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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숨쉬는 섬유가 생활을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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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3-3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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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수 · 방풍 · 투습성 뛰어난 기능성 섬유 소재 고어텍스… 도심 속 캐주얼 의류에까지 확산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1980년대 말의 어느 해 겨울, 서울 목동에 있는 (주)고어코리아 사무실에 군 장성 한 사람이 갑자기 찾아왔다. “고어텍스라는 게 대체 뭡니까? 우리도 그 옷 한번 입어볼까 하는데….” 그가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고어코리아까지 찾아온 건 한·미 팀스피리트 군사훈련 때문이었다. 당시 팀스피리트 훈련에서 한국군과 미군은 함께 뒤섞인 채 포항 앞바다에 상륙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것일까? 판초우의까지 껴입은 한국 군인들은 온통 물에 젖어 덜덜 떨고 동상까지 걸려 고생하는데 미군은 전투복 한벌만 입고도 강추위를 견디며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비밀은 전투복 원단에 있었다. 미군 전투복에는 ‘고어텍스’라는 특수 섬유 소재가 들어 있기 때문에 추위에 잘 견딜 수 있다는 말을 듣고서 고어코리아를 찾아온 것이다.

고어텍스로 만든 신발, 운동복, 방화복. 고어텍스의 용도는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그러나 요즘 고어텍스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등산화·등산복·골프웨어·캐주얼·모자·장갑에서 ‘고어텍스’(Gore-tex) 마크가 붙은 제품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일반 신발과 의류에 비해 고어텍스가 들어간 완제품은 두배쯤 더 비싸지만, 지난해 한국에서 고어텍스 소재를 넣은 등산화는 무려 100만 켤레가 팔렸다. ‘아웃도어 웨어의 갑옷’으로 알려진 고어텍스는 방수·방풍·투습성(의류 안쪽에 습기가 쌓이는 것을 막는 것)이 뛰어난 기능성 섬유 소재로, ‘숨쉬는 원단’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 방수투습천은 기능 떨어져

고어텍스는 그동안 주로 등산용 장비에 사용돼왔으나 이제 도심 속 캐주얼 의류에까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도시 감각 패션에 접목시켜 기능성과 패션을 함께 추구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는 것인데, ‘고어 시티웨어’가 대표적이다. 고어텍스가 아웃도어 스포츠복·신발에서 이제 캐주얼·세미정장용 자켓·트렌치코트·니트·골프의류 같은 트렌디한 도시 이미지의 캐주얼복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고어코리아는 지난해부터 빈폴·헨리코튼·잭니클라우스·르까프·아스트라·마에스트로를 비롯해 20여개 의류업체와 손잡고 고어텍스를 넣은 시티웨어 제품을 생산해 판매하고 있다. 고어코리아는 본사와 지사에서 원단을 들여온 뒤 라이선스를 맺은 국내 고객사에 고어텍스를 공급해 완제품을 생산한다.

시티웨어는 고어텍스 외에 방풍 기능을 강화해 보온성을 높인 윈드스타퍼(Windstopper) 소재도 쓰이고 있다. 윈드스타퍼는 한겹만으로도 따뜻하기 때문에 가을, 겨울철에 한벌이 셔츠와 겉옷 기능을 동시에 충족시켜준다. 스키복에 쓰이는 에어밴티지(Airvantage) 소재는 착용자가 튜브를 이용해 섬유의 단열효과를 직접 조절할 수 있다. 옷 안에 공기층을 만들어둔 뒤 의류에 들어 있는 작은 튜브를 통해 바람을 불어넣으면 따뜻한 공기층이 이루어져 온도가 높아지고, 반대로 바람이 빠지면 온도가 내려가는 방식이다.

고어텍스처럼 외부에서 들어오는 수분은 차단하고 몸에서 발생하는 땀을 배출시키는 방수투습천은 국내에서도 개발되고 있다. 그러나 국산 원단은 투습 기능을 위해 방수천 안에 막을 코팅으로 칠하는 공법이어서 고어텍스에 비해 기능이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팅할 때 투습 기능을 살리려고 하면 방수 기능이 떨어지고, 방수성에 치중하면 투습 기능이 떨어지는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반면 고어텍스는 세탁기에 넣고 250시간을 돌려도 기능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내구성이 뛰어나고 완벽한 방수를 위해 모든 박음선을 완전히 봉합하는 심 실링(seam sealing)공법으로 생산된다. 고어코리아 김광수 총괄본부장은 “고어텍스 섬유 소재는 기름·땀·온도에 별 영향을 받지 않고, 바깥의 20도 정도 온도 차이를 자체 흡수하거나 배출할 수 있도록 돼 있기 때문에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모두 견딜 수 있다”며 “지나치게 내구성이 강해 500년이 지나도 고어텍스 원단이 썩지 않는 게 문제로 지적될 정도”라고 말했다. 일반 섬유물질은 영하 60도가 되면 얼어붙어 부러지지만 고어텍스는 영하 160도 정도까지 견딜 수 있다고 한다.

