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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무차별 개방은 파국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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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2-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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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좌파지식인 필립 골뤼브 교수가 진단하는 한국경제 구조조정의 명암

전세계를 압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물결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고 있는 유럽의 한 좌파지식인이 한국을 찾았다. 프랑스의 진보언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파리 8대학에서 국제관계와 국제경제를 가르치고 있는 필립 골뤼브 교수가 바로 그다. 골뤼브 교수는 지난 11월30일부터 12월1일까지 대구 경북대학에서 ‘세계화, 축복인가 재앙인가?’를 주제로 열린 2000대구라운드에 기조연설자로 초청됐다.

그는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곧 종말을 맞는다”며 “전세계적으로 부의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국제금융거래질서를 어지럽히는 투기자본의 이동에 대해서는 모든 국가가 외환거래세(토빈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토빈세 도입을 주창하는 국제시민단체인 ‘ATTAC’(시민원조에 필요한 금융거래과세 도입을 위한 연합)의 고문으로 참여해 왕성한 활동을 펴고 있다. 대구라운드에 참석하기 하루 전인 11월29일 오후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골뤼브 교수를 만났다.

외환유동성 확보해도 심각한 위험 도사려


-요즘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 각국의 금융시장이 심상치 않다. 미국경제의 경착륙 조짐까지 보이면서 전세계적으로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이런 흐름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지난 20여년 동안 미국 주도로 진행된 자본의 세계화가 빚은 체제적 위험(System Risk)의 하나이다. 지난 82년 남미 외환위기, 87년 전세계 증시 대폭락, 94년 멕시코 페소화 폭락, 그리고 97∼98년 아시아 금융위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계기는 다르지만 사태의 뿌리는 다 같다. 외환이동의 자유화와 자본시장에 대한 규제 철폐의 결과이다. 무조건 효율성과 이익만 좇은 투기자본의 이동을 적절하게 통제하지 않는 한 위기는 언제든지 올 수 있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가 위기의 세계화와 만성화를 초래했다.

-그렇지만 한번 위기를 겪은 나라들은 나름대로 대비책을 세워놓지 않았나. 한국에서도 지난 2년여 동안 열심히 구조조정을 해서 외환위기는 어느 정도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을 포함해 외환위기를 겪은 나라들은 외환유동성을 넉넉하게 확보하면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오판이다. 세계금융자본의 구조적 몰락위기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은 지난 2년여 동안 IMF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해 체제적 위기에 더욱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다.

-한국의 구조조정 방향이 잘못됐거나 실패했다는 얘기인가.

=구제금융을 받은 아시아 국가들의 구조조정 방향은 민간채무를 국유화하고, 외국자본 투자에 활짝 문을 열고,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그런데 구조조정에 따르는 비용은 대량실업과 임금삭감 형태로 주로 노동자들이 지고 있다. 타이의 경우 지난 2년 동안 실질임금이 30%나 줄었고, 인도네시아도 절대 빈곤층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한국 또한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노동자들이 손에 쥐는 실질임금은 크게 줄었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동양적 가족관계를 통해 유지하던 사회안전망도 거의 무너졌다. 이에 비해 한국 부실기업의 무분별한 투자에 돈을 빌려준 외국 투자기관이 망했다는 얘기는 아직 못 들어봤다. 누가 위기를 초래했나?

-좀더 구체적으로, 지금 추진하고 있는 구조조정 작업의 어떤 부분에 문제가 있는지 지적해 달라.

=우선 자본시장 개방과 외환거래 자유화 속도가 너무 빠르다. 한국경제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섣부른 자본의 세계화는 새로운 형태의 체제적 위험에 빠져들게 한다. 또 시장논리로만 접근하는 공기업 민영화도 심각한 후유증을 초래할 수 있다. 보건, 교육, 교통, 통신과 같은 공공서비스 분야를 민간에 맡기는 것은 국가의 기본적 책임을 저버리는 것이다.

