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고구려를 단순한 한국의 역사로 가르치는 데서 오는 자민족 우월주의의 폐해와 관련된 문제도 생각해봐야 한다. 사실 다민족 국가였던 고구려를 우리 민족만의 훌륭한 역사로 가르침으로써 역사를 배운 학생들은 은연중 ‘우리 한민족이 최고’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러나 국경과 민족 개념이 약화되는 오늘날의 다원화 사회에서는 이런 배타적인 자민족 우월주의가 아닌 열린 민족주의, 포용적 민족주의가 필요하다. 고구려를 우리 민족만의 정복의 역사가 아닌 다른 민족과 ‘공존’하던 국가로 연구하고 가르친다면, 국민들은 앞으로의 개방적인 사회에 꼭 필요한 평화적 역사관을 갖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현실적 득과 실의 문제이다. 고구려사가 한국만의 것이 되면, 한-중 사이에 소모적 논쟁이 번지고, 외교분쟁까지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또한 만주 지역의 역사로 서로 연관성을 갖고 연구되어야 할 고구려와 다른 유목민족 국가의 역사를 각각 한국과 중국이 따로 연구하게 돼 효과적인 연구 수행이 어려워진다. 그러나 고구려사를 양국 공동의 역사로 인식하고 연구한다면 학문적 연계성이 높아짐을 물론, 외국에서 연구할 때 따르는 여러 현실적인 제약도 완화시킬 수 있다. 결국 우리 역사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또한 역사를 공유, 연구하게 됨에 따라 양국의 외교관계 및 국민 정서가 더 가까워지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유럽사에서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가 갈라지는 계기를 고대 프랑크 왕국의 삼분으로 보고 있다. 프랑크 왕국은 로마제국 멸망 이후 서유럽에 세워진 왕국인데, 특이한 점은 지배 민족은 지금의 독일을 이루는 게르만족이었지만, 국호는 프랑스가 계승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세 나라 중 프랑크 왕국이 자국만의 역사라고 내세우는 국가는 없다. 이들은 프랑크 왕국을 세 국가가 분화되기 이전의 ‘공동’의 역사로 인식하고 협력함으로써 역사 연구의 측면뿐 아니라 서로 민족이 다른 세 나라 국민의 연대에도 이바지하고 있다. 고구려사 논쟁은 중국 동북지방의 영유권과 조선족 문제 등 양국의 국익이 걸린 중차대한 사안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국의 학계나 외교관들은 서로 한치도 물러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21세기의 태평양 시대에 있어서 한국과 중국은 경제, 문화적 측면에서 함께 나아가야 할 동반자적 관계에 있다. 세계의 중심이 태평양이 될 것이라는 토인비의 말이 아니더라도 한국과 중국은 21세기를 이끌 지도자적 위치에 서있다. 그런 한국과 중국인만큼 고구려사에 대한 지금의 논란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끈다면 오히려 지금보다 양국의 관계가 더 돈독해질 수 있을 것이다.
| [ 칭찬과 아쉬움 ] 학생들의 노력이 돋보인 한주였다. 고구려 역사를 되짚어보고, 최근의 고구려사 논쟁까지 뒤져가며 글을 써보낸 학생들이 많았다. 단순한 자료 짜깁기에 그치지 않고,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의 논리를 세운 글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예컨대 글을 뽑는 일도 쉽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고구려에 대한 역사 왜곡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의 글보다 고구려 역사를 동아시아 역사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논지의 글이 논리력에서 앞섰다. 그 중에서도 중국의 국수주의와 한민족 민족주의를 동시에 경계한 시각의 글 중에서 뛰어난 글이 많았다. 이런 관점에 서 있는 수원시 영덕고 허혁 학생의 글과 광주 석산고 최정환 학생의 글을 놓고 오랫동안 고심했다.
‘예컨대’로 뽑힌 최정환 학생은 ‘열린 민족주의’의 시각으로 글을 썼다. 그의 글은 서론 → ‘자랑스러운’ 고구려 이데올로기 비판 → 고구려 역사에 대한 요약 → 고구려를 한·중 공동의 역사로 볼 때 생기는 긍정적 효과 → 유럽 ‘공동의 역사’인 프랑크 왕국의 예 → 결론으로 구성돼 있다. 요컨대, 고구려사를 한·중 공동의 역사로 인식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타당하고, 현실의 한·중 관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주장이다. 단순한 양비론, 기계적 중립이 아니라, 한·중의 민족주의를 동시에 비판함으로써 현실적 대안까지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훌륭한 글이다. 무엇보다 구체적인 고구려사, 프랑크 왕국의 예를 통해 ‘혼혈의 역사’로 논리를 끌어간 부분은 다른 학생의 글에 비해 돋보였다.
그러나 분량이 2500자를 넘어버렸다. 첫 번째 단락은 삭제해버려도 무방하다. 이미 출제자가 충분히 알고 있을 만한 내용을 굳이 반복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고구려사 논쟁의 현실적 효과를 다룬 마지막 단락도 너무 길다. 이미 본론에서 고구려사를 둘러싼 외교분쟁의 가능성 등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결론을 두세 문장 정도로 줄이면 오히려 깔끔한 글이 됐을 것이다.
수원시 영덕고 허혁 학생의 글은 “고구려사는 우리의 역사인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고구려 역사는 우리만의 역사는 아닌 것이다”라는 단락으로 요약된다. 다만 허혁 학생의 글은 최정환 학생의 글에 비해 좀더 중국의 역사 왜곡의 비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허혁 학생의 글은 흠 잡을 데 없이 깔끔했다. 그러나 논증의 구체성에서 최정환 학생의 글에 비해 조금 모자랐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비판한 관점에 서 있는 글 중에는 서울 대원외고 최종연 학생의 글이 가장 돋보였다. 그의 글은 풍부한 역사적 근거를 통해 고구려사가 한민족 역사의 일부임을 설명했다. 최근의 고구려사 논쟁을 꼼꼼히 찾아가며 공 들여 글을 쓴 흔적이 역력했다. 논리를 풀어가는 능력도 휼륭했다. 그러나 역사 논쟁의 다양한 측면을 아우르는 시각이 부족해 아쉬웠다. 또한 첫째, 둘째, 셋째로 이어지는 글투가 너무 딱딱해 풍부한 논거와 탄탄한 논리를 훼손하고 있다. 비록 일일이 언급하지는 못하지만, 최근의 논쟁을 뒤져가며 글을 써 보내준 모든 학생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