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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노동자가 경영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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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2-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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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적 복지 위한 종업원지주제 시행방안 마련… 우리사주제 획기적 개선 통해 공정한 분배에 기여

‘종업원지주제도 확산을 통한 근로자들의 경영참가 확대’.

김대중 대통령이 3년 전에 내건 선거공약 가운데 하나이다. 이 공약의 실현가능성이 이제야 열렸다. 정부 부처간 이견으로 질질 끌어오던 새로운 종업원지주제 시행방안이 마련된 것이다. 노동부가 입안하고, 민주당 신기남 의원을 비롯한 108명의 의원들이 공동발의한 ‘근로복지기본법안’(이하 근복법)이 바로 그것이다. 이 법안에는 현행 우리사주제도를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게 하는 장치들이 들어 있다.

노동자를 주인으로 하는 근로복지기본법안


근복법은 기존의 근로자복지 진흥 및 고용안정 지원에 관한 법령들을 ‘생산적 복지’의 관점에서 새롭게 통합·정비한 법이다. 지금까지 증권거래법에 따라 운영되던 우리사주제의 시행근거 또한 이번에 근복법에 흡수됐다. 우리사주제의 본래 취지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이다.

지금까지 우리사주제는 본래 제도 도입의 취지에서 크게 축소돼 단지 근로자들의 재산증식 수단, 이를 통한 노사갈등 완화 수단으로만 취급되어 왔다. 노동자의 경영참여나 기업경영성과의 공정한 배분을 촉진한다는 또다른 중요한 취지는 전혀 살리지 못했다. 기업은 물론이고 노동계에서도 ‘우리사주제는 회사 주식을 싼값에 받아서 한몫 챙길 수 있는 재테크의 하나’쯤으로만 봐왔다. 그나마 근로자들의 재산증식에도 기여하지 못했다. 우리 증시의 부침이 워낙 심한 탓이다. 요즘처럼 주식시장이 침체에 빠져 있을 때에는 회사 돈을 빌려 투자한 우리사주가 ‘노비문서’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근복법이 시행되면 우리사주제는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무엇보다 우리사주조합의 주식매입자금을 근로자의 주머니에서만 조달하는 게 아니라 기업이나 기업주의 출연금으로 확대할 수 있게 했다는 게 눈에 띈다. 또 상장기업(코스닥 등록법인 포함)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법률적 근거가 없던 비상장기업에 대한 우리사주제도 시행근거를 명확히 하고 이를 활성화하기 위한 지원근거가 마련됐다. 비상장기업도 증자를 할 때 상장기업과 마찬가지로 우리사주조합에 20%를 우선배정하고, 주식양도에 따른 세제상의 혜택도 똑같이 적용된다. 또 비상장기업의 조합원이 회사를 떠나 주식을 인출할 때 환금성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기업에 준비금을 의무적으로 적립하게 하고 필요할 경우에는 정부가 재정으로 지원할 수 있게 하는 근거도 마련했다.

근복법은 우리사주조합의 자사주 취득 및 배정과 관련한 조항(33조)에서 ‘우리사주조합은 사업주·대주주의 자사주 출연과 주식시장의 매입 등에 의하여 자사주를 취득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는 종업원들의 공동노력의 결과로 발생하는 기업이윤의 일정부분은 회사주식의 무상분배라는 형태로 돌려준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다. 또 35조에서는 △사업주나 대주주 등의 금품출연 △우리사주조합원이 납부한 조합비와 출자금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차입금으로 회사 내에 우리사주조합기금을 조성해 자사주를 취득하도록 했다. 즉 우리사주 취득을 위한 자금조달 통로를 다양화한 것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우리사주제도 활성화의 핵심 전제조건은 근로자가 취득한 자사주를 장기간 의무보유하도록 해 전체적으로 기업의 우리사주조합 지분율을 높이는 것”이라며 “그러나 지금처럼 우리사주 취득을 근로자의 자기계산에만 의존할 경우 장기보유를 도저히 유도할 수 없다”고 말했다.

