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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추리닝 패션 ‘눈에 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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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2-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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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트레이닝복 바람으로 거리 활보하는 여성에게 남성들이 섹시미를 느끼는 까닭

왜 키아누 리브스는 ‘매트릭스’라는 가상 현실에서 바닥을 청소할 정도로 긴 맞춤형 더스터 코트와 변태 같은 옷을 입고 최후의 결전에 임하는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복수에 눈이 먼 우마 서먼이 왜 암살복으로 ‘노란 츄리닝’을 선택했는지 너무나 잘 알 것 같았다.

◁ <킬빌>
예전에 자기가 속해 있던 여성 갱 조직의 멤버들을 응징하느라 이 도시 저 도시 바쁘게 돌아다니는 우마 서먼의 작업복은 ‘노란 츄리닝’과 특별 주문한 노란색 아식스(Asics) 스니커즈다. 개인적으로는 서먼이 어린 딸이 보는 앞에서 그 엄마를 무지막지하게 죽이는 장면에서 입었던 룩(리바이스 청바지와 독수리가 장식된 카우보이 부츠, 그리고 장딴지 위에 걸쳐진 가죽 칼집)이 더 멋졌지만, 어쨌든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룩은 바로 이 ‘노란 츄리닝’이다. 그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시피 쿵후 영화의 고전인 <사망유희>에서 이소룡이 입었던 것으로, 말하자면 타란티노는 주인공의 옷으로 이소룡에 대한 오마주를 표현한 것이다.

요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캐릭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값비싼 옷들 때문에 은근히 짜증이 나 있었다(특히 레스토랑에서 서빙하는 가난한 고학생인 주제에 명품으로 휘감고 다니는, 드라마 <회전목마>의 장서희 분). 하지만 우마 서먼이 영화 속에서 입었던 옷들은 캐릭터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녀는 7년 만에 뇌사 상태에서 깨어나 오직 복수만을 생각하는 암살자다. 서먼의 멋들어진 의상은 복수를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모든 걸 그때그때 손에 넣는 여자다운 옷차림이었다. 노란색 츄리닝 같은 경우, 노란색이 암살자에게는 가당치도 않는 색이라는 점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서먼이 누구로부터도 숨지 않는, 두려울 것 없는 여장부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런데 영화는 그렇다 치고, 요즘 젊은 여자애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츄리닝 바람으로 거리를 배회하는 이유는? 어떤 일간지에 실린 분석 기사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웰빙 스타일과 그에 따른 요가 열풍은 한낱 운동복 차림을 패션의 중심 트렌드에 우뚝 세워놓았다.” 웬 웰빙? 웬 요가? 내가 보기에 요즘 유행하는 ‘츄리닝 룩’은 웰빙이나 요가와 전혀 무관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적어도 핵심은 아니다.

내가 알기로 2~3년 전 LA에서 시작된 이 룩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한 디자이너가 만든 200달러짜리 트레이닝복을 입고 뻔뻔하게 쇼핑센터에도 가고 행사장에도 갔더랬는데, 그 모습을 포착한 파파라치들의 사진이 이런저런 패션지에 실리면서 유행을 타게 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몸매 좋은 것들이 몸에 착 달라붙는 멋진 줄무늬 트레이닝복 세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은 당연히 아주 근사해 보였다. 게다가 왠지 남의 이목 같은 건 별로 신경쓰지 않는 부류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요’는 섹시해 보인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제니퍼 로페즈가 J.Lo라는 울트라 섹시 트레이닝복 브랜드를 만들었을까?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 남자들은 왜 이런 복장을 섹시하다고 생각할까? 몸 전체의 실루엣을 드러내기 때문에? 16살에 ‘선수계’에 입문하여 이제 슬슬 은퇴를 준비하고 있는 스물일곱살 된 내 남자 후배의 말에 의하면, 무엇보다 그 복장은 ‘벗기기 쉽다’는 연상 때문에 남자들에게 대단한 성적 판타지를 제공한다고 한다. 그 녀석은 이렇게 말했다. “마음만 먹으면 한번 터치에 모든 것을 벗길 수 있잖아.” 짐승 같은 녀석!

김경 |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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