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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최이철과 그의 동료들(1)] 기타 연주자로 스타 반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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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2-2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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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졸업 무렵에 연주 음반 내놓은 기타 신동… 김명곤 · 이장희와의 운명적 만남으로 대중 곁에

한국인 가운데 ‘불세출의 가수’라는 표현에 어울릴 만한 인물은?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라면 배호를, 그보다 젊은 사람이라면 조용필을 꼽을 것 같다. 그렇다면 ‘불세출의 기타리스트’는? 누군가 나에게 이런 곤욕스러운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단호하게 ‘최이철’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진/ 기타 신동 최이철이 ‘아이들’(Idol)이라는 그룹으로 음반을 냈던 시기의 모습.

중학생 때 데뷔… 미8군 쇼 이름 날려

최이철의 이름을 모르더라도 ‘사랑과평화’라는 그룹은 누구나 알 것이다. 1999년 이후 최이철은 사랑과평화를 떠난 상태이지만 20년 이상 최이철이라는 이름과 사랑과평화라는 이름은 동의어였다. 굳이 말하자면 사랑과평화는 한국 최장수 록 밴드다.


이장희가 작곡한 <한동안 뜸했었지>와 <장미>를 통해 최이철과 사랑과평화가 일반인에게 알려진 것은 1978~79년의 일이다. 그렇지만 직업적 음악인으로서 그의 경력은 1960년대 중·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2년생이니 아직 중학생일 때이다. 말하자면 그는 기타에 미쳐서 공부고 뭐고 집어치운 인물이다. 여기에는 그의 가계에 흐르는 ‘피’가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그의 작은아버지인 최상룡은 당대를 주름잡던 재즈 트럼펫 연주자로, 미8군 무대 ‘섬머 타임 쇼’에서 악단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최희준이 노래를 불렀던 곳’이라면 어떤 곳인지 감이 올 것이다.

아이들(Idol)<아이들과 함께 춤을/바람아>(성음,DG 가-30. 1971). 서울 나그네 <고고 생음악 1집: 해뜰 날/내 마음은 풍선>(오아시스, OL 1785, 1975). 김준/서울나그네 <휘파람 하이킹/생각합니다>(오아시스, OL 1867, 1976). 사랑과 평화 <1집: 한동안 뜸했었지/저바람>(서라벌, SRB-0009, 1978). 사랑과 평화 <2집: 얘기할 수 없어요/장미>(서라벌, SRB-0023, 1979)

때가 때이니만큼 최이철이 흘러들어간 곳도 미8군 무대에 쇼단을 공급하는 화양연예주식회사였고, 그는 미8군쇼의 ‘박활란 쇼’와 ‘데니스 쇼’에서 기타를 연주했다. 박활란이라면 윤복희와 더불어 ‘노래하는 천재소녀’ 같은 존재였다. 이렇게 미8군 쇼에서 ‘기타 신동’이란 평을 들은 최이철은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에 음반을 발표한다. ‘그룹사운드’계 내부에서는 실력을 인정받아도 음반을 녹음하는 일, 그것도 독집을 발표하는 일은 엄두를 내지 못하던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음반의 주인공은 한글로는 ‘아이들’, 영어로는 ‘Idol’이라고 적혀 있지만 여기 실린 음악은 ‘아이들’과도 ‘아이돌(우상)’과도 거리가 멀다. 160cm가 조금 넘고 아직 솜털이 뽀송뽀송한 십대의 동양인이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Jimi Hendrix Experience)의 ‘사이키델릭’인 와 에드윈 콜린스(Edwin Collins)의 ‘솔’인 를 연주하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물론 음반에는 당대의 히트 팝송과 더불어 <보리밭> 같은 가곡도 들어 있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연주해야 했던 한국 연주인들의 초상을 보는 기분이다(본인은 이 음반을 듣고 “부끄럽다”고 하고 재발매도 “하지 말아달라”고 말했지만 재발매를 추진 중이다).

