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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불’과 ‘칼’의 정면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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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1-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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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메>와 <단적비연수> 동시개봉… 압도하는 폭발음 vs 누선 자극하는 판타지

(사진/<리베라메> )
좀 거창하게 한국영화계를 은하계에 비유한다면 11월11일은 대규모 혜성이 정면충돌하는 날이다. 충돌의 규모는 돈으로 환산하면 100억원대다. 각각 총제작비 50억원에 달하는 <리베라 메>와 <단적비연수>가 같은 날 나란히 극장 간판에 걸린다. 올 들어서만도 <비천무> <공동경비구역JSA> <싸이렌>이 개봉하는 등 대작영화의 등장이 부쩍 늘어나기는 했지만, 정면충돌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두 영화의 간판으로 스크럼을 짠 개봉관들에 포위될 관객에게 두 영화의 경쟁은 벌써부터 흥미진진한 관심거리다. 통상 대박 기준선을 훌쩍 넘기는 서울 관객 80만명이 넘어야 겨우 적자를 면하는 제작사로서는 사활을 건 싸움이기도 하다.

헐리우드 화재영화도 우습다

서울 개봉관 34개(<단적비연수>)와 25개(<리베라 메>)를 잡아 ‘더 빨리’, ‘더 많이’를 외치는 두 영화는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거무튀튀한 얼굴로 나온다는 점을 빼고는 다행스럽게도 관객에게 전혀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우선 ‘파이어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리베라 메>(양윤호 감독)는 ‘불’이라는 소재만으로 시각적 긴장을 극대화시키는 작품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압도적인 폭발음으로 관객을 제압한다. 방화범으로 12년간 복역한 희수(차승원)가 교도소 문을 걸어나온 지 몇초 뒤 교도소에 거대한 불길이 올라온다. 얼마 뒤 아파트 단지와 주유소 등 곳곳에서 대형화재참사가 벌어진다. 그 사이 소방관 상우(최민수)는 괴전화를 받고, 부모의 학대로 부상해 병원에 입원한 한 무리의 어린이들과 화재장소 사이의 연관성이 드러난다. 이때부터 불로 세상을 구원하려는 방화범과 불에서 세상을 구원하려는 소방관 사이의 추격전이 벌어진다.

“니가 숨을 쉬면 나도 쉴 수 있다”라는 대사에 맞춤인 ‘용감’전문 배우 최민수나, 사이코의 눈빛을 그럴싸하게 표현한 차승원, 확실히 성장한 느낌을 주는 유지태 등 화려한 진용도 돋보이지만 역시 이 영화의 주인공은 불이다. LPG가스 6천kg, 화약 500파운드, 특수오일 2천ℓ를 쏟아부어 만들어낸 불의 스펙터클은 금방이라도 객석으로 옮겨 붙을 만큼 강렬하다. 특히 주유소 전체와 병원 옥상의 대형 입간판이 폭발하면서 무너져 내리는 장면은 압권이다.

제작진이 할리우드의 화재영화보다 한발 앞섰다고 자랑할 만한 이유는 이 모두가 미니어처나 컴퓨터그래픽이 아닌 실제 건물에, 실제로 붙인 불이라는 데 있다. 부산시의 지원으로 철거예정인 아파트와 병원을 ‘세트’로 구한 제작진은 배우들의 다양한 액션과 10여발의 폭파가 연달아 일어나는 거대한 불길을 자유자재로 연출할 수 있었다. 실제 폭파가 불가능한 주유소 화재장면은 수영만 요트장에 4억원을 들여 실물크기의 세트를 만들어 ‘한큐’에 날려버리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왕 붙이는 불, 조작하기는 쉽지만 가짜 티가 나는 할리우드식 가스불이 아닌 이글거리는 불을 만들기 위한 노력도 가상하다. 유독가스를 내뿜는 듯 살벌한 불을 개발하기 위해 제작진은 석달 동안 ‘연불술사’가 돼 온갖 기름을 배합해가며 특수합성오일을 제조하는 데 성공했다.

많은 대작영화가 그렇듯 인물들이 엮어내는 드라마 구조는 볼거리의 긴장감에 비해 허술하지만 몸을 사리지 않는 배우들의 연기도 감탄할 만하다. 초기의 몇 장면을 빼고는 불길에서 뛰어내리고 온몸에 불을 붙이는 위험한 연기를 모든 배우들이 직접 해냈다. “관객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직접 액션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며 먼저 나선 최민수는 구멍 뚫린 아파트 바닥으로 미끄러지는 사고를 당하고, 차승원과의 격투장면에서 이마와 코를 20바늘 이상 꿰매는 부상을 입었다.

