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 수능이 도입된 지 10년이 지났다. 우리의 지옥은 여전하다. 10년 동안의 유형은 정형화되고, 주요 대학들은 내신 반영비율을 축소하면서, 수능에는 무소불위의 힘이 주어졌고, 이에 따라 수능은 또 다른 암기대상으로 전락했다. 그때그때 밝혀진 문제들을 고쳐도, 세월이 흐르면 또다시 문제는 드러난다. 임시방편으론 교육개혁이 요원하다. 수능이건, 학력고사건, 예비교사건 100년을 가지 못하고 몇년 주기로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백년대계에 몇년을 주기로 땜질을 해야 하는 제도는 버려야 한다. 과거의 성공에 집착해 과거만 고수하는 것은 각주구검일 뿐이다. 그럼에도 수능유지론자들은 수능이란 선발고사로 지식경쟁력이 생기고, 자유경쟁이 이뤄진다며, ‘못 먹어도 고(Go)’란다. 이 무슨 어리석음인가. 과연 수능이 교육 붕괴의 주범인가? 우린 초점을 잘못 잡고 있다. 사람들이 수능을 집중 분석하고 매달려 다시 암기 무대로 만든 건, 바로 우리의 대학서열화다. 사실 왜 우리가 수능에 목숨 걸고, 심지어 진짜 목숨을 버리기까지 한단 말인가? 몇 시간의 시험이 남은 평생의 계급을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등한 경쟁체제’라는 시뮬라크르를 만든 ‘천사’들은, 위에서 그들을 관리하고, 그들의 ‘카르마’에 이른 이들에게 자신들의 자릴 내어준다. ‘평등한 경쟁에서의 승패’로 지배와 피지배를 정당화시키며, 지배와 피지배란 불평등한 현실을 평등이란 가상 실재로 바꾼 이 ‘악마’들은 그들의 ‘영원한 제국’을 꿈꾸기에 이 서열화를 유지시킨다. 물론 경쟁은 우리의 경쟁력과 생산성을 높인다. 하지만 수능은 과연 ‘자유경쟁’인가? 그것은 획일경쟁일 뿐이다. 똑같은 규칙이 아닌, 똑같은 방식의 경쟁. 그리고 그 뒤엔 승자와 패자로 나뉘어 공정한 자유경쟁이 불가능한 불공정 경쟁. 오히려 수능을 자격고사화하고 대학을 평준화하여 학벌의 승과 패 자체를 없애버린다면, 그것이 외려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계속해서 공정히 경쟁할 수 있는 ‘자유경쟁체제’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계급사회가 아닌 실질적 기회균등의 사회에서 최대의 순기능을 발휘한다는 걸 상기해야 한다. 단순히 수능을 자격고사화하기만 한다면, 자연히 주요 대학들은 본고사를 부활시킬 것이다. 그렇기에 일당독재보다 더 심한 스카이(SKY) 독재를 타파하고, 계급사회를 민주사회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대학평준화까지 같이 도입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학벌’ 자체가 없어질 것이고, 자연히 입시지옥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 자격고사는 결코 어느 고등학생들처럼 아침 7시부터 밤 11시 반까지 학교에 묶여 있을 필요를 결코 내주지 않을 것이며, 우리 교육은 진일보할 것이다. 백범 김구는 한국이 아름다운 나라가 되길 바란다 하였다. 600점의 제국, 숫자의 제국이 아닌, 모두가 잘 살 수는 없어도 모두가 존중받는 그런 나라, 몇 시간을 위하지 않고 평생을 위한 교육을 해주는 사회. 그것이 지금보다 더 아름다울 것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우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이 ‘악마들의 제국’을 파괴해야 한다.
| [ 칭찬과 아쉬움 ] 수능시험 개혁을 주제로 한 예컨대 논술에서 대전 보문고 유성민 학생의 글이 뽑혔다. 그의 글은 수능의 문제점을 수능시험에 국한시키지 않고, 교육체계 전반의 개혁으로 확장시켜 논술했다는 점에서 돋보였다.
유성민 학생은 수능시험뿐 아니라 학력고사, 예비고사와 본고사 모두 “임시방편”으로 입시지옥을 없애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수능이 교육 붕괴의 주범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문제를 재설정한다. 수능의 이면에 숨은 대학 서열화가 교육의 진정한 문제라는 지적이다. 근본적인 교육개혁의 대안으로는 대학 평준화를 제시한다.
유성민 학생 글의 논리구조는 비교적 탄탄하다. 그러나 가끔씩 지나친 인용이 글의 흐름을 방해하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본론 부분의 천사와 카르마를 인용한 부분이 그렇다. 글의 첫 부분에서 제시한 인용 텍스트를 다시 짚는 것도 논술의 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유성민 학생의 글에서 이 부분은 앞뒤 부분과 논리적 연관성이 부족해 사족처럼 보인다. 오히려 “수능이 교육 붕괴의 주범인가”라고 던진 질문에 대한 논증으로 곧바로 들어가는 편이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유성민 학생은 다양한 텍스트를 글에 끌어들이는 능력이 있다. 평소 풍부한 독서량과 능숙한 글쓰기 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유성민 학생의 인용과 비유는 때때로 자기 만족적인 수준으로 떨어진다. ‘비유’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글을 읽는 사람의 이해를 높이기 위한 것인 이상, 비유는 최대한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좋은 비유는 권위 있는 텍스트를 인용하는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누구나 알고 있는 글귀를 적절한 맥락에서 끌어올 때 인용은 더욱 빛나는 법이다.
충남 예산고 이찬우 학생은 수능 점수를 개인의 능력을 나타내는 ‘신호체계’에 비유했다. 그리고 이 신호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수능시험이 문제가 있음에도 개혁되지 않는 이유는 각자의 ‘이기심’으로 보고 있다. 이찬우 학생의 글은 깔끔한 문장과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어져 있다. 그러나 제도의 문제점을 다루는 글에서, 문제의 원인을 사람들의 ‘심성’으로, 개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깊이 있는 논술 방법은 아니다. 그리고 글의 서론과 결론이 본론 부분과 조금 겉돌고 있다. 서론 부분의 신호체계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가 너무 길고, 주제와 논리적 연관성이 떨어진다. 결론 부분에서는 ‘새로운 신호체제’으로 전환을 주장하는데, 그 논거가 부족해서인지 주장의 목소리만 높다.
이번주는 아쉬움만 남은 한 주였다. 주제가 너무 광범위해서인지 글을 보내온 학생 수가 많지 않았다. 보내온 논술글에서도 입시제도라는 일반론에 대한 비판만 있을 뿐, ‘수능’이라는 특수성에 대한 비판은 부족했다. 일반론을 넘어 특수성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사고와 구체적인 비판 논거가 필요하다. 특수성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일반론은 공허하다. 그래서 아쉽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