지난해 말 남극 세종기지 대원들이 조난당했다가 극적으로 구조될 당시 대원들이 입고 있던 방한복·장갑·신발이 모두 고어텍스로 만들어져 세간의 주목을 받았을 정도로 고어텍스는 극한 상황일수록 더 진가를 발휘한다. 고어텍스가 등산복을 비롯해 아웃도어 제품에 쓰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미군 전투복에서 보이듯 각종 특수복에도 널리 쓰이고 있다. 고어텍스는 1969년 아폴로 우주선 달 탐사 때 우주선 장비로 사용된 뒤로 우주복·방화소방복·경찰복·화학공장 작업복에도 쓰이고 있다. 국내에서 국정원 요원이나 군 특수부대, 청와대 경호원들도 고어텍스가 들어간 특수복을 입고 있다고 한다.

의료 분야에까지 널리 쓰인다

고어텍스의 첨단 기능은 의료 분야에서도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고어텍스는 인공혈관과 인공인대를 만들 때, 그리고 수술한 뒤 봉합할 때 인공살 패치로 이용되기도 한다. 성형수술에도 이용되는데 사람의 피부와 거의 똑같은 기능을 갖고 있어서 몸에 부작용을 주지 않는다. 이밖에 치아에 쓰는 치실은 물론 일부 바이올린과 기타 줄에도 고어텍스 소재가 들어가고 있고, 휴대전화기용 소형 연료전지에 쓰이는 고어텍스는 휴대전화기가 뜨거워지는 것을 막아준다고 한다.

“캐주얼에 기능을 입힌다”

[인터뷰 | (주)고어코리아 김광수 총괄본부장(섬유사업부)]

김진수 기자
고어코리아 섬유사업부는 지난해 한국시장에서 500억원의 매출액을 올렸다. 전반적인 경기불황과 국내 의류산업 침체에도 2002년(350억)에 이어 꾸준히 급성장하고 있다. 올해 목표 매출액은 750억원으로 잡았다. 고어코리아 섬유사업부 김광수 상무는 “외환위기 이후 고어텍스는 놀라운 실적을 경신하며 계속 성장하고 있다”며 “비록 고어텍스 제품이 고가이긴 하지만 경제 침체로 큰돈 들이지 않고 레저와 운동을 즐길 수 있는 등산객이 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어텍스는 지난해부터 도시 캐주얼 의류 분야에 본격 진출하고 있다. 김 상무는 “기능성 소재는 더 이상 아웃도어 스포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며 “캐주얼과 스포티즘이 패션계의 화두로 떠오르고 유틸리티 룩이 최근 패션계의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는데, 소비자들은 하나의 의류에서 단순한 패션을 넘어 더 많은 기능성을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언제나 가볍고 쾌적한 상태를 유지해주고 체온 변화를 줄여주는 캐주얼 소재를 추구하는 쪽으로 흐름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일상복, 등산복, 그리고 회사에서 입는 옷이 각각 따로 있어요. 한국 사람만큼 패션을 중시하고 옷을 고를 때 까다로운 국민도 별로 없어요. 지금까지는 캐주얼의 칼라나 디자인만 봤는데 이제는 소비자들이 기능을 고려하기 시작했어요. 갈아입지 않고 회사에서 입던 옷 그대로 지방에도 가고 인천국제공항으로 바로 갈 수도 있는 그런 옷이 필요한 겁니다.”

그는 또 “캐주얼 차림으로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늘면서 캐주얼에 방수·방풍·투습 같은 ‘기능’을 요구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다”며 “주5일제 확산으로 금요일에 캐주얼을 입고 회사에 나왔다가 퇴근과 동시에 바로 레저를 떠나는 경우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바람이 불든 날씨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 실용적인 의류가 각광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어텍스 같은 첨단 소재를 넣은 의류로 캐주얼시장이 빠르게 재편될 것이라는 얘기다. 김 상무는 “고어텍스와 비슷한 기능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경쟁업체의 섬유 소재가 듀폰에서 개발한 아쿠아토르, 일본의 엔트란트를 비롯해 전 세계에 100여개 정도 된다”며 “하지만 다들 실패했거나 시장 점유율이 미미해 오히려 고어텍스의 뛰어난 기능만 더욱 부각시켜주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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