으로 지난해 1분기(744장)보다 4배 이상 많았다. 발견된 위폐가 2002년 3016장, 2003년 3896장, 2004년 4353장 등으로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다. 가짜 돈의 뿌리는 돈이 탄생한 아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우리나라에서 파장이 가장 컸던 ‘가짜 돈 사건’은 해방공간에서 벌어졌다. 지금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거의 잊혀진 ‘정판사 사건’이 그것. 한은이 지난해 말 펴낸 책자 <일제시대 및 해방 이후 한국의 화폐>에 이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개요는 이렇다.
지카자와(近澤) 인쇄소에서 평판과장으로 근무하던 김창선은 일본인들이 1945년 9월 상순에 철수하면서 은행권 종판(인쇄 원판) 관리가 소홀해진 틈을 타 ‘을’ 100원권 인쇄판을 훔쳐 보관하고 있다가 조선공산당 활동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1945년 10월 하순부터 1946년 2월 상순까지 6차에 걸쳐 약 1200만원의 위폐를 조선정판사(지카자와 인쇄소 후신)에서 인쇄·유포했다. 미군정청 공안부는 1946년 5월15일 수사 발표에서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권오직 사장과 이관술 당 재정부장이 활동비를 조달하고 남한 경제를 교란할 목적으로 조선정판사 박낙종 사장과 송언필 서무과장에게 위폐를 제작하도록 지령했다고 밝혔다. 조선공산당은 이를 전면 부인했지만, 미군정청은 조선정판사 폐쇄와 <해방일보> 무기정간이란 초강경책으로 조선공산당에 치명상을 안긴다. 이는 조선공산당이 반미 공세를 취하고 전평(전국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 그해 10월로 예정된 총파업을 9월로 앞당기는 등 정치·사회적 파문으로 이어졌다.
한은에 따르면 해방 직후에는 이 밖에 100원권의 위폐 30여종이 시중에 떠돌아 은행에서조차 100원권을 받지 않으려 할 정도로 위폐 문제가 심각했다. 이는 은행권의 지질이 나빴을 뿐 아니라 인쇄가 선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엔 이런 일도 있었다. 북한군이 1950년 6월28일 한은 본점 건물을 접수할 때 탈취한 미발행은행권(중앙은행 금고에 보관된 상태의 돈)을 사용했던 것. 남한경제 교란을 목적으로 했던 것으로 전해진 이 사태 또한 넓은 의미에서 위폐 사건으로 분류된다.
정치·사회적 혼란기에 벌어진 이런 일들을 빼고는 기록으로 남을 만한 대형 위폐 사건이 별로 없는 잠잠한 상태가 이어지다가 변화의 흐름이 나타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다. 우리나라는 1986년 이후 경상수지가 만성적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되고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어가는 등 괄목할 성과를 거뒀다. 이는 서방 선진국들의 시장 개방 압력을 불러일으켰으며 1988년 2월19일 산업정책심의회의 의결을 거쳐 수입제한품목 133개 가운데 2개만 빼고 수입을 자유화하기에 이른다.
수입개방 품목에 컬러 복사기가…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수입개방 품목에 컬러 복사기가 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컬러 복사기가 대거 수입될 경우 위폐가 증가될 것이란 걱정 어린 목소리가 한국은행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제기됐다. 정교한 위폐의 등장은 실제로 이때부터였다는 분석이 많다.
“컬러 복사기가 많이 보급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인데, 그 이전에는 위폐라고 해봐야 흑백으로 복사해 파스텔로 칠하는 조잡한 수준이었다. 컬러 복사기, 컴퓨터, 스캐너가 널리 보급되면서 점점 정교한 위폐가 나오고 이제는 잉크젯 프린터로 인쇄한 진짜 같은 가짜 돈이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한국조폐공사 위조방지센터 유일영 연구원)
위·변조 방지 장치를 보강한 새로운 은행권이 1990년대 들어 발행된 것은 이런 분위기의 반영이다. 한은이 1994년 1월부터 새로 발행한 ‘라’ 1만원권은 이전의 ‘다’ 1만원권과 달리 부분노출 은선, 광간섭 무늬 등 4가지 위·변조 장치를 뒀다. 부분노출 은선은 ‘만’ 자와 ‘원’ 자 사이에 세로 방향으로 삽입된 은색 선으로 복사 때 노출된 부분이 검게 변하도록 돼 있다. 광간섭 무늬는 앞면 왼쪽 숨은 그림 부분에 인쇄된 지문 모양의 가는 선으로 복사 때 선풍기 날개 모양의 색 변화와 물결 모양의 무늬가 나타나도록 한 위조 방지 장치다.
