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시장 급랭 분위기 타고 대란설 모락모락… 일부에선 정부특혜 노린 음모설도 제기 
  벤처기업들이 몰려 있는 테헤란밸리의 공기가 요즘 싸늘하다. 제대로 수익기반을 갖추지 못한 벤처기업들이 곧 문을 닫는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진원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9월 위기설’, ‘10월 대란설’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아직은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이어진 벤처열풍에 힘입어 실탄(자금)에 여유가 있지만 2∼3개월 뒤면 바닥난다는 게 이런 벤처괴담의 근거이다. 또 벤처 투자열기가 사그라들기 시작한 지난 5월 이후에 새로 생긴 벤처기업들은 외부자금 조달통로가 꽉 막힌 게 사실이다. 한 벤처기업인은 “소문대로라면 ‘신경제의 첨병’이 곧 ‘신기루의 양성소’로 전락할 판”이라며 자조 섞인 우려를 표시했다. 
  인력시장에서도 냉랭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꿈을 안고 벤처사업에 뛰어들었던 대기업 출신 직원들이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U턴 현상’이 일부 업계에서 일고 있다. 흉흉한 위기설은 벤처에 있는 인력들에게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삼성그룹의 경우, 전자·물산·SDS 등 인력유출이 심했던 계열사들이 지금은 돌아오는 인력들 가운데 누구를 받아줄지, 경력은 어떻게 인정해줄지 고민하고 있을 정도이다. 
   
인력 ‘U턴 현상’… 바닥 헤매는 코스닥시장 
 
    
 더욱 구체적인 위기징후는 자금시장, 특히 지금까지 벤처육성이 엔진구실을 했던 코스닥시장에서 나타난다. 벤처기업 투자열기가 급속히 식은 것은 코스닥시장 진입의 어려움과 유통시장 침체에서 비롯됐다. 한때 300포인트를 넘보던 코스닥시장 지수가 5월부터 완전히 한풀 꺾여 지금은 110∼130을 맴돌고 있다. 주요 정보통신기업들의 주가가 전고점에 견줘 30∼40%선에 머물고 있다. 
  벤처기업인들은 코스닥위원회가 실적이 있는 기업, 이익이 나는 기업만 받아들이겠다고 한 게 시장 분위기를 급랭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주장한다.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올 상반기에 신규등록과 유·무상 증자 등으로 8조원 이상의 주식물량이 새로 공급된 반면 수요는 이에 못 미쳐 생긴, 수급불균형의 결과라고 분석한다. 게다가 7월 들어서는 세종하이테크 주가조작 파문에 이어 검찰의 100여개 기업 주가조작 수사방침 발표 등이 시장을 더욱 싸늘하게 만들었다. 
  유통시장의 침체는 그대로 발행시장으로 불똥이 튀어, 7월에 신규등록한 기업들의 공모가격이 애초 희망가격을 훨씬 밑돌기 시작했다. 7월25∼26일 일반공모를 실시한 페타시스는 애초 공모희망가격이 9천원이었으나 기관들을 상대로 수요예측을 실시한 결과 4천원으로 공모가격이 결정됐다. 코스닥등록을 위한 수요예측에서 벤처기업으로서 발행가격이 희망가격보다 밑돈 것은 페타시스가 처음이다. 이 회사는 컴퓨터·정보통신기기용 PCB(인쇄회로기판) 제조업체로, 부채비율 105.9%에 지난해 109억원의 순이익을 낸 알짜기업이라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페타시스에 이어 오리엔텍, 일렉트로닉스, 파워소스 등 7월에 신규등록한 다른 기업들도 수요예측 단계에서 기관들이 제시한 가중평균 단가가 모두 발행희망가를 밑돌거나 일부 종목은 주간사가 평가한 본질가치에도 못 미쳤다.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벤처기업들이 주식을 코스닥에 올려 자본이득을 챙기기는커녕 본전도 건지지 못할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최근 코스닥에 등록한 기업들은 “요즘 코스닥시장 침체는 단순한 거품제거가 아니라 기관투자가들의 후려치기의 결과”라며 아우성이다. 
   
