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의 흐름과는 비껴 있되, 서울 도심 속에 열려 있는 전교가르멜 ‘영성의 집’의 건축미학
당신이 이왕 세속의 삶에서 멀어지기로 결심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외딴섬이나 깊은 산속에 사는 건 다행일는지 모른다. 떠들썩한 시장골목으로 창문이 나 있는 집에서 초연히 사는 일이 훨씬 더 단수 높은 내공이 필요할 것이므로. 수도원의 높은 담은 바깥 사람들에겐 안쓰러움을 주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겐 축복이다. 도시 안에 잠겨 있으면서도 바깥과는 차단돼 있는 곳.
참으로 특이한 수도원
그런 점에서 서울 종로구 사직동 전교가르멜의 ‘영성의 집’은 특이한 수도원이다. 이곳은 고요와 침묵, 은둔을 사랑하는 수도자들의 공동체이면서도 한편으론 저잣거리 사람들을 위한 집이다. 본래 가르멜수도회라는 이름은 구약성서에서 예언자 엘리야가 깊은 침묵과 고독 속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가르멜산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스페인에서 시작한 ‘전교 가르멜’은, 한번 입회하면 평생 수도원 담 밖을 나오지 못하는 ‘봉쇄 가르멜’과 달리, 대중들에게 선교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가르멜의 정신을 간직하면서도 학교·병원 등에서 봉사하고 보통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도와주는 수도회다. 자기 안에 침잠하면서도 밖과 소통하길 원하는 수도회의 지향처럼 이들이 사는 집은 세속의 흐름과는 비껴 있되, 도시 속에서 열려 있다.
연말연시를 맞아 들뜬 도심을 뒤로 하고 2003년 12월 사직동 주택가에 놓인 전교가르멜 수도원을 찾았다. 오르막 골목길을 걷다 쳐다보면 수도원은 종탑과 높은 담 때문에 섣불리 다가갈 수 없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전깃줄이 이리저리 얽힌 하늘 사이로 솟은 흰 종탑은 군더더기 살점을 모두 발라낸 뼈대 같은 인상이다. 옷깃을 여미며 초인종을 누른다. 깊은 산중 사찰로 들어가기까지 기다란 진입부가 있듯, 여기까지는 성소로 향하는 도입부이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풍경은 역전한다. 성곽처럼 정원과 3층 건물을 두른 담은 이 집을 주변과 잘라내면서도 사각형 구멍들이 빙 돌아가며 뚫려 있어 바깥 세상을 끌어들인다. 이웃의 벽돌집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웃과 격리된 곳이 아니라 세상의 노폐물을 여과시키는 장소란 뜻이다. 3층 건물이 두 채로 나뉘어 ㄱ자로 놓이며 시각적인 부담을 덜었고, 그 덕분에 자연스레 생긴 정원엔 작은 성모상과 소박한 나무의자가 놓였다.
통유리로 트여 있는 1층 로비에 들어가면 곧 좁은 복도가 나타나 동선을 이끈다. 지하층에는 강당과 식당·성당이, 지상층에는 상담실·피정을 위한 방들이 놓였다. 7명의 수녀가 사는 집답지 않게 건물 규모가 큰 것(지하 2층, 지상 3층으로 총 건평이 340평이다)은 수도원에서 이뤄지는 각종 프로그램 때문이다. 특히 1990년부터 시작한 기도학교는 3년 전 틀을 재정비하면서 지금은 220여명이 수련하는 대규모가 되었다. 기도학교는 수도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한달에 두 차례씩 방문해 강의와 묵상을 통해 영성을 닦는 2년 과정의 프로그램. 기도학교를 담당하는 박영조 루시아 수녀는 “성령세미나처럼 순간적으로 신앙이 불타오르는 것보다는 5분이라도 매일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에서 기도를 하며 하느님과 나를 일치시키는 것이 목적”이라고 설명한다. 마음밭을 일구는 수행을 통해 자신 안의 영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루시아 수녀는 “우리 아이가 대학 간다고 행복해지겠는가. 평화는 마음이 가난해질 때 온다. 수녀들의 역할은 수련자가 목마를 때 물을 떠다주는 것 정도일 뿐, 수련자 스스로 삶과 기도를 통합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도학교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개신교 목사님도 기도학교를 찾아오기도 한다.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고자 한다면 누구라도 입학할 수 있다.”
가장 보배로운 지하층 공간
동굴에서든 헛간에서든 쉼 없이 기도하고 감사의 삶을 사는 것이 수도자의 본분이지만, 2003년 여름 번듯한 새 집을 얻은 것은 감출 수 없는 기쁨이었다. 이전엔 수도원이 따로 없어 빌라에 세들어 살았던 수녀님들은 돈이 부족해 설계비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는데도 정성껏 집을 지어준 설계자 김원(광장건축 대표)씨를 ‘은인’으로 생각할 정도다.
무엇보다 이 수도원의 묘미는 지하층에서 드러난다. 본래 단독주택이 있던 180여평 좁은 터에 340평 공간을 만들어내야 했던데다 이곳이 인왕산 자락 자연경관지구인 까닭에 높이를 12m 이상 올릴 수 없으니 지하층은 고육지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자칫 어둡고 침침했을 지하층은 단순한 지혜를 통해 이 집의 가장 보배로운 공간이 되었다. 설계자는 지하층 중간에 작은 정원을 내서 빛이 들어오도록 꾸몄다. 배롱나무 한 그루와 대나무를 심은 지하정원은 바람이 불면 대잎 비비는 소리가 나고, 여름이면 복숭아꽃보다 더 진한 백일홍이 피어 선경을 연출하게 된다.
지하 성당도 정원의 감동을 이어간다. 나무로 만든 문을 열면 십자가가 높은 곳이 아니라, 예배자보다 더 낮은 곳에 걸려 있다. 제단을 향할수록 점점 더 지하로 내려가게 된 성당 구조 덕분이다. 게다가 바닥이 온돌로 돼 있어 자리에 걸터앉으면 더더욱 십자가가 가깝게 느껴진다. 이곳에서만이라도 잠시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라고 가만가만히 속삭이는 듯하다. 따뜻한 온돌의 기운이 전해지면서 잠시 고요가 찾아온다. “내 모든 것을 벗으니 하느님의 옷으로 채워 있더라”라는 기도학교의 지향이 떠오른다.
설계자는 이 집에 노출콘크리트를 쓴 이유에 대해, 미니멀리즘이니 절제니 하는 수사적 대답 대신 “관리하기 편해서”라는 명쾌한 답을 내놓는다. 그러나 왠지 이 문답에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모더니즘의 명제를 떠올리는 것은 마뜩찮다. 오히려 “디자인은 정신을 따른다”고 주장하고 싶어진다. 이 집의 디자인이 따르고자 했던 것은 침묵과 단순함 속에서 깊은 영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수도회의 정신일 것이다.
이곳엔 번잡한 곳을 피해 고요한 장소를 찾아 기도하는 것을 뜻하는 ‘피정’을 위한 방들도 마련돼 있다. 방마다 화장실이 딸려 있는 피정의 집은 서울 시내에서 유일무이하다는 것도 수녀님들의 자랑이다. 수도원에서 정한 예약 절차를 거치면 이곳에서 머무를 수 있다(문의 02-737-7764).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 세속의 흐름과는 비껴 있되, 서울 도심 속에 열려 있는 전교가르멜 ‘영성의 집’. 도시 안에 잠겨 있으면서도 바깥과는 차단돼 있는 참으로 특이한 수도원. 삶의 무거운 짐을 잠깐 풀고 싶은 이들은 그곳으로 가보라. |
당신이 이왕 세속의 삶에서 멀어지기로 결심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외딴섬이나 깊은 산속에 사는 건 다행일는지 모른다. 떠들썩한 시장골목으로 창문이 나 있는 집에서 초연히 사는 일이 훨씬 더 단수 높은 내공이 필요할 것이므로. 수도원의 높은 담은 바깥 사람들에겐 안쓰러움을 주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겐 축복이다. 도시 안에 잠겨 있으면서도 바깥과는 차단돼 있는 곳.

