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구조조정 위한 통합 구도 오리무중… 초대형 우량은행 탄생은 가능한가 
   
  “10월 말 안으로 우량은행간 통합이 발표될 수 있을 것이다.”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이 지난 9월 말 기자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그는 동방금고 불법대출 사건에 금감원 간부가 개입한 일로 금감원 안팎이 어수선하던 10월29일에도 기자간담회를 열어 “합병발표가 조금 늦어질 뿐, 11월 초에는 발표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위원장의 이런 장담은 결국 공수표가 돼버렸다. 
  우량은행간 합병만 늦어지는 게 아니다. 지주회사 설립을 통한 부실은행의 통합도 한빛은행과 짝짓기에 부정적인 다른 은행들의 반발로 출발부터 난항이 예상되고 있다. 설령 합병은행이 발표되고 지주회사 설립이 현실화된다고 해도 애초 기대했던 ‘선도은행’(리딩뱅크)의 탄생과는 크게 거리가 멀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이로 인해 올해 말까지 금융구조조정을 끝내겠다는 정부의 구도에도 커다란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가고 있다. 
   
  부실은행 통합 등 연내 마무리 난항 
 
    
  은행간 통합에 대한 정부의 밑그림은 오래 전부터 명백했다. 이근영 금감위원장은 “세계적으로 은행들이 대형화, 겸업화 추세로 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세계 50위권에 드는 은행이 한두개쯤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선도은행이 나와 경쟁을 주도해나가면 나머지 은행들도 저절로 혁신에 나설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심지어 김우중 전 대우 회장조차도 전경련 회장 시절 자신이 직접 ‘리딩뱅크’ 설립 구상을 밝힐 정도로 선도은행의 출현은 금융혁신의 첫단추를 꿰는 작업으로 간주돼왔다. 
  이와 관련한 정부의 구상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우량은행간의 합병을 유도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부가 대주주인 은행들을 클린뱅크로 만든 뒤 지주회사 방식으로 묶어 거대은행을 출현시킴으로써 다른 은행들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우량은행끼리의 합병은 한미은행과 하나은행이 거의 무르익어 가는 단계다. 그러나 두 은행이 합병한다고 해도 자산규모가 80조원대로 국민은행(93조원) 수준에도 못 미치기 때문에 이 구도에 어느 은행이 더 합류하느냐가 관건이다. 금감원의 한 간부는 두 은행의 합병 움직임에 대해 “혼자서는 배우자를 선택할 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먼저 작은 은행끼리 통합해 배우자 선택권을 갖겠다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결국 주택은행이나 국민은행 등 대형은행이 이들 은행과 손잡을 수 있느냐가 초대형 우량은행의 탄생 여부를 가르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국민은행이나 주택은행이 이들 은행과 합병하려는 움직임은 거의 포착되지 않고 있다. 김상훈 국민은행장은 “우리는 여러 곳에 손을 내밀고 있지만, 그쪽에서 우리와의 합병에는 소극적이다”며 “국민은행의 문화가 배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국민은행 나름대로 합병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감위 관계자는 정반대로 “국민은행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어 문제다”고 말했다. 국민은행이 합병에 나서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합병 뒤 고용 문제 때문으로 알려졌다. 국민은행의 직원 수는 지난 6월 말 현재 1만1166명이다. 외환은행(5704명)의 2배 수준으로, 11개 시중은행 중 가장 많다. 직원들이 대규모 인력감축을 우려해 대규모 합병에 매우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주택은행의 경우는 소매금융 전문은행으로 나아가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주택은행은 이를 위해 다른 은행들에 잇따라 합병을 제안하고 있지만, 손을 내미는 곳이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시중은행 간부는 “주택은행과 손을 잡으면 행장 자리는 김정태 주택은행장에게 그냥 넘겨줘야 하는데, 어느 은행장이 제 ‘목’을 내놓고 선뜻 주택은행과 손을 잡겠느냐”고 말했다. 
  주택, 국민, 한미, 하나를 제외하면 합병구도에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조흥, 외환, 신한은행 등 3곳뿐이다. 그러나 이 중 조흥은행과 신한은행은 이미 독자적으로 금융지주회사를 설립하겠다고 선언해 합병 구도에서 이미 빠져나갔다. 외환은행도 다른 은행과 합병하지 않고 당분간은 혼자서 살아보겠다는 생각이다. 제일은행은 이미 뉴브리지캐피탈에 매각됐고, 서울은행은 정부가 정상화 뒤 해외매각할 예정이어서 일단은 합병이나 지주회사 통합 대상이 아니다. 
   