이런 ‘라’ 1만원권의 위·변조 장치도 컴퓨터 및 스캐너, 컬러 복사기를 동원한 위조에는 충분한 대응책이 되지 못하자 한은은 2000년 6월 새로운 ‘마’ 1만원권을 발행하기에 이른다. 화폐 앞면 아래에 한국은행 저작권(ⓒ한국은행 2000)을 표시하고 현금입출금기(ATM), 자동정사기 등 현금취급기기에서 위폐를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기계감응 장치를 넣은 게 이때부터였다.
이처럼 두번에 걸쳐 위조방지 장치를 넣은 1만원권을 발행하자 시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위조하기 쉬운 5천원권 위폐가 나돌기 시작했다. 5천원 위폐의 범람은 올해 들어 더욱 뚜렷했다. 올 1분기 중 발견된 1만원권 위폐는 619장으로 지난해 1분기보다 5.6% 늘어난 반면, 5천원 위폐는 2508장으로 지난해 같은 분기보다 18배가량 많았다. 한은이 2002년 6월 새로운 위조방지 장치를 보강한 ‘라’ 5천원권을 발행했지만, 1983년부터 발행한 ‘다’ 5천원권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이를 모델로 한 위폐가 출몰하고 있는 것이다. ‘라’ 5천원권에는 홀로그램 미세문자(BOK)를 인쇄한 부분노출 은선과 한국은행 저작권 표시가 있지만, ‘다’ 5천원권에는 이런 게 없다.
유럽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적은 물량
그래도 아직 우리나라의 위폐 유통 실태가 미국이나 유럽 나라들에 견줘선 그다지 심각하지 않다고 한다. 올 1분기 중 한은 자동 정사기에서 발견된 5천원권 위폐가 100만장당 47장꼴이었다. 시중에서 유통되는 5천원권이 1억8천장 정도임을 감안할 때 위폐는 8천여장, 액수로는 4천여만원에 이르는 셈이다. 2002년 이후 유럽연합(EU) 12개국의 유로화 위폐 물량이 한해 50만장에 이르고 있다는 것에 견줄 때 대단히 적은 수준이다.
위폐 물량이나 위조 기술의 수준으로 보아 가짜 돈이 조직적으로 제작되고 있다는 흔적도 아직은 없다는 게 한은의 판단이다. 한은 발권정책팀의 김태형 과장은 “범죄 조직에서 대규모로 만드는 게 아니고 아직은 개인들이 몇십장 만드는 수준”이라며 “이는 미 달러화나 유로화보다 액면이 낮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가짜 돈을 만들다가 걸리면 5년 이상 징역, 최고 사형을 당하는 것에 견줘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위조 자기앞수표나 외국에서 위조돼 국내로 들여온 위조 달러화가 대량 발견되는 일이 잦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화의 경우에도 10만원권 등 고액권이 발행되면, 위폐 문제가 지금보다 훨씬 심각해질 것이다. 5천원권, 1만원권 위폐가 중국 등에서 만들어져 들어오는 징후가 가끔 나타나는 것도 금융당국을 긴장시키는 요인이다. 경제성장과 기술발달에 맞춰 가짜 돈의 도발은 점점 거세질 게 뻔하다.
한국은행이 4월10일 내놓은 ‘1분기 중 위조지폐 발견 현황’은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올 1분기 중 한은 화폐 정사(整査·못쓰게 된 돈이나 가짜 돈을 가려내는 일) 과정에서 찾아내거나 금융기관 또는 일반 국민이 발견해 한은에 신고한 위폐는 모두 3153장으로 지난해 1분기(744장)보다 4배 이상 많았다. 발견된 위폐가 2002년 3016장, 2003년 3896장, 2004년 4353장 등으로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다. 가짜 돈의 뿌리는 돈이 탄생한 아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우리나라에서 파장이 가장 컸던 ‘가짜 돈 사건’은 해방공간에서 벌어졌다. 지금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거의 잊혀진 ‘정판사 사건’이 그것. 한은이 지난해 말 펴낸 책자 <일제시대 및 해방 이후 한국의 화폐>에 이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개요는 이렇다.

5천원권을 중심으로 위조지폐가 크게 늘고 있다. 한국은행 직원이 못쓰게 된 돈과 가짜 돈을 가려내는 모습. (사진/ 윤운식 기자)

1983년부터 발행된 '다' 5천원권의 위조 방지 장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