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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연극- 우리에게도 명연극이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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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2-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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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숭아트센터에서 연중 릴레이로 펼치는 ‘연극열전’… 신화로 남은 작품 15편으로 대학로 부활 예고

“지난날 우리 연극은 창작 활성화를 꾀하였으나/ 초연만으로 그치고 말아 좋은 작품이 소멸되고 말았고/ 공연예술계의 발전을 위한 정책적인 대안으로 지원금 제도는 있으나/ 작품은 더 높은 완성도에 미치지 못하였고/ 사전 준비 기간의 절대적인 부족함으로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기획을 펼칠 수 없었고/ 타 장르와 비교해 연극은 다소 무겁고 어렵다는 선입견 속에 관객들의 외면을 받게 되었습니다.”

박승화 기자

처절한 반성으로 시작된 시파티 풍경

12월4일 ‘연극열전’ 시파티(작품을 올리기 전 연습 시작에 앞서 여는 파티, ‘쫑파티’의 반대말)가 열린 서울 대학로의 동숭아트센터에선 처절한 반성문 같은 ‘축문’이 낭송됐다. 잠시, 주위가 고요해졌다. 이어 김옥랑 동숭아트센터 대표는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복을 내려주고, 극장으로 향하는 관객들의 발걸음이 1년 내내 끊이지 않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쇠퇴하는 연극의 발전을 비는 축문의 비장감은 이내 농담 섞인 기원으로 바뀌었다. 사회자가 “고사 돈의 액수만큼 흥행에 비례한다는 징크스가 있다”며 너스레를 떨자, <한씨연대기>의 연출자 김석만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는 돼지머리 고사상 앞에 넙죽 절한 뒤 마이크를 잡았다. “이번 ‘연극열전’에선, 예술성보다는 흥행성이 돋보이길 바랍니다. 공연은 강북에서 하지만 강남 아줌마도 많이 오면 좋겠습니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공연된 작품 중 15편을 골라 2004년 1~12월에 동숭아트센터 동숭홀과 소극장에서 연중 릴레이 공연을 펼치는 ‘연극열전’은 기대감과 절박감이 교차하는 행사다. 오태석·이윤택·김광보·박근형·조광화 등 이름난 연출가들과 조재현·안석환·윤소정·오지혜·박해일 등 유명배우들, 연희단거리패·목화·미추·연우무대·실험극장 등 내로라 하는 극단이 총출동하는 한국 최고의 무대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관객 점유율 70%를 훌쩍 넘겨버린 영화나 수십억원을 쏟아붓는 대형 오페라·뮤지컬에 비해 여전히 ‘배고픔’을 벗어나지 못한 연극인들이 대학로에 바람을 일으켜보자는 고민스런 몸부림이기도 하다.

그때 그 연극이 다시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공연 당시 화제를 모았던 연극 열전 참가작들의 공연 포스터.
본래 ‘연극열전’은 두 ‘대학로 키드’가 머리를 맞대면서 시작됐다. 서울예술대학 89학번 동기인 홍기유(극단 동숭아트센터 대표)씨와 장진(수다 대표·영화감독·연극연출가)씨는 시도때도 없이 대학로를 뒹굴던 ‘스무살 시절 그 연극’이 그리웠다. “우리가 한번 무대에 올려보자. 썰렁한 대학로에 불을 한번 지펴보자!” 김옥랑 동숭아트센터 대표도 곧 의기투합했다. 여성영화제처럼 매년 동숭아트센터에서 열리던 행사도 내년만큼은 쉬기로 했다. 동숭아트센터에 오로지 연극만을 채우기로 한 것이다. 결의를 다진 이들은 ‘과학적 마케팅’을 시도했다. 관객 500명을 상대로 ‘다시 보고 싶은 연극’을 설문조사한 결과 뽑힌 작품들과 작품평가·흥행에서 좋은 성적을 올린 화제작들을 추린 것이다. “이번 기회에 장기 공연되는 롱런 레퍼토리를 개발해보겠다”는 동숭아트센터의 욕심도 한몫했다.

