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된 칠레는 어떤 나라인가. 개방된 나라인 만큼 전 세계 상품들의 경쟁도 치열하다. 칠레시장은 앞으로 한국 상품의 경쟁력을 테스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전망이다. |
산티아고= 글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처음 출장을 가는 나라에는 출발 전 미리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콘센트 규격이다. 콘센트 규격이 맞지 않으면 자칫 개인용 컴퓨터를 사용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칠레의 호텔은 칠레가 얼마나 개방된 나라인지를 콘센트 하나로 보여주고 있었다. 객실의 손님용 테이블에는 각기 다른 4개의 콘센트가 이미 달려 있었다. 컴퓨터에 케이블만 꽂으면 즉시 인터넷을 할 수 있게 방마다 준비해놓은 것도 여느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거쳐서 가면 비행기로 꼬박 24시간 이상을 날아가야 하는 나라 칠레. 한국에 봄이 올 때 가을을 맞는 이 남반구의 나라가 우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지난 4월1일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된 것이다. 국토 면적으로는 남한의 8배에 이르지만, 인구는 1500만명에 불과한 이 작은 나라에서 자유무역협정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칠레는 지난해 6월 유럽연합(EU)과, 올 초에는 미국과 각각 자유무역협정을 발효시켰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국가들이나 남미공동시장(Mercosur) 국가들과도 무관세협약을 맺어 칠레는 이미 34개국과 관세 없이 무역을 하고 있다. 외국에서 온 상사 주재원들에게 1년만 칠레에 거주하면 영주권을 주는 것도 칠레가 개방된 나라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원료 수출국, 관세장벽 아주 낮아 칠레가 많은 나라와 무관세협약을 맺고 있다는 것은, 어느 나라든 칠레와 직접 자유무역협정을 맺지 않고도 관세 없이 상품을 팔 기회가 그만큼 많음을 뜻한다. 멕시코나 브라질처럼 칠레와 무관세협약이 맺어진 나라에서 상품을 생산하면 관세 없이 칠레에 상품을 들여갈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칠레 백화점의 가전제품 매장은 상품 박람회장 같은 느낌을 줄 만큼, 온갖 국적의 제품이 전시돼 있다. 가전제품보다 훨씬 다양한 메이커를 볼 수 있는 것은 자동차다. 대형빌딩의 주차장에는 중고차에서 신차까지 세계의 온갖 자동차 메이커들이 늘어서 있다. 칠레시장에서 시장점유율 3% 이상인 자동차 메이커만 해도 13곳이나 된다. 무관세협정이 아니더라도 칠레의 관세장벽은 사실 아주 낮다. 정보기술 분야와 기계류는 아예 관세가 없고, 가전제품과 자동차 등 관세가 있는 상품도 6%의 단일관세를 적용한다. 자유무역협정으로 무관세 상품이 많아짐에 따라 지난해 평균관세는 3.2%에 불과했다. 올해는 우리나라와 자유무역협정이 맺어져 2.5%로 더 떨어질 것이라고 한다.




제품 가격 내리지 않았다 칠레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이후 한국기업들은 얼마나 가격을 낮췄을까? 칠레는 관세율 6%에 부가가치세가 19%이므로, 이를 모두 감안하면 한국기업들은 그동안 관세가 적용되던 품목에 대해 8.2%가량 값을 낮출 여지가 생겼다. 하지만 시장가격에는 마진도 포함되므로 시장가격을 기준으로 보면 10%가량 값을 낮출 수 있다는 게 기업인들의 분석이다. 그러나 실제 가격을 낮춘 기업은 없다. “칠레시장에서 한국제품의 가격이 지난 4월1일 크게 내렸으며, 다른 경쟁국들도 값을 내렸으나 한국산의 인하폭을 따라잡지 못했다”는 일부 국내 언론의 보도는 오보였다. 현지 기업인들은 “왜 값을 낮춰야 하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삼성전자는 대부분의 제품값을 그대로 유지했다. 일부 값을 내린 품목은 자유무역협정과 무관하게 가격하락 추세를 반영한 것이다. 자유무역협정 발효 이전에서 시장경쟁을 위해 가격을 낮게 유지해왔으므로 굳이 값을 내릴 이유가 없다는 게 회사쪽 설명이다. 당분간은 관세가 없어진 만큼 수익을 챙겨 그동안의 출혈을 보상받고, 앞으로 시장변화에 대응할 여력을 비축하는 것이 낫다는 말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4월6일 칠레시장의 캠코더 가격을 오히려 6% 올리기도 했다. 시장의 평가가 좋은 만큼 올려도 무리가 없다고 본 것이다. 