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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홍기유] “2004, 우리는 리바이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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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1-0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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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극 개혁을 위해 뛰는 사나이, 동숭아트센터 프로그래머 홍기유씨의 야심찬 기획

지난 12월4일. 대학로의 동숭아트센터에선 참 특이하고 낯선, 그러면서도 기특한 광경이 벌어졌다. 점점 술 동네로 변해가는 대학로가 ‘연극의 거리였었던’ 옛 영광을 되찾겠다는 비장한 각오, 딱 그것 하나만 공통점일 뿐 그 어느 것 하나 비슷하지 않은 각양각색의 극단과 작품들이 하나의 기획 아래 뭉친 ‘연극열전’이라는 프로젝트. 그 프로젝트의 출발을 알리는 고사(告祀)가 조용히, 그러나 힘 있게 치러진 것이다. 연극 팬들에게는 ‘모듬회’를 즐길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일 이 프로젝트는 ‘80년부터 2000년까지 2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공연됐던 작품 중 다시 보고 싶은 연극 15편을 동숭아트센터의 대극장과 소극장에서 1년 내내 만날 수 있는 프로젝트다.

“내가 감동한 작품만 권한다”

기라성 같은 연극인들, 그래서인지 절대 함께 뭉친 일은 없었던 연극인들이 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프로젝트 아래 쑥스럽게 모여들었다. 이런 기적은 대학로의 어르신들에게 기대하기엔 이미 ‘날 샌’ 일이었다. 똑똑한 청년 두 사람, 동숭아트센터의 프로그래머 홍기유와 영화감독으로 더 알려진 창작집단 수다의 괴수(?) 장진이 아니었으면 이런 축제는 시작되지 못했을 거다. 그 중 한 사람, 동숭아트센터의 프로그래머이자 극단 동숭아트센터의 젊은 대표인 홍기유를 만났다.


이 대장정의 기획 아이디어는 2002년 11월 동숭아트센터와 극단 차이무의 ‘생연극시리즈’라는 레퍼토리 개발공연을 시작할 때 얻었다고 한다. 좋은 작품이 갖고 있는 힘은 대단한 것이어서 재공연이 갖는 시너지 효과는 생각보다 크다는 걸 확인한 그는 ‘그렇다면 이런 프로젝트를 범극단적으로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고 젊은 혈기에 ‘사고’를 치게 된다. 좀 큰 사고라 혼자 감당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고 서울예전 연극과 89학번 동기로 막역한 사이이자 이런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카리스마가 필요한 프로젝트엔 적임자라고 생각한 장진 감독을 꼬셔서 의기투합한다. 개인적으로도 장진 감독을 좋아하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프로젝트에 그를 끌어들인 이유는 젊은 연극인이 주축이 돼야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전화번호부만한 두꺼운 공연연감을 붙잡고 머릴 맞대며 레퍼토리로 선정할 작품을 고르는 일부터 만만치가 않았다고 한다. 이걸 하자니 저게 아깝고 다 하자니 사정이 여의치 않고…. 그러다 두 사람은 한 가지 확실한 기준을 잡는다. 다른 사람이 좋다 했거나 언론이 좋다 한 걸 모두 잊고 그저 자신들의 스무살 때를 떠올렸다. 어느덧 삼십대의 대표 자리에 앉은 그들에게도 빛나는 스무살이 있었고 그때 그들은 지금보다 더 열정적으로 연극에 미쳐 있었다. 밥 먹는 건 잊어도 연극 보는 일은 마치 자신들이 그 공연을 보지 않으면 한국 연극계가 거꾸로 돌아가기라도 할 것 같은 심정으로 대학로의 연극들을 닥치는 대로 보던 시절이었다. 그때 머리와 가슴에 화인을 맞은 작품들! 그렇게 기준을 잡고 나니 고르기가 쉬웠다. 프로젝트의 프로그래머로서 자기가 감동한 작품이어야 남에게도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거다.

그렇게 그들이 고른 작품은 실험극장의 <에쿠우스>, 연우무대의 <한씨연대기>, 극단 목화의 <백마강달밤에> 등 열다섯편으로 추려졌다. 아무래도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기에 출연진도 ‘그때 그 사람’으로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현실적으로 무리가 따르는지라 <에쿠우스>의 조재현을 비롯한 몇 작품만 ‘오리지널’이고 대부분의 공연들은 새로운 얼굴들이 관객을 만나게 된다.