설문조사 토대로 롱런 레퍼토리 개발

‘연극열전’의 스타트는 소극장에서 막을 올리는 <한씨연대기>가 끊는다. 1985년 초연된 <한씨연대기>는 황석영의 소설을 무대로 옮긴 것으로 평양 출신의 엘리트 의사 한영덕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다루며 분단이 개인에게 미치는 문제를 조명한 작품이다. 당시 <한씨연대기>는 김석만씨에게는 백상예술대상 신인연출상을, ‘새내기 배우’ 문성근씨에게는 신인연기상을 안겨주었다. 김석만 교수는 “<한씨연대기>를 공연할 즈음, 연우무대는 ‘영업정지 6개월’의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 못하고 암울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고 회고한다. 당시엔 작품을 무대에 올리려면 공연윤리위원회에 대본을 제출하고 ‘심의필’을 얻은 뒤 다시 시청에 가서 ‘심의필’ 대본을 제출해 공연 허가를 얻어야 했다. 만약 ‘심의필’ 대본과 실제 공연 대본이 다를 경우 공연을 정지시킬 정도로 검열과 통제가 심한 상황이었다. <한씨연대기>에 앞서 6개월 공연 정지를 당했던 연우무대는 <한씨연대기>를 준비하면서 단원들과 세미나 등을 통해 지혜를 모았고 결국 침체를 떨치고 일어섰다.

극단 미추의 <허삼관 매혈기>(왼쪽)는 비극을 해학으로 승화시킨다. 주인공 알런 역을 맡은 이들은 ‘시대의 배우’로 만든 화제작 <에쿠우스>(오른쪽).
1월 말에 상연될 <에쿠우스> 또한 기대되는 작품이다. 영국 극작가 피터 셰퍼가 쓴 <에쿠우스>는 여섯 마리 말의 눈을 찔러 실명하게 만든 소년 알런과 그를 치료하는 의사 다이사트의 대화를 통해 ‘정상 세계’의 모순을 들추는 작품이다. 1975년 극단 실험극장의 전용 소극장 개관 기념작으로 무대에 오른 <에쿠우스>(당시 김영렬 연출)는 소극장으로서는 처음으로 1천회 이상을 무대에 올렸고 관객 수도 1만명을 돌파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이후 10번의 정기공연 동안 연출가들은 김영렬에서 김아라·김성노·한태숙으로 이어지며 꾸준히 관객을 불러모았고, 주인공 알런 역을 맡았던 송승환·최재성·최민식·조재현 등은 깊은 인상을 남기며 큰 배우로 약진했다. 이번 공연엔 김광보씨가 연출하고 1991년 5대 알런 역을 맡았던 조재현씨가 출연한다. 39살에 17살 소년을 맡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느냐는 질문에 조씨는 “젊었을 때 노인 역을 많이 맡았었다. 그게 지금보다 오히려 더 과장이 많았던 것 같다. 소년 역이라고 해서 탱탱한 피부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그 때 그 배우들, 조재현의 17살 연기

90년대를 대표하는 젊은 연출가 조광화씨를 화려하게 데뷔시킨 <남자충동>은 1997년 조광화 스스로 대본을 쓰고 연출한 작품이다. 알 파치노 콤플렉스에 빠진 조직폭력배 장정이 폭력으로 가정을 지키려다 결국 가족을 불행으로 몰고 간다는 내용으로 ‘강한 남자’를 강요하는 세상에 대해 ‘강함’의 의미를 반문한다. 장정 역은 안석환, 억척스런 어머니 역은 황정민이 맡아 탄탄한 연기를 펼친다.

1979년 초연된 극단 76단의 <관객모독>은 신촌의 시장통에 숨어 있던 76소극장을 세상의 관심 속으로 끌어낸 작품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극작가 페터 한트케가 전통극 형식에 대항하며 1966년 발표한 <관객모독>은 유신 말기 암흑기를 보내던 한국의 관객들에게 짜릿한 희열을 안겨주었다. 관객에게 쌍스러운 욕설을 퍼붓기도 하고 물세례까지 서슴지 않던 <관객모독>은 점점 형식을 가다듬어 세련미를 띠게 되었다. <관객모독>에 출연하는 배우 정재진씨는 “예전엔 그악스럽게 관객을 모독했다면 이번엔 점잖게 모독하겠다”고 다짐했다.

