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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노사가 선택한 ‘윈-윈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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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2-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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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경쟁력에 이바지한 미국의 종업원지주제도… 사양업종 되살리며 장기적 발전 촉진.

미국은 1974년 종업원주식소유제도의 하나인 ESOP(Employee Stock Ownership Plan)를 법제화했다. 빈부격차를 완화하고 종업원 복지를 향상시킨다는 것이 직접적인 목적이었다. 이 제도의 입법과 지속적인 개정을 주도했던 러셀 롱(Russell Long)은 당시 상원의원으로 민주당원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변호사이자 경제학자였던 루이스 켈소(Louis Kelso)였다.그는 당시 미국사회의 심각한 사회적 갈등요인이었던 빈부격차 심화와 소수 자본가로의 자본편중 심화현상을 개선하려면 새로운 대중자본주의 또는 주식대중화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이에 따라 종업원의 재산형성이라는 소극적인 차원에서 권장해오던 기존 종업원지주제도를 탈피해, 종업원들로 하여금 보다 적극적으로 자기회사 주식을 취득·보유할 수 있게 하는 방안으로 차입(leveraged)형 ESOP를 제안했다.

80년대 이후 구조조정 방법으로 활용

(사진/미국의 위어턴철강은 종업원 기업기수로 혹독한 위기를 극복했다. 최고경영자인 리처드 라이드러 회장이 회사 전경을 배경으로 작업복을 입고 당당하게 서 있다)
이 제도는 우선 임금 근로자들에게는 자사주를 매입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재정적 능력이 없다는 전제를 깔고 출발한다. 따라서 회사와 별개로 종업원신탁을 만들어, 이 신탁이 회사의 신용을 담보로 외부로부터 자금을 차입해 자사주를 매입하게 한다. 그 뒤 회사가 이익의 일부를 신탁에 출연해서 차입금을 갚도록 한다는 게 기본적인 차입형 ESOP의 작동구조이다.


이 제도의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은 74년이지만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이후였다. 70년대 중반에도 각종 세제 혜택을 이용해 이 제도를 도입하는 기업들이 증가했으나 80년대 이후 구조조정의 한 방법으로 이 제도가 이용되면서 광범위하게 활성화된 것이다.

먼저 미국에서는 사양길에 들어서는 업종으로부터 ESOP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80년대부터 미국의 철강산업은 후발국들인 한국과 일본 등의 격심한 추격경쟁을 경험하면서 적자와 잇단 도산에 직면하게 된다. 미국의 철강업체들은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분사나 직장폐쇄, 자회사 매각에 나섰다. 분사하는 과정에서 종업원들에게 매각할 경우, 많은 세제 혜택이 있었기 때문에 모회사는 ESOP를 이용하여 자회사를 종업원들에게 넘기는 경우가 많아졌다.

ESOP를 급속하게 확대시켰던 또다른 산업은 서비스업이다. 특히 항공산업은 80년대 후반부터 시장진입요건이 완화되면서 항공사 사이의 경쟁이 격렬해졌다. 이에 대한 각 항공사의 대응은 대량 해고였으나 노조활동이 활발했던 항공사들은 ESOP를 도입하여 인원정리 대신 임금상승률 완화와 경영혁신으로 대처하였고 그 결과는 놀랄 만한 것이었다. 종업원들은 현재의 임금상승률을 억제하는 대신에 미래의 소득인 주식을 소유하고 경영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기업들이 ESOP를 도입하는 목적은 이와 같은 구조조정 이외에도 다양하다. 노동조합이 경영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경영진과 협상하여 ESOP를 도입하는 경우가 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유나이티드항공사(UAL)였고 언론과 대중의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다음은 적대적 인수합병에 맞서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이 제도를 도입하는 경우도 있다. 우호적 지분을 확보함으로써 안정적인 경영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이전의 대주주가 다른 사업으로 진출하면서 주식을 현금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정부 세제혜택으로 금융기관 투·융자 확대