투기자본의 힘 아닌 사회적 합의에 따라

(사진/“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전세계적으로 부의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지난 11월29일 열린 골뤼브교수 초청강연회 모습)
-한국이 IMF 구제금융사태를 맞은 것은 외부요인보다 내부요인이 더 컸다는 게 국내외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진단이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한국경제의 고질적인 내부문제를 개혁시키는 효과도 있다고 보지 않는지….

=원인이 다른 만큼 개혁방안도 따로따로 찾아야 한다. 정경유착에 의한 국가권력의 부패나 재벌의 비효율적 경영 같은 것을 왜 국제투기자본의 힘을 빌려 개혁하려고 하나? 오히려 한국경제의 내부문제는 철저하게 노-사-정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풀어가야 한다. 지금은 국제투기자본의 사회파괴적 위험과 한국경제 내부의 위험이 시너지효과를 발휘해 더욱 폭발력을 갖게 만들고 있다.

-이미 한국은 주요 상장기업의 외국인 지분이 최대비중을 차지하고, 앞으로 새로운 성장재원을 얻는 데도 외국자본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어느 나라든 외국자본과 문을 닫고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폐쇄경제로 가야 한다는 게 아니다. 경제주권을 지키면서 개방의 폭과 대상을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외국자본을 유치하더라도 한국에서 뿌리를 내릴 자세가 되어 있고, 이익이 생기면 시설투자를 확대하고 일자리도 더 많이 만들 수 있는 자본이면 적극 환영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한국기업을 헐값에 사 인력을 대폭 줄인 다음 다른 외국자본에 되팔아 단기간에 이익을 챙기겠다는 자세로 접근하는 투기꾼들은 통제해야 한다. 불가피하게 한국기업을 해외매각할 때 고용유지와 같은 조건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신자유주의의 근본적인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나.

=시장에 자유주의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도대체 시장이 뭔가. 한마디로 소수의 돈 있는 사람이 다른 불특정 다수와의 경쟁에서 이겨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하는 곳이다. 완전 자유시장경제로 한다면 돈 있는 사람들이 노예도 부릴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게 말이 되는가.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을 자유방임상태로 내버려두면 자율적인 규율이 작동해 최적의 성과를 만들어내고 정치·사회적으로도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선전한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구조조정에 따른 고통을 일방적으로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전가하고, 한 나라 안에서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부의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한마디로 ‘좋은 시절에는 이익을 개인화하고 위기가 발생했을 때는 그 비용을 사회화시키는’ 게 신자유주의 모델이다.

시장은 민주와 정의의 관점에서 통제해야

-하지만 유럽식 혼합경제 모델이 이미 미국식 경제모델에 밀렸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새로운 대안을 제안해본다면.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은 결코 혼합경제를 포기하지 않았다. 사회보장제도 또한 일부 미국식 운용방식을 채용하기만 했을 뿐 기본틀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조스팽 정권이 지난 95년에 신자유주의 모델로 사회보장체계를 바꾸려고 하다가 전 국민적 저항에 부닥쳐 포기했다.

반대로 대처 총리에 의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성공했다는 영국의 경우를 한번 보자. 영국은 섣불리 공기업을 민영화해 공공서비스가 유럽국가 가운데 최악의 수준이며, 이 때문에 지금 토니 블레어 정권은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다. 유럽에서 사고율이 가장 높고 서비스 또한 형편없는 수준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영국의 민영 철도회사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경제를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풀어갈 수 있는지.

=당연하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신주처럼 받드는 이른바 자유시장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사회적 구조에 불과하다. 시장은 사회의 일부분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지금 전세계적으로, 개인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시장의 논리가 사회정의의 논리보다 우위에 서 있다. 이렇게 되면 민주주의와 법치질서가 무너진다. 자유시장경제와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같은 반열에 놓여서는 안 된다. 병행하기도 불가능하다. 시장은 민주주의와 사회정의의 관점에 따라 통제돼야 한다.

박순빈 기자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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