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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사기치는 이라크 화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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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2-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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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나오는 나랏돈 사두면 떼돈 번다” 유혹… 무역업체나 일반인들 조심!

(사진/외환은행이 보유중인 250디나르짜리 이라크화폐(위가 위폐,아래가 진폐).)
위조지폐 감정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외환은행 서태석 과장은 지난 12월6일 오전 40대 한 남자의 방문을 받았다. 이 남자는 이라크화폐 250디나르짜리 5장을 내밀면서 사용할 수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같은 날 오후에도 20대 후반의 남자가 찾아와 “사장님 지시로 찾아왔는데, 쓸 수 있는지 감정해달라”며 샘플로 갖고온 이라크화폐 1장을 내밀었다.

서태석 과장은 “미국과 전쟁중인 이라크의 화폐는 진·위폐 구별없이 휴짓조각이나 마찬가지로 아무런 쓸모가 없는데, 이상하게 하루에도 몇건씩 이라크화폐를 들고와 감정을 부탁하는 일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103억원치 밀반입하던 일당 구속


지난 8월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건설회사 사장이라고 밝힌 60대 남자와 40대 여자가 이라크화폐 400장을 들고와 감정을 요청했다. 서 과장은 그 자리에서 물론 쓸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려줬지만 나중에 들은 바, 40대 여자가 싼값에 이 남자에게서 이라크화폐를 넘겨받았던 것이었다. 당시 얼마에 이를 샀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지난 10월에는 위조 이라크화폐를 밀반입해 국내 사채시장에 유통시켜온 하아무개(31.부산시 해운대구 우1동)씨를 비롯한 일당 7명이 경기경찰청에 적발되기도 했다. 이들은 지난 5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요르단을 방문, 현지에서 여행사를 경영하는 동포 손아무개(38.여)씨로부터 250디나르짜리 위조 이라크화폐 1만1100장(277만5천디나르)을 1900달러를 주고 구입, 국내에 반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씨는 서울·경기지역 판매책 배아무개(33.대전시 대덕구 송촌동)씨 등에게 3900여만원을 받고 팔았으며 배씨 등은 이를 다시 사채업자들에게 돌리다가 경찰에 걸려들었다. 이들 일당은 현재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다. 하씨가 밀반입한 디나르화는 이라크 내 공식환율(1디나르당 3달러)로 환산할 경우 무려 103억원에 이르는 규모다.

이 사건과 관련해, 위폐감정을 맡았던 서태석 과장은 감정확인서에서 “중앙은행 발행 화폐는 뒷면 오른쪽 여백의 음영(독수리 머리모양과 부리)이 선명하게 보이나 의뢰한 화폐는 독수리 머리모양만 희미하게 보일 뿐 부리모양은 잘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 앞면 좌·우의 일련번호가 중앙은행 발행 화폐는 진하게 찍혀 있으나 의뢰한 화폐는 인쇄상태가 희미하다”고 덧붙였다. 이 위폐 역시 이라크 중앙은행 발행화폐와 같은 시기에 인쇄된 것으로 추정됐다. 이에 앞서 지난해 서울경찰청에서도 이라크화폐를 미끼로 사기를 친 일이 3건이나 적발됐다.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기사건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일까. 또 진폐조차 휴짓조각이나 다름없는 마당에 위폐가 만들어지는 이유는 뭘까.

국내에 나돌아다니는 이라크화폐는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라크 중앙은행이 95년을 전후해 대량으로 찍어낸 임시화폐, 이라크 현지에서 위조된 화폐, 홍콩 등 제3국에서 위조된 화폐 등이 그것이다.

공식기관으로는 유일하게 외환은행이 이 세 가지 부류의 이라크화폐를 모두 확보하고 있다. 진폐는 외환은행이 이라크 중앙은행에 전문을 보내 우편으로 전달받은 것으로 250디나르짜리 1장이다. 진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나 국가정보원에도 없어 경찰 수사과정에서도 외환은행 감정에 의지하고 있다. 이라크 현지에서 위조된 화폐는 외환은행이 현지에 진출해 있는 국내 한 종합상사에 부탁해 확보해놓았다. 또 제3국에서 위조된 것은 홍콩을 다녀온 고객한테서 얻어 보관하고 있다. 외환은행 등에 문의가 들어오는 건들 중에는 이처럼 각각 다른 유형이 섞여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 끝나면 예전 가치 회복한다?

