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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한국 10대만 유독 미성숙한가/ 성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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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2-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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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와 함께하는 예컨대 | 선거연령 하향조정은 필요한가]

성윤오/ 인천 부평고 2년

우리나라 언론에도 보도된 바 있는 안나 뤼어만은 19살의 나이에 당선된 독일 녹색당 의원이다. 아비투어(대학입학자격시험)에 갓 통과한 그녀는 지난해 독일 총선에서 녹색당의 높은 득표율에 힘입어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 의회 진출을 꿈꾼 건 비단 그녀만이 아니다. 독일의 정당들은 우리나라의 보수정당들과 달라 지역구 후보와 비례대표 후보가 당원들의 투표로써 이루어지는데, 당시 녹색당은 10여명의 10대 후보가 출마했다. 제1야당의 당수가 28살 여성(스웨덴)일 만큼 정치적 활동이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유럽 사회에서 10대의 정치적 활동 역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일러스트레이션 | 황은아
반면에 우리나라는 그와는 많이 다르다. 한국의 10대는 십수년이 넘도록 변하지 않은 ‘정신적 미숙아’ ‘주변인’ ‘질풍노도의 시기’ 등의 정형화된 어휘에 둘러싸여 있다. 그것은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지니는 만 18~19살의 청소년에게도 해당하는 것으로 이들 역시 이성적 주체로서의 사회 성원이 아닌 보호받아야 할 존재, 혹은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존재로 여겨진다. 한국에서는 이들에게 피선거권은 물론 선거권조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법적 성인과 다름없는 권리와 의무를 가지면서도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위헌적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사회 민주화와 문화적 향상 등으로 만 18~19살의 연령층에 정치적 판단 능력이 있다고 인정(1996년)하면서도 선거연령의 제한을 입법기관의 선택의 문제(2003년)로 미루고 있다. 책임을 넘겨받은 정치권에서도 선거권을 만 19살로 조정한 범국민정치개혁협의회의 개혁안에 부정적인 의사를 보이고 있어, 만 18살이 아닌 만 19살 이상의 선거법 개정조차도 사실상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반대 입장을 보이는 정당과 의원은 “19살 청년들은 사실 정치에 무관심한 이들이 대부분”이라는 정형화된 청소년 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논리를 들이밀고 있다.


만 20살이 되지 못한 청소년이 정치적 판단을 지니지 못했다는 주장은 근거 없는 ‘20살 성인 이데올로기’다. 선거연령을 20살 이상으로 제한한 나라는 모두 19개국이다. 민주주의와 경제가 모두 발달한 선진국은 여기에 포함돼 있지 않다. 20살 이상으로 제한한 국가는 대개 정치적으로 불안한 나라들이다. 한편 우리보다 경제규모와 교육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남아메리카나 동남아시아들은 선거연령을 18살 혹은 그 이하로 잡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청소년과 청년이 다른 나라에 비해 유별히 교육률과 정치적 판단력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선거권 하향조정에 반대하는 정당과 의원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는 힘들다.

이처럼 반대론자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도, 다른 민주적 국가와 비교할 때에도 납득할 수 없는 낡은 청소년 상을 논리로 삼는 것은 순전히 정치적 이권 때문이다. 기존의 정치권은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한 나라의 정책과 이념의 스펙트럼을 반영해야 할 선거가 지방 토호의 지역주의적이고 감정적인 선동으로 ‘깃발만 꽂으면 당선이 되는 선거’로 왜곡되고 오염돼왔다. 보수적인 정치권은 굴러들어온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각종 위원회와 언론 등의 기득권을 적절히 이용했다. 개혁 의지가 선명하게 들어나는 젊은 세대의 선거권을 박탈하는 일은 그 일의 일환으로 정치적 이해관계가 직접적으로 연계된 중요한 사안이었기에 법학자들과 시민사회단체의 숱한 비판에도 모르쇠로 일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말자하면 선거권 하향조정은 사실상 합리적 판단 가능성의 여부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견고하게 짜여진 수구적 헤게모니를 둘러싼 진흙탕 속 이권싸움의 문제다. - 성윤오/ 인천 부평고 2년

[ 칭찬과 아쉬움 ]

지난 대선에서 가장 인상적인 슬로건은 ‘노짱’도, ‘4번 타자 권영길’도 아니었다. 선거연령 인하를 주장하는 청소년들이 내건 ‘18, 18세’였다(아라비아 숫자를 우리말로 읽어보면 뜻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선거연령 낮추기’를 주제로 한 예컨대 논술글에서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18’을 외쳤다.