섣부른 황금알 기대는 본전도 못 챙겨 
   
 벤처투자가들의 속타는 심정도 마찬가지이다. 코스닥 주가가 떨어져 지금 투자한 돈을 빼면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그렇다고 아직 수익창출이 본격화하지 않은 벤처기업에 배당금을 기대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투자자 처지에서 보면, 벤처기업이 ‘황금알’에서 ‘오리발’로 전락한 셈이다. 
  벤처기업에는 가장 비중이 큰 돈줄인 창업투자회사들은 투자자금 회수가 늦어지자 신규투자를 계속 줄여나가고 있다. 올 상반기 창투사들이 투자조합 결성을 통해 조달한 자금규모는 총 6942억원.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는 12배 늘었다. 그러나 벤처투자 열기가 식기 시작한 5월 이후에는 민간 투자조합 결성이 급격히 감소하는 추세이다. 창투사들이 결성한 투자조합은 지난 4월 23개에 1716억원에 이르렀다가 5월에 297억원(8개), 6월에는 236억원(5개)에 그쳤다. 더욱이 일부 창투사들은 자금위기에 미리 대비하려고 최근 2개월여 동안 코스닥 주식을 집중적으로 매도해 주가하락의 주범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지난 7월19일 오전 서울 강남구 역삼동 엘지 강남센터빌딩 대회의실에서는 터넷기업 최고경영자들과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이 만나 위기설의 원인을 진단하고 타개방안을 찾기 위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여기서 기조발제에 나선 이강인 YES24 대표는 “정부나 투자자들이 벤처기업의 창의력과 기술을 믿고 신중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당장 황금알을 챙기겠다는 자세로 접근하고 있다”며 좀더 장기적이고 비전을 갖춘 대응을 요구했다. 이날 토론에서 다른 벤처기업인들도 어렵게 만들어진 벤처산업의 생태계(벤처정신과 기술에다 금융이 적절하게 결합한 구조) 자체가 무너지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시장자율적 구조조정, 지금이 투자의 적기 
 
일부 벤처기업인과 벤처투자가들 사이에는 최근에 나도는 위기설을 음모로 보는 시각도 있다. 사실에 근거하기보다 막연하게 공포분위기를 확산시켜 벤처에 찬물을 끼얹으려하거나, 아니면 ‘무늬만 벤처’인 기업들이 정부로부터 특혜를 얻으내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부동산정보 제공업체인 텐커뮤니티의 정요한 사장은 “자체 핵심기술영역이 없이 마케팅비용을 펑펑 쏟아부어 입지를 굳혀온 인터넷기업들을 중심으로 자금조달에 애를 먹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테헤란밸리에서 문을 닫거나 인력이 대거 빠져나가는 기업은 아직 한 군데도 없다”며 “시장분위기가 냉랭해졌다기보다 냉정을 찾은 것”이라고 풀이했다. 인터넷 역경매업체인 예쓰월드의 이상길 이사도 “지난해 연말부터 냄비처럼 들끓은 벤처열풍의 후유증에서 벗어나려면 단지 ‘옥석 구분’ 정도가 아니라 ‘진위 가리기를 위한 서막’을 올려야 한다”면서 “손익분기점에 이르기도 전에 자금이 없어 사업을 접는 회사가 생기더라도 그대로 내버려둬야 한다”고 말했다. 즉 시장자율에 의한 구조조정이 필요하며, 이를 두고 호들갑을 떨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이다. 
  벤처산업은 말 그대로, 기업인이나 돈을 대는 투자가가 모두 모험을 해야만 하는 산업이다. 높은 성장과 수익(하이리턴)을 기대하려면 그만큼 위험(하이리스크)을 감수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 새턴창업투자의 김석한 사장은 “선진국에서도 보통 벤처캐피털이 투자한 10개 업체 가운데 1개만 살아남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문을 닫은 벤처기업이 거의 없을 정도로 비정상적”이라며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올해 초에 문을 연 소빅창업투자의 박현태 사장은 “불과 몇달 전까지만 해도 단순한 아이디어 하나로 이름만 인터넷회사라고 걸어놓더라도 투자순번을 타놓고 기다려야 할 지경이었다”며 “앞으로 2∼3개월이 오히려 정말 제대로 된 벤처기업에 투자할 수 있는 적기”라고 말했다. 
  박순빈 기자sbpark@hani.co.kr 
   

(사진/벤처기업은 정말로 위기인가. 지난 7월19일 인터넷기업 최고경영자들과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이 만났다)

(사진/신경제 첨병기지로 불리는 테헤란밸리가 흔들리고 있다)

(사진/코스닥등록기업들 합동 설명회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