2004년 여름 ‘연극열전’의 허리를 잇는 <나잇 머더>는 윤소정·오지혜 모녀를 한 무대에서 만날 수 있는 자리다. 미국의 작가 마샤 노먼의 원작을 우리 정서에 맞게 재구성한 <나잇 머더>는 외딴 시골 어느 집안에서 벌어지는 벌어지는 특이한 상황을 그린 작품이다. 어느 날 딸은 엄마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자살할 거라고 말한다. 처음엔 믿지 않던 엄마는 점점 공포에 사로잡히며 딸을 만류하지만, 결국 딸은 죽음의 길로 접어들고 관객들은 비통한 카타르시스를 겪게 된다. 모녀가 놓인 복잡하고도 섬세한 심리,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을 권리 등에 대해 생각의 여지를 남긴다. 특히 이번 공연은 배우 명계남씨가 모처럼 연출을 맡아 관심을 모으고 있다.

명계남의 연출 데뷔… 황정민 · 박해일도 무대에

<나잇 머더>의 뒤를 잇는 작품은 <불 좀 꺼주세요>(이만희 작). 초연과 비교할 때 작가를 제외하고 연출·배우가 모두 바뀌었다. 20만명의 관객을 동원해 90년대 최고의 흥행작으로 기록된 <불 좀 꺼주세요>는 관객들의 설문에서도 ‘다시 보고 싶은 연극’ 수위에 꼽혔다. 국회의원 강창영과 그의 첫사랑 박정숙이 만나 주인공들의 분신을 통해 과거의 삶과 사랑을 돌아보며 규칙과 관습 대신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찾아보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백마강 달밤에>는 전통의 현대화에 대한 해답을 내린 작품이다.
오태석이 연출하는 <백마강 달밤에>는 1993년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개관 기념작으로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금강이 굽이굽이 돌아가는 충청남도 시골 마을에서 열리는 대동제를 뼈대 삼아 전통의 현대화에 대한 모범답안을 내린 작품이다. 극단 목화의 간판 스타 황정민이 출연해 목화 특유의 연기를 맛깔스럽게 해낸다. 특히 목화의 기획자로 이번 공연에서도 기획을 맡은 일본인 기무라 노리코는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본 연극이 <백마강 달밤에>였다. 연극에 무척 감동을 받았지만 당시엔 내가 목화에서 일할 줄은 꿈도 꾸지 못했다”며 <백마강 달밤에>와 맺은 인연을 소개했다.

<오구>의 신명 굿판에 <이발사 박봉구>도

가을로 접어들면, 부서질 듯하면서도 쉽게 꺾이지는 않을 것 같은 매력적인 청년 박해일을 무대에서 만날 수 있다. 99년 초연된 <청춘예찬>은 연출가 박근형과 배우 박해일을 세상에 알린 작품이다. 박근형은 일상의 이야기를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바꿔내 ‘박근형표 연극’을 확립했고, 박해일은 세상의 어둠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불량청춘을 연기하며 감동을 주었다. 술주정꾼 아버지와 아버지가 뿌린 염산에 눈이 먼 어머니, 4년 동안 고등학교 2학년에 머물고 있는 가망 없는 아들, 그를 사랑하는 다방 레지. 더없이 비루한 인물들이 펼치는 더없이 남루한 이야기에 연출가는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는다.

‘연극열전’에선 그동안 만날 수 없었던 명작을 뼈대로 하면서, 그동안 꾸준히 공연됐던 작품도 곁들였다.

춤꾼 하용부씨에 따르면 “연희단거리패가 평생 밥먹고 살게 해주는 연극” <오구>도 무대에 올라 10년 동안 이어온 신명의 굿판을 보여준다. 지난해와 올해 좋은 성적을 거둔 <이발사 박봉구>도 초대돼 ‘연극열전’의 대미를 장식한다. 스타일리스트라는 신종 직업의 등장 앞에 무력한 이발사 박봉구의 극단적인 열정을 보여준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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