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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이 나서야 기업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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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1-1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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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기업이사연구회 제서스 에스타니슬라오 회장이 말하는 기업지배구조 개혁

“은행들이 기업지배구조 개혁의 선봉에 서야 한다. 은행 스스로 선진적 지배구조를 갖춰 기업들에 보여주고 돈을 빌려주거나 투자할 때도 지배구조 개선여부를 반영해야 한다.” 이번 행사를 공동주최한 필리핀 기업이사연구회(PICD)의 제서스 에스타니슬라오 회장은 기업지배구조 개선의 ‘은행 책임론’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하버드대 교수, 아시아개발은행(ADB) 경제연구소 소장, 필리핀의 아시아·태평양대 교수 등을 지내면서 오래 전부터 동아시아권 금융·기업구조조정에 대한 다양한 이론적 방안을 제시해왔다.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 집권 초기인 지난 89년부터 92년까지 필리핀 경제기획원 장관과 재무장관을 지내는 등 현실참여적인 학자이다.

동아시아 특유의 시장과 법체계 충돌

-97년 외환위기 탈출 이후 동아시아 각국의 기업지배구조 개선 실적을 평가한다면.


=싱가포르가 가장 많이 바뀌었다. 법과 제도, 관행을 모두 과감하게 개선했다. 싱가포르의 경우 주요 기업들의 지분을 정부가 보유하고 있어서 정부의 의지대로 쉽게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할 수 있었다. 반면에 일본 기업들의 지배구조개선이 가장 느리다고 본다. 한국을 비롯한 나머지 국가들은, 국제통화기금(IMF)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기구들의 요구와 권고에 따라 기업지배구조와 관련된 법과 제도는 많이 바뀌었으나 아직까지 관행으로 정착되지는 못했다.

-동아시아에서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어떤 걸림돌이 있다고 보는가.

=우선 법체계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시장은 영미식 기업지배구조를 요구하는 반면에 기업의 소유·지배구조에 대한 법체계는 여기에 맞지 않다. 인도네시아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나라는 네덜란드 식민지일 때 만들어진 법체계로 기업들이 만들어졌는데 하루아침에 뒤바꾸기가 어렵다. 당장 이를 무시하고 뒤바꾸기 어렵다. 더 큰 걸림돌은 기업의 소유집중이다. 한국을 포함해 필리핀, 인도네시아, 타이 심지어 자본시장이 발달한 홍콩의 기업들까지 소유집중의 문제가 해소되지 않았다. 기업의 지분이 소수 가족들에게 편중되어 있다보니까 시장에 의한 공정하고 투명한 기업경영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소유구조가 개선되지 않고서는 지배구조 개선도 어렵지 않느냐. 그렇지만 강제로 이런 소유구조를 개선할 수도 없는데 어떤 해법이 있다고 보는지.

=결국 시장과 제도의 힘이다. 나라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최소한 주식시장에 상장된 기업들은 어느 정도 공통적인 제도적 기준을 갖춰야 한다. 가령 전체 발행주식 가운데 일정 지분 이상은 반드시 자유롭게 거래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또다른 힘은 시장에서 나온다. 좀더 나은 기업지배구조를 갖춘 기업에 좀더 많은 사람들이 투자함으로써 소유와 경영을 선진화하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시장의 어떤 힘이 기업지배구조를 바꿀 수 있는지 설명해달라.

=먼저 앞으로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외부 전문기관들의 평가가 활성화될 것이다. 이를 기준으로 채권자나 주주들의 압력도 커진다. 채권자와 주식 투자자들이 집단적인 경영감시활동이 활성화될 것이고, 또 평가회사들의 이런 활동의 폭과 성과를 평가점수에 그대로 반영시킴으로써 지배구조 개선을 유도하게 된다.

은행들의 독립적 대출 시스템 확보 시급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한다고 해서 미국식 지금까지 성장의 동력이었던 아시아적 기업문화와 가치를 모두 버리고 미국식 기업구조로 바꾸는 것은 위험하다 주장도 있다.

=물론 기업을 둘러싼 문화와 제도적 차이는 있고, 아시아적 기업구조에도 미국기업이 가지지 못한 장점이 있다. 하지만 시장과 자본의 국경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아시아적 가치를 고집할 수도 없다. 문제는 주주의 이익을 극대하고 결과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지는 경영을 하는 데 어떤 구조가 효과적인가이다. 이런 기준에 따라 양쪽의 장점을 찾아내 제도화해야 한다.

-회장께서는 금융기관, 특히 은행을 통한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강조했는데 아시아 각국에서 금융기관 스스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기관이 어떻게 기업지배구조 개선의 지렛대 구실을 할 수 있는지.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채권과 주식 등 직접금융시장을 통한 기업구조조정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시장이 커지는 속도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 간접금융시장의 기능을 빨리 회복시켜야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기존 방식대로 정부가 금융재원의 분배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은행들이 자기판단에 따라 독립적으로 대출을 하는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면 금융부실은 정부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누적될 것이다.

세부=박순빈 기자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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