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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우리은행 안방 차지한 삼성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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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3-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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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금융 회장에 내정된 황영기 전 삼성증권 사장… 시민단체는 삼성의 영향력 확대 우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황영기(52) 삼성증권 전 사장이 우리금융지주회사 회장 겸 우리은행장을 맡게 됐다. 아직 주주총회의 승인을 받지는 않았지만, 절대주주인 정부가 내정한 만큼 사실상 확정된 일이다. 민간 출신인 그의 우리금융 최고경영자 취임은 관료적 분위기의 은행을 일신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실제로 그가 가장 유력한 회장 후보라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우리금융 주가가 하루 만에 5% 이상 오를 정도로 주주들은 기대감을 내비쳤다. 그러나 삼성그룹 출신인 그가 앞으로 우리금융을 경영하면서 삼성과의 옛 인연을 과연 완전히 털어낼 수 있겠느냐 하는 의문은 아직 말끔히 가시지 않고 있다.

3월7일 열린 황영기 전 삼성증권 사장의 기자회견. 그는 우리금융을 경영하면서 삼성과의 옛 인연을 털어낼 수 있을까.(한겨레 강창광 기자)

이헌재 경제부총리의 적극 지지


황씨는 회장후보추천위원회(위원장·이재웅 성균관대 교수)가 구성되기 전부터 사실상 새 최고경영자로 내정돼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사실 우리금융의 새 경영진 구성이 파격적일 것임은 일찌감치 예견됐다. 하마평이 무성한 상황에서 정찬용 청와대 인사보좌관이 옛 재무부 출신 전직 간부들의 금융기관 낙하산 인사를 경고하고 나선 것이 첫 번째 신호였다. 정 보좌관은 월간 <포브스코리아> 창간 1주년 인터뷰에서 “경제부처 출신 관료가 산하 공기업의 기관장이나 주요 임원을 맡는 낙하산 인사에 강한 제동을 걸겠다”며 “저항도 만만치 않겠지만, 이를 과감히 물리치겠다”고 말했다. 정 비서관은 윤병철 우리금융지주회사 회장 등 간부 6명과 오찬을 함께하는 등 인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모습을 보였다.

회장후보추천위원회가 구성된 것은 지난 2월20일이다. 그 과정에서 대주주인 정부(예금보험공사)는 외부 전문가 3인을 추천위원회로 결정했다. 추천위원회 구성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리고 2월28일까지 15명의 후보가 응모했다. 이 중 황씨와 신명호 전 주택은행장, 김상훈 국민은행 회장, 장병구 수협 신용부문 대표, 전광우 우리금융 부회장, 최연종 한국은행 부총재 등 6명이 최종 면접에 올랐다. 그런데 면접 이틀 뒤인 3월4일 황씨는 아직 회장 후보 추천이 이뤄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삼성증권에 사표를 제출했다. 황씨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라고 밝혔지만, 이 또한 정부쪽의 언질이 없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황영기씨를 우리금융 최고경영자로 내정하는 데 기여한 이헌재 경제부총리(왼쪽,김진수기자)와 정찬용 청와대 인사보좌관(오른쪽,탁기형).
후보추천위원회는 시중의 소문대로 최종적으로 황씨를 선택했다. 이재웅 추천위원장은 “기업가치 극대화를 통해 우리금융의 성공적인 민영화를 가장 잘 추진할 수 있고, 국제금융환경에서 전략적 마인드로 대처할 수 있는 적임자로 판단해 황 전 사장을 단독 후보로 이사회에 추천한다”고 밝혔다. 물론 황씨는 면접 과정에서 우리금융의 경영과 관련해 아주 뛰어난 식견을 보여줬다고 한다. 그는 1981년부터 89년 사이 파리바은행과 뱅커스트러스트 인터내셔널 도쿄지점 등에서 일한 바 있다. 또 삼성그룹에 근무하는 동안에도 줄곧 금융 분야를 맡은 금융 전문가다. 그러나 그가 대표를 맡던 삼성증권이 우리금융의 정부 지분 매각 주간사로 선정됐던 것이 그의 면접에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 매각 주간사의 대표로서, 우리금융의 내부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는 얘기다. 증권업계의 한 관계자는 “증권사 사장은 애널리스트들이 공개보고서에 쓸 수 없는 내용까지 다 보고받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 기업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데 내부자보다 유리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황 내정자는 특히 외부적으로 이헌재 경제부총리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총리는 지난 2월26일 노무현 대통령과의 회동에서 금융기관장 인사 원칙과 관련해 “우리금융 회장은 금융시장의 변화와 혁신을 선도할 수 있는 민간인 출신이 적합하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이 부총리는 야인 시절 ‘이헌재 펀드’의 자금모집 과정에서 황 사장과 여러 차례 만나, 금융산업을 보는 시각에 대해 상당한 교감을 나눈 것으로 전해졌다. 금융노조와 참여연대가 황 내정자의 자격을 문제 삼자, 이 부총리는 “(황씨의 삼성그룹 근무 경력은) 문제되지 않는다”고 응원하기도 했다.

