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단정치 않은 스타일의 빛과 그림자… 낡고 너저분한 옷차림에도 등급이 있다
대학 졸업 뒤 한번도 만나지 못한 옛날 남자친구에게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너 혹시 요즘 약하니?” 여기서 ‘약’이라 함은 당연히 ‘Drug’을 의미하는 것일 텐데, 아무래도 당시 내 옷차림이 영화 <트레인 스포팅>에 나오는, 그 가망없는 청춘들 꼴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나는 그런 옷차림으로 출퇴근도 했는데, 어느 날 사장은 딱 한번 내게 이렇게 묻었다. “설마 그 쓰레기 같은 옷을 돈 주고 산 건 아니지?”
서른이 넘으면서 많이 온건해지긴 했지만 지금도 나의 옷차림은 여전히 단정치 못하다. 그런데 그게 꼭 나이 문제만은 아닌 모양이다. 얼마 전 내 쇼핑 길에 따라나선 한 남자 후배는 내가 골라내는 옷마다 미간까지 찌푸리며 연신 고개를 흔들더니, 나중에는 지쳤는지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누나는 왜 만날 헌옷 같은 새옷만 사는 거지? 혹시 부랑아처럼 보이고 싶은 거야?” ‘약물 중독자’에 비하면 양반이지만, 혼기 놓친 서른 초반의 여자에게 ‘부랑아 차림’이라니, 어디 될 법이나 한 얘기인가?
그러고 보니 한때 나의 뮤즈는 코트니 러브였던 것 같다. 록그룹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의 여자이며, 실험적인 밴드 더 홀의 리더이며, ‘강하고 막 나가는 여자’의 대명사로 통하는, 그 타락한 여장부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연애에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는 혹시 ‘강하고 막 나가는 여자’처럼 보이는 내 옷차림 때문일까? ‘막 나가는 여자’처럼 보이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남자들이 꼬이긴 하는데, ‘강해 보이기’ 때문에 어느 남자도 끝까지 나라는 여자를 돌보지 않는 거다! 이제야 알겠다. 패션지에서 아무리 씹어대도 청담동 아가씨들이 왜 그토록 죽어라 앙증맞은 블랙 리틀 원피스에 파스텔톤의 숄을 두르고 리본 달린 구두만을 고집하는지….
그렇다면 나는 왜 남자들에게 결코 환영받지 못할, 낡고 너저분한 옷차림만을 편애하는가 솔직히 나도 모르겠다. 그냥 좋다. 다만 벼룩시장이나 보세가게에서 고른 듯한 낡은 옷들을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게 코디해서 입는 걸 빈티지(Vintage)룩 혹은 그런지(Grunge)룩이라고 하는데, 내 경우는 ‘그런지룩’에 가까운 것 같다. 요새 알게 된 빈티지와 그런지의 확실한 차이점은 ‘빈티’가 나느냐 ‘부티’가 나느냐의 문제인 것 같은데, 말의 연상과 달리 빈티지에서는 ‘빈티’가 나지 않는다. 그 사전적 의미만 봐도 빈티지는 최고급 포도주인 빈티지 와인을 뜻하는 단어에서 나왔고, 1980년대 정통 하이패션과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그런지룩은 ‘형편없는, 지저분한’이라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옷차림이다. 한 예로 얼마 전 내 후배 기자는 값비싸 보이는 모피 코트에 손잡이 부분을 분홍색 리본으로 리폼한 악어백을 들고 나타나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할머니가 물려주신 백인데, 이번 시즌 프라다 컬렉션에서 영감받아 제가 한번 리폼해봤어요.” 몇해 전부터 뉴욕 패션계에 ‘아이 러브 빈티지’ 붐이 불기 시작하면서 스타일리시하다는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할머니나 어머니가 물려주신 낡은 명품 백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경우 애석하게도 사돈의 팔촌 옷장까지 다 뒤져도 할머니의 30년 된 구찌백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심통이 난 나머지 옹졸하게 이런 트집을 잡아본다. “뭐? 빈티지 마니아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손때 묻은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흥, 3대에 걸쳐 세습된 오래된 부의 역사가 자랑스러운 건 아니고?” 김경 |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 <코트니 러브>
그렇다면 나는 왜 남자들에게 결코 환영받지 못할, 낡고 너저분한 옷차림만을 편애하는가 솔직히 나도 모르겠다. 그냥 좋다. 다만 벼룩시장이나 보세가게에서 고른 듯한 낡은 옷들을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게 코디해서 입는 걸 빈티지(Vintage)룩 혹은 그런지(Grunge)룩이라고 하는데, 내 경우는 ‘그런지룩’에 가까운 것 같다. 요새 알게 된 빈티지와 그런지의 확실한 차이점은 ‘빈티’가 나느냐 ‘부티’가 나느냐의 문제인 것 같은데, 말의 연상과 달리 빈티지에서는 ‘빈티’가 나지 않는다. 그 사전적 의미만 봐도 빈티지는 최고급 포도주인 빈티지 와인을 뜻하는 단어에서 나왔고, 1980년대 정통 하이패션과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그런지룩은 ‘형편없는, 지저분한’이라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옷차림이다. 한 예로 얼마 전 내 후배 기자는 값비싸 보이는 모피 코트에 손잡이 부분을 분홍색 리본으로 리폼한 악어백을 들고 나타나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할머니가 물려주신 백인데, 이번 시즌 프라다 컬렉션에서 영감받아 제가 한번 리폼해봤어요.” 몇해 전부터 뉴욕 패션계에 ‘아이 러브 빈티지’ 붐이 불기 시작하면서 스타일리시하다는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할머니나 어머니가 물려주신 낡은 명품 백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경우 애석하게도 사돈의 팔촌 옷장까지 다 뒤져도 할머니의 30년 된 구찌백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심통이 난 나머지 옹졸하게 이런 트집을 잡아본다. “뭐? 빈티지 마니아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손때 묻은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흥, 3대에 걸쳐 세습된 오래된 부의 역사가 자랑스러운 건 아니고?” 김경 |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