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겹지만 거부할 수 없는 신파의 마력… 시청자의 눈물샘 자극하는 공식은 무엇일까
(사진/<가을동화>(맨위)와 <좋은걸 어떡해>.) 11월7일 종영을 앞두고 있는 미니시리즈 <가을동화>(한국방송)가 시청률 33%를 넘어서고 있다. <가을동화>는 14년간 오누이로 지내던 오빠 준서(송승헌 분)와 두살 터울의 여동생 은서(송혜교)가 우연히 친형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돼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 사랑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미 약혼자가 있는 준서의 상황과, 준서와 은서를 오누이로 보는 주위의 반대로 인해 둘은 헤어지기로 하고, 은서는 암으로 죽어간다. ‘선남선녀가 사랑한다 → 주변환경으로 인해 원치 않는 이별을 한다 → 여자는 죽어가면서 남자의 행복을 빈다’는 줄거리는 전형적인 신파물이다.
엄청난 예산을 들인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 발랄한 총각들의 섹시한 시트콤 <세친구>는 어디가고, 눈물 짜는 구시대적 사랑이야기가 지금에 와서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도식적인 이야기, 누선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볼 때 “이거 완전 신파 아냐” 하고 경멸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신파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올해에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별제: 홍도야 우지마라)가 리메이크돼 무대에 오르는 등 신파극은 끊길 듯 끊길 듯 질긴 생명력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멜로영화나 연속극에도 신파는 암암리에 그 가지를 뻗어놓은 상태다.
신파가 우리를 울리는 순간은 무엇인지, <가을동화>의 유명 대사와 함께 신파적 멜로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공식을 찾아본다.
돈때문에 생기는 이별의 비극
“나… 돈… 필요해요. 돈 정말 필요해. 얼마나 줄 수 있는데요. 얼마나요….”(은서)
예나 지금이나 가난이 죄. 귀한 집 도련님이기에 함께할 미래를 포기하는 가난한 집 여식의 가녀린 어깨나, 부잣집 영애를 데려와 고생시킬 수 없기에 눈물을 삼키면서 돌아서는 사나이의 뒷모습은 언제 어느 때나 심금을 울린다. 90년대 초 고현정을 일약 스타덤에 올린 드라마 <작별>(서울방송)에서도 이 공식을 볼 수 있었다. 부잣집 딸 고현정은 가난한 작곡가 최재성과 열애에 빠지지만 가난을 이유로 부모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힌다. 가난은 연애의 방해물이면서 비운의 줄거리를 만드는 가장 손쉬운 촉매제다.
신파에서 돈문제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는 것은 신파의 원조격인 <이수일과 심순애>만 봐도 알 수 있다. 문화평론가 강영희씨에 따르면 “신파가 유입된 시대는 돈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가치관과 정조로 대표되는 옛 가치관이 부딪치던 때였다. 그래서 ‘마음은 이수일에게 가고, 몸은 김중배에게 간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신파의 주된 특징 중 하나다”라는 것이다. 게다가 주인공 주변에는 돈을 밝히는 인물이 있어서 주인공에게 압박을 가한다. <가을동화>의 은서 오빠 종철이 그런 인물이다.
2 ‘곱게 죽는’ 비련의 여주인공
“루키미아입니다.” “네? 그거 암… 아니에요?”
남녀주인공 중에 하나는 꼭 불치병에 걸린다는 것은 신파의 공식. 예전에는 불치병으로 폐병, 지금은 골수암이나 백혈병이기 쉽다. 폐병은 문학소재로도 잘 쓰였는데, 하얀 손수건 위에 붉은 피를 적시는 창백한 미녀라는 이미지는 떨치기 어려운 유혹이었던 모양이다. 폐병이 더이상 불치병이 아니게 된 지금, 백혈병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문화방송의 98년작 수목드라마 <세상끝까지> 역시 시한부 인생의 공식을 충실히 따른 작품이다. 죽음을 앞둔 김희선은 류시원에게 사실을 토로하지 못하고, 눈이 먼 류시원에게 안구를 기증하고 죽는다. 암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하며, 시한부 인생은 한정된 시간 안에서의 뜨거운 사랑을 강요한다. 게다가 주인공이 불치병이라는 사실을 알고 쇼크먹고 있을 때 남자주인공은 “우린 역시 안 돼, 헤어지자.” 따위의 얼빠진 소리를 해대기 일쑤니, 주인공은 가일층 복장이 터진다. 여주인공이 얼마나 아픈가 까맣게 모르는 남자주인공이 언제쯤 사실을 알아차리고 충격받을까 지켜보는 아슬아슬한 재미도 시청자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볼 거리다.
3 부잣집 연적의 ‘딴지’
“상관없어요. 절대 안 놔줄테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나 준서씨 놓치지 않아요.”(유미)
건방지고 돈많은 도련님이나 얄미운 부잣집 아가씨는 신파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 부유한 사랑의 라이벌은 주는 것 없이 얄미운 존재다. 주인공의 선함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도 이들 라이벌은 극단적인 행동을 해서 보는 이의 원한을 한몸에 받아야 한다.