우리금융 매각 과정에서 삼성은?

그러나 국내 최대 재벌인 삼성 출신이 우리금융의 최고경영자를 맡는다는 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은행은 삼성의 주채권은행이다. 황 내정자는 이에 대해 “능력에 문제가 있어서라면 몰라도 삼성 출신이라는 점이 흠결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삼성그룹은 예금잔고(3조518억원)가 대출(1911억원)보다 훨씬 많고 삼성자동차의 채권 비중도 15%로 서울보증의 53%에 비해 아주 적어, 우리은행 독자적으로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삼성그룹이 김인주 사장을 구조조정본부 차장으로 선택하면서, 황 내정자가 그룹을 떠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것이라고 본다. 삼성과의 인연은 깊지만, 결코 삼성의 ‘파견’은 아니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노동계와 시민단체는 “삼성이 은행까지 노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감추지 못한다. 삼성생명을 중심으로 금융지주회사 설립을 검토 중인 삼성은 이미 삼성생명을 통해 우리금융지주회사와 방카슈랑스 합작 마케팅사 설립에 합의하고, 우리금융지주회사의 지분 3%를 사기로 약속한 상태다. 그런 가운데 황씨의 우리금융 회장 선임은 지분참여 이상으로 삼성과 우리금융간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동원증권은 지난 3월8일 보고서에서 황씨의 우리금융 회장 내정이 ‘우회적인 이헌재 펀드 효과’를 통해 주가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자본시장 육성 발전에 대한 황 내정자의 의지와 비전이 이헌재 부총리의 뜻과 같아 보인다는 설명이다. 이는 뒤집어 생각하면, 황씨의 우리금융 입성이 우리금융의 매각 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든 삼성의 역할을 부각시킬 가능성을 키웠다는 얘기가 된다. 이헌재 펀드는, 3조원이 넘는 우리금융 인수자금을 확보한다는 발상 자체가 삼성과 같은 재벌의 우회적인 참여를 가정하지 않고서는 애초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부당내부거래에도 관여했다

황영기 우리금융지주회사 회장 및 우리은행장 내정자가 삼성그룹에 재직할 때 우리은행(옛 한빛은행)을 불법에 이용한 사실이 밝혀져, 자격 시비가 계속되고 있다.

금융감독위원회와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삼성생명은 지난 1999년 1월 보유하고 있던 한빛투신운용 등의 주식을 싼값에 한빛은행에 넘기는 대신, 한빛은행이 보유한 삼성투신운용 주식을 이건희 회장의 아들 재용씨에게 팔도록 했다. 금감위는 훗날 검사에서 삼성생명이 당시 보유주식을 싼값에 넘겨 10억원의 기대이익을 상실한 사실을 밝혀냈다.

또 공정거래위원회는 삼성생명이 1997년 4월부터 1999년 6월까지 한빛은행 등 5개 은행의 특정 금전신탁을 이용해 삼성자동차 기업어음을 매입했으며, 다른 은행들의 후순위채를 사주면서 대신 은행들에게 삼성 계열사의 사모사채를 사게 한 것은 계열사에 대한 부당지원이었음을 적발했다.

이런 불법 행위가 벌어지던 무렵 황 내정자는 삼성생명의 전무이사(전략기획실장)를 맡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그는 1999년 12월 금감위로부터 문책 경고를 받았다. 징계는 이미 3년이 지나, 은행장 자격에 직접적으로 문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부당내부거래로 제재를 받은 사람을, 부당내부거래에 이용된 금융기관의 장으로 선임한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참여연대는 “회장후보추천위원회가 이런 경력을 심의 과정에 반영했느냐”고 따졌다. 만약 후보 선정 과정에서 이를 따지지 않았다면, 선정 결과는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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