이번주에는 주제의 찬반을 대표하는 두 글을 놓고 고민했다. 인천 부평고 성윤오 학생의 글과 대원외고 정문기 학생의 글이었다. 지면이 허락한다면, 두 글을 모두 게재하고 싶을 만큼 빼어났다. 그러나 성윤오 학생의 글이 예컨대의 ‘여론’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어쩔 수 없이’ 그의 글을 선택했다.

성윤오 학생은 급진적 주장을 풍부한 근거로 뒷받침하는 능력이 있다. 그는 독일 녹색당의 19살 국회의원의 이야기로 글의 첫머리를 열었다. 현실의 사례를 통해 논쟁의 대립각을 날카롭게 세우면서 자신의 주장을 명확히 하는 효과적인 서술법이다. 이처럼 나는 ‘반대한다’가 아니라 ‘반대의 증거’를 내세우면, 글의 주목도와 신뢰도를 동시에 높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성윤오 학생의 ‘예컨대’는 스웨덴의 28살 당수 이야기 등으로 이어지며 주장을 뒷받침하는 풍부한 근거를 제공한다. 성윤오 학생의 글은 앙상한 주장이 아니라 풍부한 근거가 논증의 기본임을 보여주는 ‘예컨대’가 될 만하다.

본론에서는 선거연령 낮추기 문제를 넘어 ‘20살 성인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나아간다. 이 부분에서도 역시 구체성의 긴장을 잃지 않는다. 헌법재판소 판결의 내용을 꼼꼼히 짚어보면서 비판한다든가, 외국의 사례를 들어 20살 선거연령 제한이 오히려 예외적임을 논증한다든가 하는 부분이 구구절절 구체적이다. 다만 서둘러 ‘정치권의 이권’ 문제로 매듭을 짓다보니 결론의 ‘완결성’이 떨어져 아쉽다.

이 밖에도 평가자의 사고를 넘어서는 뛰어난 논지를 보여준 글들이 많았다. 청주 세광중 김원우 학생은 역사적 관점의 접근법을 택했다. 선거연령이 20살로 정해졌던 1948년과 2003년 현재의 여러 사회지표를 대비해 선거연령 낮추기를 주장한 것이다. 77%에서 1% 미만으로 떨어진 문맹률, 언론의 자유 확대 등이 그 근거다. ‘현실’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다른 글에 비해 독특한 접근법이 빛났다. 울산 제일고 황산백 학생의 글은 언제나 촌철살인의 문장으로 가득하다. 예컨대 “선거일은 (피로 얻은 정치적) 자유를 축복하는 날임과 동시에 다시 한번 자유를 확인하는 날이다”와 같은 문장이다. 게다가 “정치에 물드는 것은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다” 같은 역발상까지 더해진다. 다만 두 학생 모두 서두의 참신한 문제의식을 설득력 있는 결론으로 끌어가는 ‘지구력’이 부족했다.

앞서 언급한 정문기 학생의 글은 선거연령 낮추기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다. 정문기 학생은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선거권 확대가 중우정치로 빠져들 위험을 경고했다. 독특한 접근법을 풍부한 사례로 뒷받침한 점에서 ‘예컨대’로 뽑히고 남을 만한 글이었다. 다만 예로 든 나치의 등장 등 선거권 확대의 부정적인 사례와 현재의 선거연령 낮추기를 동일 선상에서 비교한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비슷한 현상을 비유할 때도 사례와 사례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에 대한 충분한 논증이 필요하다. 글의 분량이 예문에서 제시된 1800~2천자를 훨씬 넘긴 점도 아쉬웠다.

이 밖에 수원 영덕고 고은미 학생도 선거연령 낮추기에 반대하는 내용의 설득력 있는 글을 보내왔다. 비록 숫자는 적었지만, 선거연령 낮추기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글이 찬성하는 학생들의 글보다 높은 수준을 보여준 한 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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