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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징집 거부도 하나의 정치적 견해/ 김호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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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2-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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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와 함께하는 예컨대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정당한가]

김호빈/ 인천 부평고 2학년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는 원론적 차원에서 개인의 양심과 신념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보편적 민주주의의 원리와 현실적 차원에서의 안보 위기를 거론하는 현실론의 미묘한 대립점에 놓여 있다. 중요한 것은 양심적 병역 거부의 원론적 정당성이 아니다. 이스라엘 같은 준 전시 상태의 국가에서도 부분적으로 허용되는 양심적 병역 거부가 어째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만 애국심을 망각한 일부 이기적인 젊은이들의 행위로 매도되는가 하는 것이다. 즉, 순수한 정치적 담론이어야 할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가 국가권력 혹은 사회권력이라는 기득권적 정당성을 확보한 주류세력에 의해 어떻게 변질되었느냐를 따져보아야 한다. 마치 냉전시대의 기득권 세력이 반공 이데올로기를 통해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개인의 양심과 신념을 전체주의적 틀 속에서 뭉뚱그렸던 과거의 역사처럼 지금의 한국사회 역시 ‘애국심’이라는 무소불위의 수사를 통해 개인의 양심과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 황은아
전상국은 소설 <우상의 눈물>에서 ‘기표’라고 하는 비이성적 폭력의 상징 인물이 담임 선생님과 ‘형우’라는 합법적 폭력의 위선에 의해 어떻게 파괴되는가 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이성적인 위선을 통해 진실을 왜곡하는 합법적 권력의 폭력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양심적 병역 거부는 한국 사회의 합법적 권력에 의해 어떻게 왜곡되고 은폐되었는가. 반세기 동안 이어진 반공 이데올로기는 독재정권의 유지 수단으로, 때로는 체제적 우월성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햇볕정책과 같은 평화적인 정책과 남북간 화해 무드의 조성으로 이전의 광신적인 반공의식이 많이 퇴색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반북의식이 팽배함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군사 문제이다. 주변 4강의 군사 대국화 움직임이나 북핵 문제와 같은 민감한 국제 정세를 감안하더라도 수십년간 군축에 대한 어떠한 실질적인 논의나 노력이 이행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동안의 남북 정세로 미루어볼 때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당장에 모병제로의 전환과 같은 일은 비현실적이다 해도 적어도 비효율적인 60만 대군의 징병 체제를 효율적으로 개선하려는 실질적인 노력이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군축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나 정부 차원의 노력이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보수세력의 적대적 반북 논리에 있을 것이다. 남북간 화해 무드라는 진실을 외면하고 끊임없이 전쟁 가능성을 확산시켜 안보 위기를 조장하는 그들의 논리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애국심이 결핍된 매국노로 왜곡하는 것이다. 기호학자인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에 따르면 실체의 복사본인 ‘시뮬라시옹’은 실체보다 과장되고 왜곡되어 특정 집단의 자의적인 해석 도구로 쓰일 수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보수세력은 끊임없는 위기 상황과 안보 불안을 국민들에게 환기시키기 위해 북한과의 작은 마찰을 국가적 위기 상황으로 왜곡시켜 해석한다는 것이다.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가 개인의 신념 차원이 아니라 안보 불안 상황에서 병역의 의무를 거부하는 이기적 개인의 문제로 변질된 것 역시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진정한 애국심이란 무엇일까. 애국심을 비단 한 나라를 사랑하고 아끼는 차원의 문제로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한민국이 소중하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라면 같은 민족인 북한 역시 애국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나아가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 대한 사랑도 필요할 것이다. 하물며 평화주의와 비폭력을 통해 모든 존재론적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단순히 이기적 개인으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너의 견해에 반대한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 견해 때문에 탄압받는다면 나는 당신이 그 견해를 지킬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울 것이다.” 똘레랑스 정신의 무한한 포용성을 함의한 볼테르의 이상과 같은 문구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가 내포하고 있는 사회적인 갈등의 해결점을 모색해볼 수 있다. 양심적 병역 거부는 전쟁이라는 물리적 폭력에 대한 인간적 양심의 차원에서 국가의 강제 징집을 거부하는 하나의 정치적 견해로서 찬반을 떠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마땅히 존중받을 의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고질적인 반공 이데올로기와 근거 없는 안보 위기의식 조장을 통해 이러한 순수한 정치적 견해를 말살시키고 그것의 사회적 공론화마저 무색케 하는 보수세력의 비관용적 논리 앞에서 볼테르가 말한 똘레랑스 정신은 여전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칭찬과 아쉬움 ]

주제가 녹록지 않았던 듯하다. 강철민 이병의 부대 복귀 거부를 계기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한 견해를 묻는 예컨대 논술에 들어온 글들은 원론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학생들의 의견은 ‘악법은 법이 아니다’파와 ‘악법도 법이다’파로 확연히 나뉘어졌다. 그러나 두 견해 모두 파편적 사실에 매몰되거나 당위적인 주장에 머물렀을 뿐, 구체적 사실에 근거해 논술을 해내지는 못했다. 한결같이 주제에서 제시된 강철민씨의 병역거부 선언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 있어 더욱 아쉬웠다.

