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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영화- 자란다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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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1-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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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에 대한 두려움과 동경, 쓸쓸함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P. J. 호건 감독의 <피터팬>

누구도 어른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어린 시절 만화나 동화책으로 몇번씩 만났을 <피터팬> 이야기는 그래서 매혹적이다. 이 ‘동화’는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는 그 길에서 어떻게 변해가는가’라는 모두의 고민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P. J. 호건 감독이 만든 영화 <피터팬>(1월16일 개봉)은 원작에 충실하지만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그리면서 ‘성장’에 대한 두려움과 동경, 쓸쓸함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피터팬>은 100년 전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 작가 제임스 매슈 배리(1860~1937)가 쓴 소설인데, 1904년 처음으로 연극무대에 올려져 큰 인기를 얻었다. 중세까지 대부분의 아이들은 도제 등으로 생계노동에 나서야 했지만, 이 시기에 중산층 이상 가정에서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교육받는 아이들이 훨씬 늘어났다.

영국 배우 제이슨 아이작스의 1인2역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임금 노동자로서 사회라는 거대한 공장의 부품으로 살아가야 할 어른이 되기를 피해 영원히 아이로 살아가는 소년의 이야기는 공감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 <뮤리엘의 웨딩>과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에서 여성의 사랑과 우정, 결혼과 인생에 대한 통찰을 보여줬던 P. J. 호건은 이 영화에서도 소녀 웬디의 성장에 초점을 맞춘다. 이 영화가 첫 작품인 12살 소녀 레이첼 허드 우드는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과 환한 웃음, 고집스럽고 도도하게 솟은 코, 성숙한 입술로 어린이와 어른을 가르는 문턱에 서서 다양한 가능성을 감추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냈다. 동생들과 해적놀이를 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좌중을 휘어잡는 이 영민한 소녀는 “이제 남동생들과 떠들썩하게 모험놀이나 하지 말고 숙녀로 교육받아야 한다”는 고모와 부모의 명령이 있던 날, 창문으로 날아들어온 피터팬과 함께 네버랜드로 떠난다. 웬디는 달빛을 타고 요정들 사이에서 춤추며 피터팬과 사랑에 빠지지만, 아이로 남고 싶은 피터팬은 ‘사랑’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피터팬에게 없는 그러한 ‘열정’을 웬디는 후크 선장에게서 발견한다.

이 영화는 후크를 ‘우스꽝스럽고 한심한 악당’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후크야말로 어른이 된다는 것의 두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고 갈고리 손의 잔인한 해적 두목이긴 하지만, 음악을 좋아하고 외로운 남자로 묘사된다. 모험을 하며 거칠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그는 상사와 이웃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소심한 은행원인 웬디 아버지의 ‘잃어버린 부분’이고, 그래서 두 남자는 영국 배우 제이슨 아이작스가 1인2역으로 연기한다. 후크는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초라한 인생을 더욱 씁쓸해하고, 그래서 아무런 두려움도 없는 꼬마 피터팬이 밉기만 하다. 그에게 “당신은 늙고 외롭다”는 피터팬의 한마디는 가장 치명적인 공격이다.

피터팬이 치러야 하는 대가

그렇지만 ‘성장’을 거부한 피터팬 역시 나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는 자유롭게 모험의 세계를 휘젓고 다니며 네버랜드의 계절까지 마음대로 하지만, 복잡한 사랑의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으며, 관계에서 오는 상처를 모르기에 오만하고 이기적이다. 지금까지 성인 배우들이 맡았던 피터팬 역할을 또래 소년으로는 처음으로 연기한 제레미 섬터는 순수하지만 뛰어난 싸움꾼이며 오만하기도 한 피터팬의 표정을 가지고 있다. 웬디를 사랑하지만 학교에 가고 결혼을 하고 회사에 가야 하는 어른은 절대로 되고 싶지 않아 사랑을 포기하는 그 역시 마음 한구석이 서늘하지 않을까?

웬디는 단호한 결정을 내리고 ‘성숙하기 위해’ 현실로 돌아온다. 자란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거운 짐을 지는 공포이며 ‘순수함’을 상실하는 슬픈 일이지만,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고 한 발짝씩 걸어가는 것 아닐까 피터팬을 잊지 않으면서도 그를 넘어서는 것.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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