먼 옛날, 엇갈린 네 사람의 운명

(사진/<단적비연수> )
<리베라 메>가 볼거리로 압도하면서 남성들의 선굵은 액션을 무기로 삼는 데 비해 <단적비연수>(박제현 감독)는 기구한 인연으로 얽힌 남녀간의 사랑으로 관객의 누선을 자극한다. 이 영화의 독특한 점은 성인관객을 대상으로 거의 처음 시도되는 판타지물이라는 점이다. 내용에서는 거의 연관성이 없지만 전편인 <은행나무 침대>에서 황 장군과 미단 공주가 등장하는 시대를 발판 삼아 이들의 전생이 될 법한 ‘어느 먼 옛날’이 작품의 배경이 된다. 빗살무늬 토기보다 편리해 보이는 토기들과 등장인들이 사용하는 무기, 종이의 제작 등을 고등학교 국사 지식에 끼워맞춰 청동기나 철기쯤으로 추정해보는 것은 자유지만 정령과 마법, 검과 기사 등 국사 교과서보다는 판타지 소설과 비슷한 점이 더 많다.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신산(神山) 아래 사는 매족은 신산의 노여움을 사 수백년 동안 메마른 땅에서 고통받으며 살아왔다. 매족의 족장인 수(이미숙)는 원수인 화산족을 멸하고 매족을 흥하게 하는 천검을 얻기 위해, 화산족 남자의 씨로 낳은 딸 비(최진실)를 제물로 바치려고 한다. 그러나 비는 몸에 칼이 꽂히기 직전 아버지 로에 의해 구출된다. 들판을 떠돌며 성장하다가 소녀 시절 화산족 마을에 맡겨진 비는 단(김석훈), 적(설경구), 연(김윤진)과 어울리며 자란다. 나이가 들면서 비는 단을 사랑하게 되고 왕족인 연은 족장감인 적을 사랑하지만 적이 비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서 네 사람의 운명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안개로 감싸인 숲 속의 작은 부락. 웅장한 제단에서 벌어지는 제의, 바닷가 기암괴석에서 퍼져가는 구슬픈 고둥피리 소리, “네가 부담스러워”라는 대사가 외국말처럼 들릴 정도로 먼 옛날을 상상하게 하는 등장인물들의 차림새. <단적비연수>는 여느 영화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낯선 무대로 관객을 안내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중심은 신비한 모험을 떠나는 기사와 악의 무리들, 구출을 기다리는 공주가 아니다. 서로 등을 보면서 엇갈리기만 하는 네 남녀간의 사랑, 눈물샘을 콕콕 찌르는 비극적인 정통 로맨스다.

특히 돋보이는 것은 상대방의 등 뒤에서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적과 연의 비련이다. 무모함과 외고집으로 따질 때 황 장군의 전생임이 확실한 적은 신산의 제물이 돼야 하는 비를 구하기 위해 부족을 배신하고 친구들을 죽인다. 그러나 그의 이기적인 행동은 사악하기보다 처연하다. 자신을 거부하는 비에게 “끝까지 옆에서 너를 지킬 것”이라고 외치는 설경구의 눈빛은 <박하사탕> 철로 장면의 그것처럼 처절하고 강렬하다. 연은 부족을 버리고 자신을 버린 적을 돕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매족과 싸운다. 부족을 살리기 위해 눈물을 그렁거리며 결국 적에게 화살을 겨누는 연의 모습은 우아하면서도 당당한 여전사의 전형이다.

독특한 의상이 볼거리

단, 적, 비, 연보다는 중심에서 떨어져 있지만 수의 카리스마는 이야기를 받쳐주는 큰 축이다. 시나리오 단계 때부터 낙점을 받은 배우 이미숙은 싸늘한 시선과 위압적인 말투로 부족과 자신의 야심을 위해 자식에게 칼을 대는 비정한 여인을 능수능란하게 연기한다. 오히려 아쉬운 것은 운명의 희생양이 되는 커플 단과 비. 김석훈은 거친 칼싸움으로 단련된 무사라기엔 오동통한 살집이 너무 도드라진다. 10여년 동안 드라마와 CF에 쉼없이 등장하면서 한 집안 식구보다 더 익숙해진 최진실이 연기하는 비는 작품이 의도하는 바에 비해 신비감이 떨어진다.

장대한 풍광이나 극적인 칼싸움 등 압도적인 볼거리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반면 세트나 소품, 의상 등에서 아기자기한 볼거리는 많다. 특히 패션 디자이너 박윤정씨가 제작한 600여벌의 독특한 의상은 영화의 상상력이 가장 많이 발휘된 부분이다. 마, 가죽, 모피, 대나무 등 천연소재로 만든 의상과 금속 장신구들은 투박하면서도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여전사이면서 공주인 연의 의상이 두드러지는 데 그중 한벌은 700개가 넘는 좁쌀만한 크기의 구슬을 하나하나 꿰어 만들었다고 한다. 경남 산청군 황매산 자락에 지어진 5천여평 규모의 화산족 부락 세트는 영화 테마파크로 보존돼 일반인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김은형 기자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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