이번주에는 학생들이 논술에서 자주 쓰는 글쓰기 방법인 ‘인용’ 또는 ‘비유’의 장·단점을 보여줄 수 있는 글을 뽑았다. 부평고 김호빈 학생은 합법적 폭력의 위선을 드러내기 위해 <우상의 눈물>이라는 소설을 인용했다. 병역거부와 <우상의 눈물>을 잇는 고리는 ‘합법적 폭력’이다. 병역거부자들과 <우상의 눈물>의 ‘기표’라는 인물이 합법적 폭력의 희생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두 경우를 잇는 연결고리가 단단하지 못하다. 과연 ‘기표’라고 하는 비이성적 폭력의 상징 인물과 비폭력 평화주의자인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동일 선상에서 비유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논술을 하다보면 인용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가 많다. 인용이 자신의 지식의 폭을 보여주고 글에 권위를 실어주는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용에는 함정이 있다. 기본적으로 인용을 하려면, 주장의 논지와 인용 대상 사이의 호응관계가 완벽해야 한다. 섣부른 인용은 지식의 과시로 보이고 지면만 낭비해 감점 요인이 되기 십상이다. 또한 제대로 인용하고 비유하려면 글쓰기 훈련도 잘 돼 있어야 한다. 다양한 텍스트에 대한 꼼꼼한 이해, 단단한 연결고리, 핵심을 짚는 요약 능력 등이 필요하다. 완벽한 인용이 아니라면, 인용을 자제하는 것이 오히려 좋다. 김호빈 학생의 경우, 인용한 텍스트에 대한 요약도 부족해 비유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 결점이 있다.

그러나 김호빈 학생의 글은 병역거부 반대론자들의 핵심 논거인 ‘애국심’에 대한 구체적 비판이 담겨 있다. 한국 현대사를 통해 애국심이 어떻게 기득권 세력의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어 왔는지를 서술한다. 결론 부분에서는 ‘시뮬라시옹’이나 ‘똘레랑스’를 인용해 글의 설득력을 적절히 높이고 있다.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이라면 대부분의 문장이 중문으로 연결돼 논지 이해를 훼손하고 있다는 점이다. 같은 내용이라도 ‘~고’ ‘~지만’으로 연결하기보다 한 문장씩 끊어 쓰면 훨씬 논지를 파악하기 쉬운 글이 된다.

유일여고 신지아 학생도 인용의 함정에 빠졌다. 신지아 학생의 글은 “법은 사람들의 양심을 베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에머슨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멋진 인용이 글에서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의 글은 전제는 병역거부에 대한 찬성 논지로, 본론은 반대 논리로, 결론은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순서로 이어진다. 특히 에머슨의 말을 인용하며 찬성 흐름으로 이어질 것 같은 흐름의 글이 반대 논리로 전환하는 과정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처럼 글의 논지가 일관되지 못하다보니 아쉽게도 좋은 인용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아무리 좋은 문구가 생각나더라도 자신의 논지에 맞지 않다면 과감하게 삭제해버리는 편이 설득력 있는 논술글을 쓰는데 도움이 된다.

인천고 최진헌 학생의 글은 병역거부를 인정해야 할 근거를 가장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분단국가였던 서독의 경우 병역거부를 인정했지만 국방에는 이상이 없었다는 점, 국제인권위원회가 병역거부를 중요한 인권문제로 보고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한 것이다. 그의 글은 예컨대로 뽑혀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지만, ‘인용’의 사례를 제시하기 위해 김호빈 학생의 글을 골랐다. 울산제일고 황산백 학생도 가지런한 단문이 단단한 논리로 이어지는 휼륭한 글을 보내왔다.

반대 논리를 담은 글 중에는 재수생 정문기 학생의 글이 돋보였다. 그는 전형적인 병역거부 반대논리를 차분한 글에 담아 보내주었다. 병역거부 인정이 특정 종교의 특혜가 된다는 점, 국가와 국민 사이의 계약 위반이라는 것 등이 그의 반대 논거다. 병역거부자를 무임 승차자에 비유하며 제대병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군의 사기 저하를 우려한 점도 글의 맥락에서는 적절한 비유였다. 그러나 반대 논거를 잘 정리한 수준에서 그쳤을 뿐, 자신의 논리로 다시 한번 재구성한 수준에는 이르지 못해 아쉬웠다.

전체적으로 보면, 글에 따라 ‘양심’의 문제만을 파고들거나 ‘애국심’만을 비판하거나, ‘사회적 약속의 파기’만을 우려하는 등 학생들의 글의 논점 자체가 종합적이지 못했다. 원칙적인 양심의 자유와 현실적인 안보 이데올로기가 어떤 관계로 얽혀 있는지를 통합적인 관점에서 밝히는 글이 없어 칭찬보다는 아쉬움이 앞서는 한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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