그러나 기업들의 이런 동기만으로 ESOP가 활성된 것은 아니다.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ESOP를 도입하고, ESOP를 도입한 기업에 대한 금융기관의 투·융자가 활발했던 것은 정부의 세제혜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차입 ESOP가 확대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회사와 종업원, 그리고 이러한 업체에 대출해주는 금융기관에게 정부가 과감한 세제혜택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종업원 지분이 30% 이상인 기업에 대출해주는 금융기관에 대해서 50%의 이자소득을 공제해 주었다. 차입 ESOP를 도입한 회사는 원리금 상환을 위한 출연금에 대해 손비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또한 ESOP 주식에 대한 배당금을 차입금 변제에 충당하는 경우 소득세를 공제해 주었다. 종업원들의 경우, 주식을 현금화할 때까지 소득세 부과를 유예해줌으로써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금융·세제상의 여러가지 혜택에 힘입어 오늘날 미국에서는 종업원지주제가 일반화되어 있다. 현재 약 1만여개 회사에서 미국의 전체 노동자의 10%에 이르는 1천만명의 종업원을 대상으로 ESOP를 실시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1500여개 기업은 종업원이 과반수 이상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 증권관리위원회(SEC)는 ESOP를 채택한 기업의 종업원들이 보유한 자사주의 총 평가액이 99년말 현재 약 1500억달러에 이르며, ESOP 이외의 다른 형식을 통한 종업원지주제까지 포함하면 종업원 주주의 자산규모는 이 보다 훨씬 클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의 노조들은 처음에 종업원소유제도를 노동자의 고혈을 쥐어짜는 고도의 경영전략으로 인식해 ESOP 도입에 소극적이거나 반대했다. 그러나 구조조정으로 대량실업의 위기에 직면하면서 전미철강노조(USWA)와 항공산업의 노조들은 ESOP 도입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실업을 예방하고 경영에 참가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종업원소유제도가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긍정적인 요소가 많았기 때문이다. 경제적 성과는 물론 노사관계도 향상되었다는 연구결과들이 이를 뒷받침하였다. 전미종업원소유센터(NCEO)에 따르면, 종업원소유기업이 전통적인 기업과 비교하여 영업이익, 배당률, 주가 등에서 60% 이상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또한 일반적인 차입경영에 의존하는 기업들은 30%의 도산율을 보였으나 차입형 ESOP를 채택한 기업의 도산율은 10% 정도로 낮은 수준을 보였다. 미국 회계감사원(GAO)은 종업원들의 소유비율이 높을수록 경제적 성과가 우수하며, 특히 종업원의 경영참가 프로그램을 동시에 도입하고 있는 기업일수록 경제적 성과가 우수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ESOP 기업의 생산성 향상 주목해야

(사진/어느 나라나 경제 시련기에는 고용조정을 최소화하면서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 미국 뉴욕증시의 시장 중개인이 주가가 폭락하자 익살스럽게 “이젠 죽었구나”라는 표정을 짓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는 종업원 인수기업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투자를 하는 금융기관들도 있다. 뉴욕증시에서는 종업원지분율이 일정 수준을 넘는 기업들의 주식만 골라 별도 지수화시킨 투자상품도 있다. 그만큼 투자성과가 일반기업보다 크다는 반증이다. 거꾸로 보면, 대주주의 지분비중이 높지 않고 종업원들에게 주식분산이 잘된 기업으로서는 자금조달이 훨씬 수월한 셈이다. 영국에서도 미국과 비슷한 결과가 발표되었다. 영국의 한 조사회사가 ESOP 기업의 90%를 연구한 결과, ESOP 제조업이 전통적인 제조업보다 생산성에 있어서 50% 정도 높았고 1인당 판매증가율도 전통적인 기업의 1.7%보다 높은 3.7%를 기록했다고 보고했다. 그에 의하면, 비제조업 ESOP 기업도 전통적인 기업들보다 47.8% 높은 생산성을 기록했다.

미국의 두 기업 사례를 통해서도 이런 사실들은 확인된다. 위어턴철강회사는 84년 차입 ESOP를 도입하여 분사되기 전까지 내셔널철강(National Steel)의 자회사였다. 분사과정에서 종업원인수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ESOP의 세제혜택과 이전의 노사관계가 좋았다는 점이다. 내셔널철강이 위어턴을 분사하기로 한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신흥공업국들과 중소 철강업체들의 경쟁이 격렬해졌다는 점이고, 둘째는 위어턴의 임금상승률이 미국 철강산업의 평균 상승률보다 높았다는 점이다.

줄 건 주고, 얻을 건 얻으며 회사 살려

위어턴은 분사 이후에 여러 가지 경영실적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위어턴은 종업원 인수 이후에 지속적으로 이윤을 내다가 90년대 초 경기침체와 대규모 신규투자로 적자를 기록했지만 94년부터는 다시 흑자로 돌아섰다. 고용규모도 비슷한 추세를 따랐다. 위어턴의 노조는 종업원의 100% 주식인수를 통해 고용을 유지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경영에 참가할 수 있는 토대도 마련했다. 이사회는 경영진과 노조에서 각각 선출한 동수의 이사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주식상장과 사업부문 매각, 합병 및 인수와 같은 주요 경영사안에 대해서는 1인 1표의 원칙 아래 종업원들의 투표에 의해 결정하도록 했다. 주식은 임금률에 따라 분배하고 인수 이후의 누적흑자가 1억달러를 초과하면 세전이윤의 33%를 현금분배하고, 2억5천만달러를 초과하면 50%를 지급한다는 조항도 두었다.