기업이윤 분배로 우리사주제 날개 달아

(사진/근로복지기본법은 노사의 합의에 바탕해 사회적 연대감을 심어줄 것인가.사진은 노사정위원회 회의 모습)
실제로 증권거래법에 규정된 우리사주의무보유 기간은 재산권 침해소지가 있어 지난해 8월 10년에서 7년으로, 또 올해 1월부터는 7년에서 1년으로 단축됐다. 이 결과 올 들어 시세차익을 노린 우리사주 매도물량이 급증하는 추세이다. 우리사주 예탁기관인 증권금융에 따르면, 올해 연말까지 우리사주 매도물량이 약 7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사주가 주식시장의 안전판 구실을 하기는커녕 투기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태에서 비상장기업으로 대상기업을 확대해봤자 우리사주제도가 활성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복법에 따라 회사의 우리사주조합 출연이나 금융기관 차입금으로 우리사주 취득재원을 마련하게 되면 조합원들에게 퇴직하기 전까지는 주식인출권을 제한할 수 있는 명분을 갖출 수 있다. 종업원들에게 직접적인 현금부담을 지우지 않는 대신에 장기보유를 충분히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금융기관 차입에 의한 우리사주 취득의 활성화는 기업의 재무구조 개선과 함께, 소유구조 분산을 통한 경제민주화를 촉진할 것으로 기대된다. 경기대 신범철 교수(경제학과)는 “우리사주제도가 미국과 같은 차입형 종업원지주제로 발전한다면 전체 기업들의 증자를 원활하게 해 현금흐름상의 문제를 쉽게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용경색 때문에 건전한 중소기업이 도산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의 종업원지주제는 금융기관 차입에 의한 ‘종업원주식소유제도’(ESOP:Employee Stock Ownership Plan)가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경기침체나 극심한 신용경색기에 기업들이 효과적인 구조조정 수단으로 활용해왔다. 차입형 ESOP란, 회사 또는 우리사주조합의 신용을 바탕으로 금융기관에서 자금을 빌려 자사주를 취득한 뒤 회사는 차입금에 대해 매년 일정한 자금을 조합에 출연하고, 조합은 회사 출연금이 들어올 때마다 차입금을 조금씩 상환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정부는 근복법을 통해 이런 차입형 종업원지주제가 활성활될 수 있도록, 지금까지 법적 지위가 모호했던 우리사주조합에 대해 ‘민법상 사단법인’에 준하는 기준을 부여했다. 이렇게 하면 우리사주조합이 회사와는 별도로 금융거래를 쉽게 할 수 있고, 종업원들의 소유·경영참가 활동에 필요한 법적 권한도 지금보다 훨씬 강력하게 행사할 수 있다.

종업원 권한 강화할 구체적 방안 부실

(사진/노조도 회사경영 상태를 제대로 알아야 주인의식을 갖고 생산성 향상에 기여한다.지난 3월 현대중공업 주주총회에 참석한 한 노동자가 회사경영방식에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
그러나 근복법을 활용한 종업원지주제의 개선에는 아직까지 많은 보완과제가 남아 있다. 지금 만들어진 근복법 안에는 ‘…에 대해 세제·금융상의 지원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아주 막연한 근거만 들어 있다. 노동연구원의 노용진 박사는 “이제 겨우 제대로 된 종업원지주제의 틀을 갖춘 수준”이라며 “앞으로 이 법에 기초해 여러 가지 세제·금융상의 유인장치를 마련함으로써 기업과 종업원들에게 활용해야겠다는 필요성을 스스로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령 회사나 대주주의 우리사주조합 출연금에 대해서는 소득공제 혜택을 줘야 출연동기를 유발할 수 있으며, 금융기관에도 대출운용수익을 세금부과 대상에서 빼줘야 좀더 적극적으로 우리사주 대출에 나설 수 있다. 이에 대해 노동부 관계자는 “내년 7월1일부터 근복법이 시행될 예정이므로 구체적인 활성화방안은 시행령에 담고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세법 등 관련 법령들도 정비해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우리사주조합을 조합원들의 의사에 따라 민주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이다. 우리사주조합을 근로자의 복지증진과 경영참가 수단으로 활용하려면 우선 우리사주조합자체가 민주적으로 운영돼야 하는 게 기본 전제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사주제를 채택한 대부분 기업들은 조합의 대표를 경영진이 일방적으로 선임해 조합운영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해왔다. 조합원들이 투표로 직접 선출한 기업은 데이콤, 현대자동차, 대림산업, LG투자증권 등 겨우 한손으로 꼽을 수 있는 정도이다. 나머지는 자금부나 인사·총무부의 간부가 우리사주 대표를 맡고 있다. 종업원들이 회사 경영에 참가할 수 있는 통로를 회사쪽에서 미리 점거한 꼴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사주조합 지분의 의결권도 경영진 입맛대로 행사한다. 종업원들의 피땀으로 모은 우리사주 지분이 대주주의 경영전횡과 경영권 방어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노동부는 이번에 근복법을 제정하면서 우리사주조합의 운영기준을 어기는 기업에 대한 시정명령권과 과태료 부과 근거를 마련하려고 했으나 재경부의 반발로 보류됐다. 지난해 8월에도 우리사주조합 운영기준을 개정해 ‘조합대표는 조합원들의 직접·비밀·무기명 투표에 의해 선출한다’고 못박았으나 이를 어길 경우 제재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지 않아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민주노동당 송태경 정책위원은 “정부는 지금까지 우리사주조합의 비민주적 운영에 대한 실태를 잘 알고 있었고 노사정위원회에서 몇 차례나 개선을 요구했는데도 적극적인 개선의지를 보여주기는커녕 오히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비민주적 조합운영을 조장·방치한 측면까지 있다”고 비난했다.