또 다른 가전업체 관계자도 “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됐다고 해서 가격을 내린다는 것은 우리 시장전략과는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동차업체들도 가격하락에는 신중하다. 현대자동차는 “관세 6% 면세로 판매가의 5%가량 인하 효과가 생겼다”며 “그러나 가격을 내릴 경우 경쟁을 유발할 위험이 있어 소비자 판매가격의 인하 여부는 신중하게 생각하겠다”고 밝혔다. 자동차업체들은 관세 면제분을 가격에 반영하기보다는 브랜드 이미지 제고 등 마케팅 활동에 쓰는 쪽을 택하고 있다. 그런데도 가격을 대폭 인하했다는 보도가 한국의 일부 언론에서 나오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현지의 상사주재원들은 “그래야 얘기가 그럴듯해 보이지 않느냐”고 말했다. 국회비준 지연에 따라 한국기업들이 칠레시장에서 가격경쟁력을 잃고 있다고 과장된 목소리를 내온 것을 정당화하려다보니, 정당화를 넘어 사실에 어긋난 보도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
칠레 과일의 놀라운 가격 칠레의 북단 항구도시인 아리카에서 칠레 중부의 수도 산티아고로 비행기를 타고 가면, 비행기 아래로 딱 두 가지 풍경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바다이고, 다른 하나는 사막이다.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지대인 아타카마사막이 칠레의 북부를 점령하고 있다. 그곳은 광물자원은 많지만 농사는 불가능하다. 칠레의 농업은 주로 중남부에서 이뤄진다. 그러나 농업국이라고 불리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과일만은 가격과 품질 양측면에서 막강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 수도 산티아고에는 연중 300일 이상 맑은 날이 이어진다. 비가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시에 배수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아 한꺼번에 50mm만 비가 와도 홍수가 난다. 비가 오는 날에는 오목한 길에 빗물이 고여 차가 다니지 못해 학교나 직장이 쉬곤 한다. 경찰들의 오토바이는 이런 상황에 대비해 바퀴가 아주 크다. 비가 적게 오는데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은 물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안데스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은 ‘산에 물을 뿌려가며 나무를 키울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하다. 일조량이 많고 물이 풍부하니 과일의 품질이 좋은 것은 당연하다. 쇼핑몰의 대형 슈퍼마켓 ‘줌보’에서 본 과일가격표는 역시 칠레는 과일의 나라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사과(홍옥 계통) 1kg이 369페소(1페소는 약 2원으로 계산한다), 레몬 299페소, 포도 529페소, 키위 399페소, 토마토 290페소 등이었다. 대규모 야채시장인 ‘마포초 베가시장의 소매상에선 포도 250~300페소, 사과 200페소, 토마토 250페소, 감 750페소, 복숭아 700페소 등으로 슈퍼마켓보다 훨씬 쌌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 12월 기준 포도 1kg에 2200~2800원 했고, 최근 사과 1kg에 4천원가량 한다. 가격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사과와 배는 자유무역협정에서 빠졌지만, 포도는 계절관세(5~10월까지 45% 부과)가 붙어 수입되고 있다. 한국머스크 남미시장 담당자는 칠레에서 한국까지 농산물을 실어오는 냉장컨테이너의 운송비는 20t짜리 한 컨테이너에 8천달러가량 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부대비용으로 1천달러가량이 더 든다고 한다. 따라서 넉넉히 잡고 한 컨테이너에 운송비가 1만달러 든다고 하면, kg당 운송비는 50센트(580원)가량이다. 1kg에 250페소(500원) 하는 포도에 계절관세가 붙고 운송비가 든다고 해도 한국에 들여오는 최종가격은 1kg에 1300원대다. 한국에서 생산한 포도로는 덤비기 어려운 가격이다. 한국머스크의 한 관계자는 “값이 좋을 때는 포도 한 컨테이너를 수입해 1억원을 남긴다는 얘기도 있다”고 말했다. 포도만이 아니라, 다른 과일도 점차 칠레산이 국내시장을 장악해갈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