90년대 초 미국의 전반적인 경기침체는 항공산업에 있어서도 하나의 시련이었다. 걸프전으로 인한 유가상승과 과잉경쟁으로 대부분의 항공사들이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다. 당시의 항공사 경영진들은 호텔업과 자동차대여업 등 사업다각화로 돌파구를 모색했는데, 유나이티드항공의 조종사노조는 본래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회사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유나이티드의 조종사노조는 87년부터 ESOP를 통한 종업원인수를 시도하였으나 성공한 것은 94년 7월이었다. 조종사노조와 기계공노조의 주도로 이루어진 경영진과의 협상에서 종업원들은 55%의 지분을 차지했다. 또 6년동안 고용유지를 보장받았다. 기업지배구조도 바꾸었다. 12명으로 구성된 이사회에서 종업원들이 3명을 선임할 수 있도록 했고, 이 3명의 종업원 대표이사는 항공산업 이외의 대규모 투자나 2억달러 이상의 자산매각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지분취득과 경영참가의 대가로 노조가 회사에 제공한 양보도 많았다. 6년동안 93년 이전 임금보다 8.2∼15.7% 삭감된 선에서 임금을 동결하고, 경영정상화가 달성될 때까지 파업을 하지않기로 약속했다.유나이티드의 종업원 기업인수 뒤 성과는 인수자체의 관심만큼이나 놀라운 것이었다. 이전 3년간의 적자에서 94년부터 곧바로 흑자로 돌아섰다. 뿐만 아니라 고용수준도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이것은 델타항공 등 경쟁사들의 고용수준과 비교해볼 때, 더욱 대조적이다. 무엇보다 종업원 기업인수로 유나이티드항공 노조쪽은 임금조건을 양보하는 대신 고용안정과 최고의사결정기구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그리고 94년 이후 3년동안 종업원주주들이 연평균 8%씩의 배당이익을 얻어 임금삭감을 충분히 상쇄할 수 있었다. 회사의 주인으로서 종업원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따라 얻은 경영성과를 되돌려 받은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다시 경기침체의 터널로 접어들고 있다. 이것이 세계 경기침체와 맞물려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IMF 구제금융 이후에 그동안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도 한 요인이다. 구조조정이 왜 제대로 되지 않았을까?

그동안 구조조정 방식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자산을 헐값에 외국에 팔아넘김으로써 국부가 외부로 유출되는 경우가 많았고, 회사가 종업원들과 협의없이 일방적으로 구조조정을 진행함으로써 많은 노사대립의 상황을 초래했다. 인원감축 위주로 짜인 구조조정에서 중·장기적인 기업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좀더 근본적인 구조조정이 이루어지지 않고서 몇%의 인건비 감소로 회사가 회생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상황을 너무 낙관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미국의 사례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경제적 성과를 향상시키고 고용을 안정시키며 회사의 장기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 구조조정의 한 방법을 차입 ESOP가 제시하고 있다.

우리 실정에 맞게 차입형 ESOP 도입

(사진/미국의 유나이티드항공 노조는 94년 기업인수뒤 이전 3년간의 적자를 곧바로 흑자로 만들었다.유나이티드항공의 여객기)
이러한 차입 ESOP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과감한 세제지원이 필요하며, 경영진과 노동자들의 협상이 전제되어야 한다. 더군다나 이러한 ‘윈-윈 게임’을 위해서는 상호 신뢰와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제반 조처들이 뒤따라야 한다. 경영진은 경영투명성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신뢰감을 주고, 인원삭감 대신에 임금상승 완화 내지 동결을 선택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임금상승 요구 대신 주식을 선택하고, 회사의 회생을 위해 적극 노력함으로써 나중에 보상받아야 한다.

대우자동차의 부도는 노사간의 신뢰만 구축되었다면 피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뢰를 구축할 수 있을 만한 조처들이 없었다. 대량 해고를 받아들일 노조도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우리사주제도 관련 정책에서 정부가 좌충우돌하지 않았다면 대우차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김대중 대통령이 종업원지주제의 개선과 발전을 여러 차례 천명해왔지만, 재경부와 노동부 등 관계부처의 이견으로 기형적인 우리사주제도가 아직까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차입형 ESOP 방식을 우리 실정에 맞게 도입해 좀더 공정하고 합리적인 구조조정의 한 수단으로 활용했으면 한다.


박노근/ 노동자기업인수지원센터 연구원miral@eb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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