우리사주조합 대표도 노동자의 손으로…

노동계는 우리사주제도의 활용의지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생존의 기반인 회사가 어느 날 갑자기 경영진의 잘못으로 퇴출위기에 몰리는 지경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에 수반되는 모든 희생과 노력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기 이전에 노동자들에게 부실경영을 사전에 감시·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줘야 한다는 게 노동계의 목소리이다.

“지난 5월 회사가 워크아웃을 신청하기 몇달 전에 직원들에게 우리사주조합을 통한 유상증자를 거의 강요하다시피 했습니다. 직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모아 시장에서 액면가격을 밑도는 회사 주식을 액면가격에 배정받았습니다. 이 결과 우리사주조합 지분율이 13.9%까지 높아져 대주주 일가의 전체 지분율보다 5배나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직원들에게 장밋빛 전망을 늘어놓으며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던 경영진들이 갑자기 워크아웃을 신청하는 바람에 우리사주는 감자를 당하고 주가는 크게 떨어져 지금 직원들이 평균 연봉수준에 해당하는 약 2천만원씩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지난 7월에 노조를 결성한 새한미디어의 이육일 노조 사무국장 이야기이다. 새한미디어는 9월에 인사팀장이 맡고 있던 우리사주조합 대표도 조합원 직선에 의해 노조에서 장악했다. 이 사무국장은 “우리사주조합을 통해 회사경영 정보와 주요 의사결정을 노사가 함께 공유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경영정상화에 대한 공감대도 쉽게 만들 수 있다”며 회사에서 위기상황에 맞닥뜨린 뒤에야 이렇게 태도를 바꾼 데 대해 크게 아쉬워했다.

다른 기업에서도 우리사주제도를 통한 노동자들의 경영참여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내년 주총에서는 노조에서 우리사주조합 지분을 활용해 사외이사를 추천할 계획이다. 노조도 회사경영을 제대로 알아야 주인의식을 가지고 당당하게 일할 수 있고 회사쪽과 소모적인 갈등도 피할 것 아니냐. 정말 회사가 어렵다는 게 확인이 되면 노조가 구조조정에 앞장선다. 꼭 경영을 하겠다기보다 회사의 어려움을 초래하는 무리한 투자나 부실경영을 막아보겠다는 것이다.”(영창악기의 이상우 노조위원장)

“3년 전부터 단체협상을 할 때마다 회사 재무제표와 경영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협상테이블에 나서고 있다. 근로조건 개선이나 임금인상도 중요하지만 회사의 주인으로서 권익을 제대로 챙겨야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경제민주화와 사회민주화의 책임을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에만 맡기지 않고 우리처럼 노동자이자 종업원주주들이 적극 떠맡아야 한다.”(대림산업 김은필 노조수석부위원장 겸 우리사주조합장)

사회적 연대감 심어주고 기업 경쟁력 확보

(사진/근로복지기본법안은 기업경영성과의 공정한 배분을 촉진할 전망이다.데이콤과 참여연대가 기업투명성·기업지배구조 개선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9월 말 현재 우리사주조합을 결성한 701개 상장기업에서 우리사주조합의 평균 지분율은 2.6%이다. 30대 재벌 총수일가의 실제 평균지분율(1.5%)보다 훨씬 높다. 또 이 정도 지분이면 현재 상법과 증권거래법에 규정되어 있는 소수주주권을 대부분 행사할 수 있다. 기업의 바깥에 있는 불특정다수 소액주주들은 결국 주식가치 극대화를 목표를 두고 권익찾기운동을 펼 수밖에 없는 반면에, 해당기업의 노동자는 경영참가활동은 기업의 안정적인 존립과 생산성 향상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우리사주조합은 기업경영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내부 종업원들로 구성되어 있고, 기업경영을 적극적으로 감시하고자 하는 동기가 소액주주들보다 더 강하다. 전문경영인으로부터 말단직원에 이르기까지 종업원들이 기업의 실질적인 주인으로서 소유하고, 민주적인 경영을 해 생산의 성과를 고르게 분배하는 구조가 바로 종업원지주제의 목표이다.

경기대 신범철 교수는 “종업원지주제를 활용해 기업경영의 성과를 고르게 배분하면 노동자들에게 구조조정의 주체로 나설 수 있게 하고 강한 사회적 연대감을 심어줄 수 있다”며 “앞으로 근복법의 시행령과 하위규정을 만들 때 노동계의 의견을 적극 수렴해 실효성이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으로서도 새로운 종업원지주제를 활용하면 당장 재무구조가 좋아지는 효과말고도, 임금의 유연성과 노사평화, 종업원들의 자발적인 생산성 향상 노력 등으로 충분한 대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마다할 이유가 없다.

박순빈 기자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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