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감시·견제 위한 집중투표제 표류… 정부의 눈가림식 보완에 시민단체 등 반발 
   
  “분식회계 규모가 무려 22조9천억원이다. 금융기관과 주식투자자들은 이런 엉터리 회계자료를 믿고 돈을 빌려주거나 대우계열사 주식에 투자했다가 낭패를 당했다. 결국 대우사태는 기업과 외부감사인(공인회계사)이 밀착해 분식회계를 자행한 결과가 아니냐.” 지난 10월27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산동회계법인 대표에게 쏟아졌던 여야의원들의 추궁이다. 이에 대해 산동회계법인 김윤규 대표는 잘못을 시인하면서도 “기업의 내외부 환경이 변하지 않고서는 분식회계를 근절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김우중 회장의 1인 지배하에서 총수가 분식회계를 자행하는데 계열사 대표나 임원들이 그것을 저지할 수 있었겠느냐”라고 반문하며 “이런 구조에서는 외부감사인이 분식회계를 발견해내기가 힘들다”고 덧붙였다. 결국 재벌의 황제경영이 가능한 지배구조를 고쳐야만 분식회계를 근절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궁색한 변명으로 들리기는 하지만, 재벌식 지배구조에서는 기업의 내외부 감시·견제장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총수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총수의 입김에 따라 선임되고, 또 이런 기업에서 주는 용역으로 회계사들의 밥벌이가 유지되는 판국에 투명경영, 책임경영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법과 제도로서 먼저 잘못된 지배구조를 고쳐야 한다. 즉 대우사태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의 재발을 막으려면 국회와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것이다.  
   
  정부는 기업 지배구조 개선 의지 있는가 
   
 
 
  그러나 지금까지 국회나 정부의 태도에서는 별로 그런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특히 이번 정기국회에 정부가 제출한 기업지배구조 개선 관련법안들은 중간에 재벌 입김이 듬뿍 스며든 흔적이 역력하다. 재벌들이 두려워하던 집중투표제와 주주집단소송제가 무늬만 갖춘 채 국회에 제출됐다. 집중투표제는 단서조항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사실상 포기했으며, 집단소송제는 도입시기를 정하지 않고 사정을 봐가며 단계적으로 시행한다는 게 정부안이다. 
  정부가 지난해 말부터 추진해온 ‘2단계 기업지배구조 개선작업’에서 이 두 가지 제도는 이해당사자들 사이에 논란이 가장 뜨거웠던 사안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재벌들만 기를 쓰고 반대하던’ 제도가 바로 이 두 가지이다. 
  집중투표제란 일상적으로 기업경영에 참여할 수 없는 일반주주들이 자신의 권익을 대변할 이사를 선임할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지금처럼 한명의 이사를 뽑을 때마다 소유주식 1주당 한표의 비율로 찬반투표를 하면, 51%의 지분을 확보한 지배주주쪽에서 모든 이사자리를 독식할 수 있다. 거꾸로 49%의 지분을 확보한 주요 주주일지라도 자신이 원하는 이사를 단 한명도 선임할 수 없다. 그러나 집중투표제가 시행되면 일반주주들이 힘을 모아 기존 지배주주나 경영진으로부터 독립적인 이사를 뽑기가 훨씬 수훨해진다. 가령 10명의 이사를 뽑는 투표에서 5%의 지분을 모은 주주가 다른 이사 선임 때는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는 대신에 자신이 원하는 이사에게만 표를 몰아주면 50%의 찬성으로 인정된다. 
  사실 이 집중투표제는 정부가 사외이사제도의 본래 취지를 살리기 위해 이미 98년 12월 도입한 제도이다. 지배주주의 전횡을 감시·견제해야 할 사외이사가 지배주주의 입김에 따라 선임되는 관행을 바꾸기 위한 조처였다. 그런데 문제는 집중투표제의 단서조항이다. 당시 상법 개정안에 3% 이상의 주주가 집중투표에 의한 이사선임을 요구할 수 있게 하는 근거규정을 만들면서, ‘정관에 달리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이라는 이상한 단서를 달았다. 재벌들의 잘못된 관행을 고치려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놓고서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까지 배려해준 꼴이다. 
  결국 이 단서를 이용해 대부분 기업들이 ‘집중투표제를 배제’하는 쪽으로 정관을 개정했다. 재정경제부가 지난 10월 한달 동안 증권거래소와 상장사협의회를 통해 647개 상장기업의 ‘지배구조 개선방안 이행실태’를 조사한 결과, 전체의 78.1%인 492개 기업이 정관에 따라 집중투표제를 배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155개 기업들은 소액주주의 지분이 낮거나 선임이사 수가 적어 딱히 정관에 배제조항을 넣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경우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주총에서 집중투표제를 시행한 기업은 단 한곳도 없다. 그래서 지배주주가 아니고 소액주주나 다른 이해관계자가 추천한 사외이사를 선임한 기업도 SK텔레콤을 제외하고는 전혀 없다. 정부가 실제로 아무런 효과가 없는 제도를 만들어 법만 복잡하게 만든 셈이다. 그러면서 정부는 형식뿐인 사외이사제도와 집중투표제 도입을 기업지배구조 개선의 대표적 실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야말로 ‘눈가리고 아웅’하는 꼴이다. 
   
