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용필, 최헌, 윤수일 그리고 안치행
이 곡들은 1975년 12월 ‘대마초 파동’의 한파가 몰아친 뒤 김 빠진 맥주 같던 대중음악계에 ‘흥겨움’을 다시 가져온 곡들이다. 이른바 ‘트로트 고고’라고 불리던 음악에 저항감을 느낀 사람이라도, 막상 저 음악을 들으면 자기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이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서론이 길었는데, 지금 언급한 가수 세명과 노래 세곡 모두 오늘의 주인공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는 안치행(1942~)이라는 인물이다. 안치행은 <오동잎>과 <사랑만은 않겠어요>를 직접 작곡했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편곡을 맡아 ‘1977년의 대박’에 모두 관여한 셈이 되었다. 간단히 말해 세곡이 수록된 음반은 모두 ‘안치행 편곡집’이었다. 작곡가로서 그의 ‘안타’ 행진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최헌의 <앵두> <세월>, 윤수일의 <갈대> <유랑자>, 서유석의 <구름 나그네>, 김 트리오의 <연안 부두>…. 1980년대 이후에도 그의 히트곡은 계속되었다. 주현미의 <울면서 후회하네>, 윤민호의 <연상의 여인>, 박남정의 <아! 바람이여>, 나훈아의 <영동 부르스>, 희자매(인순이)의 <실버들>, 문희옥의 <천방지축> 등등.
감각적 기타 사운드로 독창적 음악 선보여 하지만 그의 이력을 훑어보면 안치행이 ‘유명 그룹사운드의 기타 연주자’였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가 이끌었던 영사운드는 1972∼75년에 명동과 소공동의 ‘생음악 살롱’인 포시즌스와 오비스 캐빈을 중심으로 연주하면서 소리소문 없이 젊은층의 사랑을 받은 그룹이었다. 영사운드는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요란한 굉음이 한풀 꺾인 직후 차분하면서도 건전한 ‘젊은 소리’를 들려주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영사운드의 전신이 1967∼71년에 실버코인스(Silver Coins)라는 이름으로 미8군 무대에서 ‘패키지 쇼’를 하던 존재라는 것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미8군 쇼의 기획을 담당하던 회사 중 하나인 화양(和陽)의 연습실에서 안치행의 연주를 지켜본 사람은 안치행을 “웨스 몽고메리(Wes Montgomery) 스타일의 재즈 기타리스트”라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몇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당시 음악을 제대로 하려는 젊은이들이 모여들던 ‘이인성 음악학원’에서 조교를 하던 안치행의 모습을 본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안치행과 최헌이 운명적으로 만난 것도 이곳이었다(이인성은 당대 최고의 ‘기타 솔리스트’였고, 1980년대에는 전자음악가로 변신하였다).
영사운드는 독특한 존재였다. 당시 그룹사운드 대부분이 팝송을 원곡 그대로 연주하거나 번안곡으로 만족하던 무렵, 창작곡 그것도 자작곡을 많이 연주했기 때문이다. 안치행이 만들고 영사운드가 연주한 <등불>과 <달무리>는 ‘그룹사운드 히트곡’의 표본 같은 곡이었다. 이 곡들은 작곡도 작곡이려니와 복선(더블 스트링) 주법을 적절히 이용한 안치행의 감각적인 기타 사운드와 젊은 남자들의 하모니가 어우러진 신선하고 독창적 음악이었다. 안치행이 그룹사운드계의 인물로서는 이례적으로 가사도(전라남도 진도 옆의 조그만 섬) 출신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그의 음악적 ‘전향’을 어떻게 볼 것인가
<달무리>의 경우 동양방송의 <신가요 박람회>라는 프로그램에서 입상했다는 흥미로운 이력도 따라 다닌다. 응모를 통해 당선된 작사(작사가는 김주명)에 작곡가 세명이 경합해서 1위를 결정하는 식이었는데, 당시 새로운 가요를 보급하기 위한 방송국의 행태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이게 연이 되어 영사운드는 동양방송의 프로그램 <오라 오라 오라>의 전속 밴드를 맡았다. 1973~74년에 방영된 <오라 오라 오라>는 ‘쇼 연출의 귀재’라는 평을 들었던 조용호 PD가 제작·연출을 맡고 파릇파릇한 시절의 서유석과 양희은이 MC를 보던 프로그램으로, 당시 도회적 감성의 젊은이들에게 ‘컬트’의 대상이었다.
안치행이 연주인에서 제작자로 인생의 궤도를 수정한 것은 1975년께 영사운드의 두 번째 음반을 발표한 다음이다(영사운드는 그 뒤 보컬 유영춘을 주축으로 활동을 계속한다). ‘히식스’ ‘신중현과 더멘’ ‘검은나비’를 거치면서 이합집산하던 최헌, 김기표, 이태현과 더불어 시작한 사업이 안타프로덕션이다. 그룹사운드 출신의 음악인이 전문 프로덕션을 차린 것은 아마도 이게 처음일 것이다. 그리고 안타는 이름대로 ‘히트’를 계속하면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작곡 스타일이 변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신현준 | 대중음악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