그룹사운드 이합집산의 중심추 구실

‘아이들’을 조직해주고 후원해준 인물은 다름 아닌 김대환이었다. 요즘 ‘Love 米’라는 공익광고에 ‘타악의 명인’으로 소개되는 그분이고, ‘악사열전’의 2회에 소개한 바 있다. ‘아이들’은 단명했지만 최이철은 김대환에게 발탁되어 조용필과 더불어 ‘김트리오’를 결성한다. 김대환의 조련을 받아 최이철과 조용필은 기타와 베이스를 앞뒤로 맨 채 기타와 베이스를 번갈아 가며 연주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내려온다. 그때의 일에 대해 물어보면, 최이철과 조용필 모두 “엄청 무거웠다”고 증언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조용필이 “투 기타 시스템으로 같이 기타를 치고 번갈아 노래를 했던 최이철에게 나는 항상 실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했고 최이철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 서로 지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고 말한 사실이다. 조용필처럼 자존심이 강한 사람으로서 쉽게 하기 힘든 말이다.

그렇지만 최이철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김트리오를 그만두었다. 한국의 록그룹은 ‘퇴폐풍조 단속’으로 위축된 데다가 이런저런 이합집산이 많던 시절이었다. 최이철은 ‘영에이스’(Young Ace) ‘북극성’ ‘핫록’(Hot Rock) ‘서울나그네’ 등의 이름으로 고고클럽과 미8군 무대를 오가면서 활동했다. 이 시기 최이철의 사이드맨을 자처한 인물들이 있었는데, 뒤에 사랑과평화에 합류하게 되는 이남이(베이스)와 이철호(보컬·퍼커션)가 그들이었다. 물론 그사이에도 멤버들은 여러 차례 들락날락했다. 1972년께 최이철이 김트리오를 탈퇴한 뒤 이남이가 그 자리를 메운 일도 있고, 1973년께에는 신중현·이남이·최이철·김기표·문영배로 구성된 ‘올스타 팀’이 존재했던 일도 있다. 이남이는 ‘신중현과 엽전들’에 합류하여 1974년부터 1975년까지 대중음악계를 풍미했다가 유신정권의 철퇴를 맞았다.

사진/ 최근의 최이철.

그사이 최이철에게는 두번의 운명적 만남이 있었다. 하나는 1973년께 대구의 나이트클럽인 이브(Eve)에 연주하러 내려갔다가 ‘옆방에 하숙하고 있던’ 김명곤을 만나서 의기투합한 것이다. 이제는 고인이 된 김명곤은 1980년대 이후 <빙글빙글>(나미), <파란 나라>(혜은이), <환희>(정수라), <청바지 아가씨>(박상민) 등의 히트곡을 작곡하고 위 가수들을 포함하여 구창모·송대관·이문세·신형원·신승훈 등 다종다양한 가수들의 음반에 ‘김명곤 편곡’이라는 문구를 남긴 인물이다. 아마도 1980~90년대에 히트했던 ‘유행가’ 가운데 ‘들을 만하다’고 생각한 곡이면 편곡자가 김명곤일 확률이 40%는 넘을 것이다. ‘5천곡을 편곡했다’는, 기네스북에 남을 만한 기록을 남긴 김명곤에 대해서는 정말 ‘헌정음반’이라도 한장 만드는 게 후배들의 도리일 것이다.

“이철이가 스타 되는 것을 보고 싶다”

또 하나의 운명적 만남은 이장희와의 만남이다. 로얄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할 무렵 최이철의 그룹이 연주하는 것을 보러 온 이장희가 어느 날 “이철아, 네가 스타 되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한 것이다. 당시 이장희는 동아방송에서 <0시의 다이얼>의 인기 DJ로 활약 중이었고, <그건 너> <한잔의 추억>을 통해 가수로서 성가를 올릴 무렵이었다. 최이철의 그룹은 동아방송 스튜디오를 연습실처럼 사용하면서 드라마 음악을 만들고 가끔씩 라이브 연주도 들려주었다. 당시 동아방송 라디오를 열심히 들었던 사람이라면 최이철의 밴드가 블러드록(Bloodrock)의 <세이블 앤드 펄>(Sable and Pearl)을 연주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장희가 방송 도중 검은 지프차에 실려가는 황당한 일을 겪기도 했다. 이렇게 대마초 파동의 한파가 지나가고 활동 규제에 묶인 이장희가 음반 제작자로 변신하면서 최이철의 그룹 사랑과평화는 비로소 ‘대박’을 기록하게 된다. 사랑과평화에 대한 이야기는 새해에 이어서 하기로 하자.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연말연시’를 보낸 뒤에….

신현준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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