  지방은행 묶으면 시너지효과 크다지만… 
   
  정부 주도의 지주회사 설립을 통한 통합도 그림이 썩 예쁘게 나오지 못할 것 같다는 게 정부 관계자들의 걱정이다. 11월8일 은행경영평가위원회에서 경영개선계획을 승인받지 못해 정부 주도로 구조조정이 추진될 은행은 한빛, 평화, 광주, 제주은행 등 4곳이다. 
  정부가 이들 은행을 합병하는 대신 지주회사 설립쪽으로 방향을 튼 것은 지주회사가 시너지효과를 키우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학계에서는 일본의 경우 지주회사로 통합해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은행들이 나왔지만, 아무도 그런 은행을 우량은행이라고는 하지 않는다며, ‘지주회사’ 설립 방식의 구조조정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정부는 지주회사의 설립이 합병보다는 인력감축을 적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노동자들의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지주회사에는 은행마다 ‘행장’이 필요하기 때문에 최고경영자 자리도 오히려 하나가 더 늘어난다. 
  정부는 지주회사 설립을 통해 1개의 초대형은행을 출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지방은행들을 묶어 사실상 전국은행화한다면 시너지효과가 클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지방은행 통합 구도도 썩 여의치 않을 전망이다. 평화, 제주, 광주은행은 한빛은행과의 지주회사통합에 부정적이며, 독자적으로 지주회사 설립 구상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들 은행만을 묶을 경우 자산규모가 16조원에 불과하다. 결국 전북, 대구, 부산, 경남은행 등 다른 지방은행들이 이에 합류하지 않으면 의미를 찾기 어려운 셈이다. 
  정부 관계자는 “공적자금이 투입되지 않는 지방은행들은 당장 어렵더라도 혼자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워낙 강하다”며 “현재로서는 독자생존이 불가능하다고 판정을 받은 4개 은행을 하나로 묶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4개 은행을 지주회사의 자회사로 편입해 묶을 경우 한빛은행 80조원을 비롯해 자산 97조원대의 지주회사가 등장하게 되지만 규모만 클 뿐, 선도은행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는 강제로 은행통합을 추진하기도 어렵다고 본다. 금감위 관계자는 “통합이 성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당사자들이 ‘잘해보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이라며 “억지로 통합을 시킬 수도 없지만, 억지로 통합해도 좋아질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의 인위적인 통합구도에 은행들이 반발하면서, 반발에만 성공하면 ‘좋았던 지난 시절’(good old days)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할까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시장의 압박이 은행들을 움직여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위기의식이 없으면 은행들이 자발적으로 통합에 나서기 어렵다는 것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연말이 되면 만기가 돌아오는 정기예금이 많고 예금부분보장제도도 시행돼 자금 이동이 있을 것”이라며 이런 상황이 은행들에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예금부분보호 한도를 2천만원에서 5천만원으로 이미 올려 시장의 압박효과는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진념 재경부 장관이 예금부분보호 한도 확대를 적극 추진할 때 금감위와 재경부의 실무자들이 “그동안 애써 추진해온 구조조정을 망치는 일”이라며 불만을 드러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정부, 강제적 통합보다 시장 압박 기대 
   
  금감위 최범수 자문관은 “어치피 금융구조조정은 오랜 세월이 걸린다”며 “이제 대장정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제이피 모건을 인수하기로 한 체이스맨해튼의 탄생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체이스뱅크는 체이스와 케미칼이 합친 것이다. 케미칼은 그 전에 매뉴팩처러스하노버를 합병했다. 매뉴팩처러스하노버는 매뉴팩처러스와 하노버가 합친 것이다.” 체이스맨해튼이 제이피 모건을 인수한 것조차 아직 끝은 아니라는 것이다. 
  재무상태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우량은행으로 불리는 은행들조차 국제적인 기준에서 보면 50점 이상의 평가를 받기 어려운 현실을 감안할 때, 은행 구조조정이 기대에 못 미칠수록 우리 경제가 정상을 찾을 날도 그만큼 멀어진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 경제부jeje@hani.co.kr 
  

(사진/정부가 추진중인 금융지주회사제에 대해 노조들은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지난 7월1일 열린 관치금융 청산을 위한 금융 노동자 집회 모습)

(사진/김병주 은행경영평가 위원장이 지난 11월8일 오후 금감위에서 은행경영평가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지주회사 설립을 통한 부실은행 통합도 그 대상의 하나인 한빛은행과 짝짓기에 다른 은행들이 부정적이어서 난항이 예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