지하의 정원. 크기는 작아도 지하층에 빛을 불어넣는 소중한 공간이다.(<책으로 만나는 세상> 제공)
연말연시를 맞아 들뜬 도심을 뒤로 하고 2003년 12월 사직동 주택가에 놓인 전교가르멜 수도원을 찾았다. 오르막 골목길을 걷다 쳐다보면 수도원은 종탑과 높은 담 때문에 섣불리 다가갈 수 없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전깃줄이 이리저리 얽힌 하늘 사이로 솟은 흰 종탑은 군더더기 살점을 모두 발라낸 뼈대 같은 인상이다. 옷깃을 여미며 초인종을 누른다. 깊은 산중 사찰로 들어가기까지 기다란 진입부가 있듯, 여기까지는 성소로 향하는 도입부이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풍경은 역전한다. 성곽처럼 정원과 3층 건물을 두른 담은 이 집을 주변과 잘라내면서도 사각형 구멍들이 빙 돌아가며 뚫려 있어 바깥 세상을 끌어들인다. 이웃의 벽돌집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웃과 격리된 곳이 아니라 세상의 노폐물을 여과시키는 장소란 뜻이다. 3층 건물이 두 채로 나뉘어 ㄱ자로 놓이며 시각적인 부담을 덜었고, 그 덕분에 자연스레 생긴 정원엔 작은 성모상과 소박한 나무의자가 놓였다.

수도원을 두른 담은 구멍이 뚫려 이웃의 풍경을 끌어들인다.(이주현 기자)

‘십자가가 저 아래로’. 온돌바닥에 앉게 만든 성당이 친근하다.(이주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