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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오너라, 오너 없는 투명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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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3-3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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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지배구조 개선에 나선 포스코… 사외이사 비중 늘리는 등 경영진 ‘독재’의 위험성 제거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민영화된 옛 공기업들의 공통된 특징은 대부분 절대 지배주주가 없다는 것이다. 두산중공업(옛 한국중공업)처럼 재벌이 인수한 경우를 빼면, 대개는 지분이 잘 분산돼 있다. 재벌 총수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이런 기업들은 총수 일가의 이익을 위해 기업이 이용당하지 않고, 주주 전체에게 감시받기 때문에 경영 투명성이 높아 생산성도 아주 높은 특징을 갖고 있다. 하지만 절대주주가 없다보니 자칫하면 한번 경영권을 장악한 집단이 주인 노릇을 계속하기 쉬운 문제점도 안고 있다. 지난 2월6일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도 “민영화된 공기업에서 견제 없는 경영자 지배가 강화되는 참호 효과가 있을 수 있다”고 염려를 드러낸 적이 있다.

지난 3월12일 열린 포스코 주주총회. 포스코는 집중투표제를 도입하고 사외이사 비중을 획기적으로 높였다.(포스코제공)

전환우선주 발행 조항 삭제


<한겨레21>은 벌써 지난해 2월, 국내에서 가장 지배구조가 선진적이라고 평가되던 포스코가 그런 문제에 빠져들고 있다고 지적하는 커버스토리를 쓴 적이 있다. 그리고 지난해 3월 주주총회에서 최고경영자로 새로 취임한 이구택 회장은 취임 일성으로 “사회적인 기업지배구조 강화 요구에 부응하고, 민영화된 기업의 지배구조에 대한 모델을 제시하기 위해, 지배구조 개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1년이 지난 지금, 포스코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포스코가 지배구조 개선 방안에 대한 연구 용역을 발주한 것은 지난해 6월이다. 한국이사협회(당시 회장 이헌재)와 고려대 기업지배구조연구소(소장 장하성)는 10월에 보고서를 냈고, 12월에는 각계 인사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공개 세미나가 열렸다. 이를 통해 확정된 지배구조 개선 방안은 지난 3월12일 주주총회에서 정관 변경으로, 그리고 새로운 이사 선임으로 나타났다.

포스코의 지배구조에는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었던가? <한겨레21>은 포스코가 도입한 전환우선주 발행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경영을 잘못해도 경영진의 자리가 위협받지 않는 문제를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포스코는 적대적 인수합병 위협에서도 거의 자유롭다. 자기주식을 9.96%를 갖고 있고, 언제든 보통주로 바꿀 수 있는 전환우선주를 총주식의 25%까지 발행해 우호주주에게 넘길 수 있는 제도를 갖췄기 때문이다. 재벌 총수의 전횡을 수도 없이 봐온 국민에게는 이처럼 잘 분산된 지배구조가 지배구조의 모범처럼 보인다. 하지만 잘 분산된 지배구조를 활용할 경우 경영진이 얼마든지 ‘오너’ 흉내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포스코는 보여주고 있다.” 이런 지적에 화답하듯 포스코는 이번 주주총회에서 정관을 변경해 전환우선주 발행 조항을 삭제했다.

이사회 구성도 포스코는 획기적으로 바꿨다. 포스코는 우선 이사회 구성원을 사외이사 8명에 사내이사 7명에서, 사외이사를 9명으로 늘리고 사내이사를 6명으로 줄였다. 또 사외이사 중심으로 회의를 운영한다는 규정을 정관에 신설했다. 물론 사외이사의 비율이 높다고 해서 지배구조가 반드시 뛰어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사외이사는 사내이사에 비해서는 최고경영자에게서 더 독립되어 있지만, 최고경영자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임명하면 사외이사로서 제구실을 못하기 때문이다. 과거 포스코에서도 그런 염려가 있었다.

지배구조 개선을 선도하고 있는 이구택 회장(왼쪽)과 새로 사외이사로 선임된 박원순 아름다운 재단 상임이사.(한겨레 김종수 기자)
포스코는 이런 염려를 말끔히 떨어내기 위해 법조계, 학계, 시민단체를 비롯해 각계를 대표하는 명망 있는 인사들로 ‘사외이사 후보 추천 자문단’을 구성했다. 지난 1월14일 출범한 자문단에는 정운찬 서울대 총장, 이임수 전 대법관, 윤병철 우리금융지주회사 회장, 김일섭 한국이사협회 부회장이 포함돼 있다. 면면을 보면, 포스코 최고경영자에게서 독립성을 유지할 만큼의 사회적 명망을 가진 이들이다. 이사후보추천위원회는 이들 자문단이 3배수로 뽑은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차례 더 검증을 거쳐 신임 사외이사 후보를 추천했다.