배우는 물론이고 연출도 마찬가지로 ‘쟁이’들은 평생 뽑히기만을 바라는 신세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가졌던들 판 벌려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옛날에야 뜻 있는 사람들끼리 주머닛돈 털어서 무대 올리고 그저 보러 와주면 고마워했다지만 이젠 영화에 비하면 ‘애들 장난’인 연극마저도 웬만큼 아쉽지 않게 공연 하나를 올리려면 ‘억’ 소리가 나는 세상이 됐다. 배우 우상전 말대로 이젠 연극도 프로듀서 시스템이 되야 한다. 더 이상 연극은 보는 사람만 보는 ‘고매한 예술’이어선 안 된다. 연극의 본질이 ‘하는 놈과 보는 놈’일진대 관객을 유치시킬 경쟁력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볼 때 홍기유 같은 똑똑한 프로그래머들은 작금의 위기에 놓인 한극 연극판엔 없어서는 안 될 보석 같은 인재다.

관객 유치를 위한 경쟁력을 이야기하는 홍기유 같은 똑똑한 프로그래머들은 위기에 놓인 한극 연극판엔 없어서는 안 될 보석 같은 인재다.
우리 연극이 발전하는 데 가장 절실한 요소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물었다. “첫째도 서비스! 둘째도 서비스! 셋째도 서비스!”라고 힘주어 말한다. 연극하는 것을 무슨 성직자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제일 한심하다는 거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는 이들은 바로 관객들인데 ‘오나라 오나라’ 해놓고 그 힘든 발걸음을 한 관객들에게 불편한 시설과 목에 깁스한 자세로 ‘예술을 보러왔느냐 그럼 예술을 보여주마’ 하는 태도는 너무나 잘못된 자세라는 거다. 극단 학전의 김민기 밑에서 기술직으로 오랜 수련을 쌓다가 만드는 일이 적성임을 깨닫고 처음 동숭아트센터의 관리팀으로 온 그는 처음에 하도 직원들한테 친절을 강조하다가 동료들로부터 호텔에서 왔냐는 비아냥도 들었다.

연극은 무조건 심각해야 된다는 거, 티켓 값에 비해 형편없는 공연과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연극을 한다는 거 자체에 무슨 대단한 의미를 두고 관객들로부터 존경받고자 목에 힘주는 일부 연극인들의 마인드는 개그맨 정준하의 말대로 ‘연극을 두번 죽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손가락에 힘을 주며 말했다. “관객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개혁이 없으면 말짱 꽝이죠.“

첫째도 서비스! 둘째도 서비스!

개혁 얘기가 나오니 그가 노사모 회원이란 사실이 생각나 요즘 ‘노통’이 여기저기서 얻어맞고 있는 걸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파병은 정말 잘못된 거죠. 하지만 그 외 여러 문제들은 근대화 이후 뿌리 깊은 모순들이 계속되는 것일 뿐, 노통 혼자 잘못해서 이렇게 된 것도 아닌데 뽑아줬다는 거 하나로 빚쟁이들처럼 왈왈대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거의 ‘노빠당’ 수준의 발언이었지만 일리가 없는 얘긴 아니지 싶다.

제일 힘든 건 뭐니뭐니해도 자금 압박이란다. 제약회사 다니는 친구를 거의 협박하다시피 해서 진행비 6천만원을 마련했지만 열다섯편의 연극을 끌고 가기엔 턱없는 돈이라 장진 감독과 그의 근황은 앵벌이 하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는 거다. 아! 어디 가나 그놈의 돈이 문제로구나. 하지만 돈이야말로 없다가도 있는 것. 홍기유 같은 인재는 한번 놓치면 또 언제 만날지 모르는 친구다.

마지막으로 꿈이 뭐냐 물었다. <조선일보>에는 기사 내지 말자고 직원들한테 큰소리 쳐보는 거란다. 애고 가슴 아파라. 하지만 난 그가 한국 연극의 개혁의 핵심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개혁이 성공하리라는 걸 믿는다. 그리고 그의 개혁이 성공하면 <조선일보> 문화란은 더 이상 기웃거리지 않아도 되는 날이 꼭 오리라는 것도 믿는다.

글 오지혜(영화배우)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orgi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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