그런데 <가을동화>에서 이 라이벌은 변모된 양상을 보인다. 원래 팥쥐 역할을 해줘야 했던 윤신애(한채영)가 악역으로 두드러지지 못하면서, 유미가 준서를 뺏는 강력하고도 매력적인 팥쥐로 떠오른 것이다. 유미는 기존의 얄미운 부잣집 아가씨 상하고 조금 다르다. 비록 손목을 그어서 준서를 잡아놓으려는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기는 하지만, 유미 역시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미워할 수 없는 청승가련형 미녀다. 비련의 송혜교가 눈물을 떨어뜨리는 것만으로도 누선이 절로 자극되는데, 미스코리아 선 출신의 미인 한나나까지 눈물바람을 부른다. 가냘퍼서 더 얄미운 라이벌 유미는 이 드라마의 또다른 힘이다.
4. 기존 가치관에 고통받는 주인공
“친남매였던 애들이야. 나 도저히 인정할 수 없어. 그런 거 남들에게 알릴 자신 없어.”(윤 박사)
신파의 세계에서는 보다 기성시대에 속하는 가치관이 상황을 지배한다. <가을동화>에서 윤 박사는 은서와 준서가 어릴 적에 같이 자랐다는 것만으로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압박한다. <좋은 걸 어떡해>(한국방송)에서 여남숙(김자옥)은 이혼녀라는 이유만으로 박수경(정선경)을 구박하며, 똑똑한 직장여성인 수경은 고분고분 새벽 네시에 일어나 시댁 밥을 짓고 출근을 한다. 일찍이 이런 가치관을 깨고 팔자를 고쳐보겠다고 하다가 눈총받은 여자는 <배반의 장미>(문화방송)의 서지영(정혜리)이 먼저였다.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두고 재가를 원하자 재혼 상대자가 되는 재벌가의 시어머니로부터 지독한 눈총을 받는다. 모질게 생긴 시댁식구들의 구박은 대개 “아가씨는 아가씨에 맞는 상대를 고르도록 해”라는 차가운 말 한마디로 대표된다.
이렇게 ‘기존 가치관에 고통받는 주인공’이라는 플롯은 신파극 초기부터 비롯된 것이다. 일제시대 유입된 신파는 구시대적 가치관과 신조류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반영했다. 이는 당시 신파극 향유자들의 심적 상태이기도 했다. 이것은 현대에 와서 ‘나 때문이 아닌, 상황 때문에’ 불합리하게 고통받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이용된다. 시청자보다 조금 더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를 보여주는 것은 “저런 답답한 사람들 봤나”라며 시청자들의 공분을 자아내기에 편리한 것이다.
5 운명에 알아서 긴다
“우리 잘못 하는 거야. 우리끼리 죄 사해준다 그래도 안 되는 거야.”(은서)
신파의 주인공들은 욕심을 내서 앞길을 개척하기보다는 주변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문화평론가 이영미씨는 “신파 주인공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운명에 순응한다는 점이다”라고 말한다. 특히 이런 정서의 질감이 트로트와 유사하다고 이영미씨는 분석한다. 자기가 알아서 기는 것이 신파적 주인공의 특징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수일과 심순애>의 순애가 누가 김중배에게 가라고 머리채를 끄당긴 것도 아닌 데 수일을 버리고 뒤돌아서서 눈물을 흘리는 식이다. 근래의 예로써 서울방송의 <불꽃>에서 지현(이영애)은 방송작가로서 뜰 절호의 기회를 잡았음에도 시댁이 반대하자 너무도 쉽게 뜻을 꺾는다. 현실의 힘에 비해 자기의 힘이 너무도 약하다는 것을 주인공이 지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주인공의 태도는 앞으로 올 비극이 주인공보다는 주변인물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시나리오라는 것을 분명하게 한다.
가끔 신파의 주인공들이 운명에 저항하고 팔자를 고쳐보려고 하지만 그 시도는 번번이 무위로 끝난다. 1966년 발표된 <초우>에서 자동차 정비공 철수(신성일)는 대사의 딸 영희(문희)를 꼬드겨보고자 하지만 영희는 그저 대사 집의 가정부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신파의 주인공들은 구시대적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에 속해 있으므로 운명에 저항하려고 해도 태생부터 불행으로 치닫게 되어 있다.
이외에도 <가을동화> 대사 중에서 유명해진 신파조 대사들이 몇개 있다. “오빠 미국 꼭 가야 돼? 나하고 육개월만 살아주면 안 돼요?”(은서) “너 사랑해서 나 정말 행복해. 너 없이 사는 행복 나 생각해본 적 없다.”(준서)가 그런 것들이다. 이런 신파조 대사들은 ‘<가을동화> 고스톱 버전’ 등으로 패러디되어 사랑받기도 한다. “너 얼마냐? 도대체 얼마냐구? 내가 너 사면 될 거 아냐! (너 잃은 돈이 얼마냐? 내가 너 꿔주면 될 거 아냐!)”라는 태석의 대사와 “준서씨 하고 싶은 말 나 알아. 날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고…. 여기서 그만두는 게 나한테도 훨씬 이득인 것도 알아요(준서씨 하고 싶은 말 나 알아. 내 돈 다 따고 이제 가려는 거 알고…. 여기서 판 걷는 게 나한테도 훨씬 이득인 것도 알아요)”라는 유미의 대사 등이다.
하나같이 과장된 상황에서 나오는 뻔한 대사지만, 신파의 매력은 바로 차마 하기 어려운 닭살스러운 대사를 대신 말해준다는 점에 있다. 내가 현실에서는 하지 못했던 말, 내가 겪고 싶었던 비련의 삶을 대신 살아주는 것이다. 누군들 보내지 말았어야 할 사람 하나 등에 진 기억이 없을까. 차가운 가을밤, 사연 많은 당신을 대신해서 신파가 울어준다.
이민아 기자
mi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