집중투표제 도입으로 소액주주 권한 강화

실제 추천을 거쳐 새로 포스코의 사외이사가 된 이들 가운데, 시민운동의 ‘대부’인 박원순 아름다운 재단 상임이사가 끼어 있는 것은 화젯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포스코 관계자는 “경영진이 사외이사의 독립성을 높이기 위해 시민단체에 후보추천을 의뢰하는 방안을 예전부터 고민해왔는데, 사외이사 후보추천 자문단에서 이번에 박씨를 추천했다”고 설명했다. 새뮤얼 슈발리에 사외이사와 함께 새로 제프리존스 주한미국상공회의소 명예회장을 선임한 것은 외국인 지분이 60%에 이르는 현실을 고려한 것이다. 또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 전광우 우리금융 부회장 같은 경제계 전문가들을 사외이사로 영입한 것도 눈길을 끈다.

포스코는 이와 함께 여러 이사를 선임할 때 특정 이사 후보에 표를 몰아줄 수 있는 집중투표제를 다시 도입하기로 했다. 국내 대부분의 기업처럼 포스코도 그동안 집중투표제를 배제하기로 정관에 명시했다. 그러나 다음 주총 때부터 집중투표제가 도입되면, 소수·소액주주들의 권한이 강화돼 기업쪽의 독단적인 이사 선임을 막을 수 있게 된다. 또 공정거래법상 계열사와 내부 거래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외이사만으로 구성된 내부거래위원회를 신설했다. 포스코는 이에 앞서 지난해 감사위원회 구성원을 4명 모두 사외이사로 하기로 했다.

포스코는 주주총회에 이어 지난 3월17일 기업지배구조 헌장을 제정해 발표했다. 전문과 총칙, 5개 실천 부문으로 구성된 헌장은 전문경영진의 자율 책임경영을 근간으로 독립적인 이사회에서 경영진을 감독하고 견제하며, 주주들에 대한 투명한 정보공개를 실천해나간다는 내용으로 돼 있다. 헌장의 실천 내용은 이미 이번 주총에서 정관을 변경하면서 모두 도입한 것들이지만, 포스코쪽은 앞으로도 지배구조 개선 방안을 꾸준히 실천에 옮기겠다는 의지로 헌장을 제정했다고 한다.

포스코쪽은 올들어 본격화된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에서 포스코의 이름이 전혀 거론되지 않은 것은 포스코의 지배구조가 그만큼 투명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지금은 경영진이 더 이상 회사자금을 유용할 수 없는 경영시스템을 갖췄다는 것이다. 포스코 관계자는 “포스코는 앞으로 사외이사가 전체 이사의 3분의 2를 차지할 때까지 사외이사의 비중을 계속 늘려나가며 지배구조 개선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탄탄한 경영권을 자랑하던 재벌들이 최근 들어 외국인 투자가들의 경영 간섭으로 혼란을 겪는 가운데, 대주주가 없는 포스코의 경영이 안정돼 있는 것은 분명 대조적이다.

젊은 포스코로 거듭난다

[포스코의 인사개혁]

포스코에는 13년차 대리, 20년차 과장이 적지 않다. 인사적체 때문이다. 그래서 ‘포스코 직원들의 직급을 다른 회사의 직급과 그대로 비교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있다. 직급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포스코 직원들은 낮은 직급 때문에 대외업무를 할 때 곤혹스런 일이 적지 않다고 한다. 투명한 포스코는 젊은 포스코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일까? 이구택 회장 체제의 포스코가 젊은 포스코를 지향하고 있어 관심거리다.

포스코는 이번 주총에서 평균 재임기간이 6.8년인 임원 7명을 퇴임시키고, 평균연령이 52.8살인 10명의 임원을 새로 선임했다. 이로써, 임원들의 평균연령이 이구택 회장 취임 전 56살에서 54살로 낮아졌다. 평균 재임기간도 5.3년에서 2.7년으로 낮아졌다. 포스코 본사의 이런 인사 방향은 계열사로도 퍼지고 있다.

포스코는 주총 이후 실시한 후속 인사에서도 30여명의 고참급 실장과 팀장을 퇴진시키고 젊은 직원들을 실장·팀장으로 발탁했다. 퇴사한 직원들은 계열사로 자리를 옮기거나 일부는 희망퇴직했다고 한다. 이구택 회장은 “나이만 놓고 얘기해서는 안 되지만, 포스코는 국내 다른 대기업보다 평균연령이 5살 가량 많다”며 “좀더 젊은 포스코가 돼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젊은 포스코는 직원에 대한 평가 기준도 바꿔놓고 있다. 과거에는 경영진, 회사에 대한 충성도가 임직원 평가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면 이제는 창의성을 더 높이 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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