(사진/위폐 감정중인 외환은행 서태석 과장)
사채시장을 중심으로 국내에서 나돌고 있는 이라크화폐 중에는 진폐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주로 1991년 걸프전 발발 이전 현지에 진출한 건설회사가 공사대금으로 받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또 이라크업체들과 무역거래에서 지불받은 것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 이전 이라크화폐는 1디나르에 3달러에 거래될 정도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경기경찰청에 적발된 사건의 경우, 요르단에서 위조된 화폐였다. 이라크화폐는 요르단 외에 홍콩, 중국, 일본 등 동남아 국가와 시리아, 아랍에미리트 등 중동국가에서도 광범위하게 위조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이라크화폐 위조행위가 유별나게 많은 이유는, 95년을 전후해 이라크 정부가 대량 발행한 화폐의 인쇄상태가 조잡하고 지질이 낮아 위조가 손쉽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라크 위조화폐가 사기로 활용될 만한 요소를 갖고 있다는 점도 있다.

모든 사기건이 그렇지만 이라크화폐를 매개로 한 사기도 수요자의 높은 기대심리를 고리로 삼고 있다. ‘이라크는 석유가 펑펑 나오는 나라 아니냐’, ‘미국과 이라크 사이의 전쟁만 끝나면 이라크화폐는 예전의 가치를 회복한다’, ‘지금 싼값에 이라크돈을 사두면 나중에 떼돈을 벌 수 있다’는 등의 달콤한 말로 유혹하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말이지만 높은 기대심리를 갖고 있는 이들은 쉽사리 빠져들게 된다.

디지털시대에 걸맞게 인터넷 사이버공간도 사기꾼들에게 적절하게 활용된다. 외국계 통신사 등 일부 인터넷사이트에 이라크 공식환율이 ‘1디나르=3달러’ 수준으로 게재돼 있는 것을 보여주며 마치 엄청난 가치가 있는 화폐인 양 속인다는 것이다.

공식환율로 따져 무려 15억원에 해당하는 이라크화폐를 단돈(?) 1억원에 넘기고 유유히 사라진 사기꾼이 있었는가 하면, 27만디나르로 2천만원의 빚을 갚고 외국으로 도망친 이도 있었다고 한다. 현재 외환은행 등에 문의해온 이들 중에는 피해자도 있지만 잠재적인 가해자도 상당수 섞여 있을 개연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103원 가치로 80만원대로 속여

(사진/외환은행 화폐전시실에 보관하고 있는 각국 진·위폐)
이라크화폐를 보유한 잠재적인 사기범들은 250디나르짜리의 가치를 85만∼95만원 정도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이라크전쟁 이전 공식환율로 책정한 가격이다. 물론 허무맹랑한 주장이다.

서태석 과장은 “이라크 안에서도 본국 통화의 유동가치가 크게 떨어져 달러와 섞어 병행 사용할 때만 거래되고 있는 실정”이라며 “현재 암달러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은 1디나르당 0.5원 수준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경기경찰청 문재동 경위는 “250디나르짜리를 80만원대를 호가한다고 유혹하나 어불성설”이라며 “이라크 현지 사정을 전해들은 결과 생수 1병에 750디나르인 것을 감안할 때 250디나르는 우리 돈으로 대략 130원 정도라고 보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이라크 현지에서 그것도 진폐일 경우의 가치다. 이라크 국경 바깥에선 아무런 가치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라크의 디나르는 외환은행에서도 고시하지 않고 있는 통화이며 국제시장에서도 거래수단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서태석 과장은 “이라크가 석유생산국인 점 등을 들어 지금도 이라크화폐를 싼값에 제시하며 유혹하는 일이 잦은 만큼 무역업체나 일반인들도 조심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위폐는 물론 진폐도 가치없어

국내에 나돌고 있는 이라크 돈은 모두 지폐이다. 이라크에서도 지폐만 찍는다. 최고액 권종이 250디나르짜리이며 100, 50, 25, 10, 5, 1디나르짜리가 있다. 동전이 없으며 대신 2분의 1, 4분의 1디나르짜리가 동전 구실을 한다.

250디나르짜리 권종 앞면에는 후세인 대통령의 초상화가 인쇄돼 있다. 뒷면에는 이라크의 역사적인 인물들과 건물, 그리고 오른쪽에 독수리 문양이 인쇄돼 있다. 미국과 전쟁중이던 95년에 대량 발행한 게 대부분 250디나르짜리였다고 한다.

걸프전 초기인 1991년 이전에는 1디나르에 3달러 정도로 거래됐다. 이라크가 여전히 미국과 긴장관계이기 때문에 위폐는 물론, 진폐도 전혀 가치가 없다. 일부 암달러시장에선 1디나르에 0.5원 정도에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라크 현지에서 거래되는 경우에도 달러 70%, 이라크 화폐 30% 정도의 비율로 섞였을 때만이 교환수단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김영배 기자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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