  외부 전문기관 용역 결과 수용하지 않아 
   
  이번에 집중투표제를 다소 보완했다는 정부 발표 또한 생색내기용 눈속임에 불과하다. 소액주주가 집중투표제를 청구할 수 있는 요건을 지분율 3% 이상에서 1% 이상으로 낮춘 게 보완내용이다. 하지만 1% 이상의 소액주주가 백번, 천번 집중투표하자고 요구해봤자 정관에서 배제해버리면 시행할 수 없다. 
  투명경영과 책임경영을 위한 사전적 내부통제장치의 하나가 집중투표제라면, 집단소송제는 사후적 장치이다. 상장기업의 경영진이 분식회계나 허위공시, 주가조작 따위로 다수 투자자들에게 손해를 끼쳤을 경우, 한 사람의 피해자만 소송을 걸어 이기면 나머지 피해자들도 쉽게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집단소송 대상에는 회계감사인도 포함돼 부실감사를 방지하고 회계의 투명성을 높일 수 있다. 그런데 이마저도 ‘소송의 남발 우려’니 ‘시기상조론’ 등을 내세운 재벌들의 반발에 못 이겨 정부가 대폭 후퇴했다. 우선 법 근거만 만들어놓고 시행여부와 대상은 나중에 생각해보자는 게 정부 방침이다. 
  집중투표제의 의무화나 집단소송제도의 도입은 이해당사자들 사이에 첨여하게 의견이 엇갈려 정부로서도 신중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충분한 논의와 준비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두 제도는 정부가 외부 전문기관에 의뢰한 연구용역 결과에 따라 이미 지난 6월 말에 내부적으로 확정한 기업지배구조 개선안의 핵심이다. 세종법무법인과 미국 법률회사 쿠데트 바라더스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기업지배구조 개선연구 용역사업단’은 당시 이 두 가지를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지배구조 개선방안이라고 제시했다. 용역사업단은 올해 상반기 6개월 동안 심층적인 실태조사와 도입여건 분석, 국내외 전문가와 주요기업 및 재계 단체, 시민단체 등을 상대로 한 의견수렴 절차까지 거쳐 개선안을 마련했다. 
  그런데 이 용역결과에 대해 재벌들이 정부와 여당에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고, 진념 재경부 장관이 재계 단체장들과 만난 자리에서 의견을 듣고 하더니 알맹이가 다 빠져버렸다. 연구용역작업에 참석했던 한 회계사는 “정부가 어차피 핵심쟁점 사안을 재벌들과 의논해서 얼렁뚱땅 결정할 방침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세계은행 차관까지 얻어 수많은 전문가들에게 오랜 기간 용역을 맡겼는지 모르겠다”며 “이 정권에서 재벌개혁은 다 틀린 것 같다”고 말했다. 
   
  알맹이 없는 정부안과 참여연대안 맞대결  
   
  사정이 이렇게 되자 참여연대가 소액주주들의 힘을 모아 독자적으로 입법청원 활동에 나섰다. 참여연대는 지난 10월 말부터 별도의 사이버 운동공간(http://cleanstock.or.kr)을 만들어 ‘증권관련 집단소송제 도입과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참연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 박근용 간사는 “본격적인 서명운동에 돌입한 지 불과 보름 만에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교수, 변호사 등 관련 전문가, 주식투자자, 재벌개혁을 바라는 네티즌들의 서명이 1만건을 넘어섰고, 청와대와 재경부 게시판에서 대대적인 사이버시위도 펼쳤다”며 “국회에서도 이런 개혁열망을 받아들여 민주당 송영길 의원의 대표발의로 여야의 진보적 의원들이 함께 집중투표제와 집단소송제의 입법화에 적극 나서기로 약속했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이번 국회에서는 집중투표제와 집단소송제 도입과 관련해 정부안과 참여연대안이 나란히 상정돼 대결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박순빈 기자sbpark@hani.co.kr 
   
   

(사진/재벌식 지배구조에서 기업의 내외부 감시는 속절없는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사진은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개정 공청회 모습)

(사진/진념(오른쪽)재경부장관과 민주당 이정일 의원이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당정협의회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참여연대가 사이버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사이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