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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누더기가 되도록 입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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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1-0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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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룩의 창시자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제안하는 아주 특별한 스타일

며칠 전 후배 패션기자가 다음날 상견례가 있다고 하자, 쫓기듯 기획안을 쓰던 와중에도 동료 기자들이 모두 한마디씩 던졌다. “너 까만 구두랑 까만 스타킹 있어?” “비비안 빨간 구두는 안 되는 거 알지?” “보헤미안 같은 가방도 안 돼. 특히 그 비비안 가방.” “내 A라인 주름 스커트 빌려줄까?” 어쨌든 상견례 옷차림에 관해서라면 제아무리 스타일시한 여자라도 별수 없다는 얘기일 텐데, 한 가지 의아한 건 도대체 ‘비비안’이 뭔지 싶은 것이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패션을 공부하고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디자이너인데, 지금도 버젓이 살아서 26살 연하의 남편을 대동한 채 요란한 차림으로 댄스 파티장에도 가고 장난 삼아 다른 젊은 남자에게 추파도 보내는, 지구상에서 가장 괴팍하고 혈기왕성한 노파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1992년 엘리자베스 여왕을 방문하고자 켄싱턴 궁에 갈 때 속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채 속이 훤히 비치는 드레스를 입었던 사건인데, 당시 그녀의 나이는 51살이었다.

펑크룩의 창시자로 알려졌지만 비비안 웨스트우드 스타일을 한마디로 일축하자면 역시 ‘섹시’다. 생각해보면 옷보다 그 태생 자체가 도발이었다. 멋 부리기를 좋아했지만 평범한 가정주부이자 학교 선생에 지나지 않았던 여자가 어느 날 예술학교 학생과 바람이 나면서 느닷없이 디자이너로 변신하게 됐으니 말이다. 록 음악에 빠진 새파랗게 어린 남자와 바람난 여자는 펑크 기운이 막 싹트고 있는 1970년의 런던 킹스로드 음반 가게 한쪽에 ‘섹스’라는 부티크를 열었는데, 마침 그 남자친구가 전설적인 펑크 밴드였던 섹스 피스톨스의 매니저로 변신하는 바람에, 섹스 피스톨스로 하여금 ‘섹스’에 가서 옷을 사게 만들 수 있었다. 당연히 록과 펑크 음악에 심취해 있던 도시의 반항적인 젊은이들은 그 펑키한 아줌마가 만든 찢어진 티셔츠나 가죽옷 따위에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섹시한 옷을 만드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한 이 여자는 어찌된 일인지 날이 갈수록 과격해졌다. 한마디로 그녀는 예측불허였다. 컬렉션을 열 때마다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또 즐겁게 만드는 데 도가 튼 선수였다. 게다가 대중이 내 옷을 사든 말든 관심도 없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뿐이라는 이 여자는, 심지어 자기 말고는 다른 디자이너는 다 별 볼일 없다고 말할 만큼 오만하다. 그런데 인터뷰를 해보면 중구난방 쏟아내는 동문서답 속에 묘한 철학이 담겨 있다.

그래서 <바자> 기자들도 이 할망구라면 사족을 못 쓰는데, 얼마 전 런던에서 따온 현지 인터뷰를 보니 ‘스타일리시하다는 것’에 대한 생각도 남달랐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이렇게 말했다. “케이트 모스처럼 입는다고 케이트 모스처럼 보일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해.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지. 누가 시켜서도 안 되고 충고해서도 안 되지만, 한 가지 제안할 게 있긴 해. 한 가지만 사는 거야. 정말 좋은 것으로 딱 한 가지만. 그리고 그걸 두달 동안 계속 입는 거야. 더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말이야.”


김경 |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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