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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사이언스크로키] 영재를 거두는 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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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2-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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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중숙의 사이언스 크로키]

고교 평준화가 싹을 틔운 이래 어느덧 30년이 다 되어간다. 그러나 지금껏 잠시라도 제대로 뿌리를 내린 적 없이 부평초처럼 떠돌아왔다. 그러더니 언제부턴가 특수 목적 고등학교들이 설립되어 그 기틀도 조금씩 허물어졌다. 또한 사회·경제적인 여러 가지 불평등 요소들 때문에 일반 고등학교들 사이에도 우열의 격차가 심화되었다. 이런 가운데 몇년 전부터 이른바 영재교육이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장차 평준화의 틈새를 파고들 또 다른 쐐기로 작용하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 유은주
어쨌든 영재들을 잘 발굴해서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그것이 비록 기존의 교육체제와 충돌하는 면이 있더라도 반드시 부정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영재들을 잘 키워내기보다 오히려 뭉개버리는 경향이 강한 나라로 인식돼왔다. 멀리 조선시대의 대표적 천재로 꼽혔던 김시습이나 가까이 1960년대에 IQ 210의 천재로 유명했던 한 소년 등의 불행한 이야기는 많다. 반면 천재로서 큰 업적을 이루었다고 인정되는 예는 거의 없다. “수줍어 수줍어서 다 못 타는 연분홍이/ 부끄러 부끄러워 바위틈에 숨어 피다/ 그나마 남이 볼세라 고대 지고 말더라”는 이은상 선생의 시조가 그리는 진달래의 삶은 마치 우리 사회의 영재들을 대변하는 듯하다.

물론 이런 현상에 대한 명확한 분석이나 통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런 낌새를 감지하는 것은 분명하다. 영재교육이 큰 관심을 끄는 이유도 이런 인식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지 단순하지 않다. 우선 영재 또는 영재성이란 개념부터 아주 모호하다. 잠시 생각해보면 곧 알 수 있듯 이 개념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영재라고 인정받는 사람들의 주요 특성을 토대로 이를 규정하고 이해한다. 이때 주로 지능이 높고, 창의력·집중력·탐구력과 자기 동기부여 성향이 강하고, 관심의 폭이 넓으며,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등을 열거하는데, 전체적으로 모아보면 수십 가지가 넘는다. 또한 영재성의 발현과정이 어떤지도 잘 모른다. 낭중지추(囊中之錐)란 말과 “능력 있는 사람을 억누를 수는 없다”(You can’t let a good man down)는 표현은 영재성이 언젠가는 드러난다는 점을 가리킨다. 하지만 뒷면에는 어떻게 그런지는 잘 모른다는 뜻이 담겨 있다. 나아가 발현 시기의 차이도 크다. 어떤 애들은 두세살 때부터 이미 조짐을 보이는가 하면 10대 후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흔히 법의 그물은 큰 고기와 작은 고기를 빠뜨린다고 한다. 또는 반대로 “하늘의 그물은 성기지만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는 말에 담긴 천라지망(天羅地網)이란 관념도 있다. 그런데 상황은 좀 다르지만 위에서 얘기한 문제점들 때문에 영재를 거두는 우리의 그물은 아무래도 법망쪽에 가까울 가능성이 크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거나 방치할 수는 없다. ‘IQ 100인 사람들을 아무리 모아봐야 IQ 150이 되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듯 영재의 독자성은 달리 대체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쨌거나 최선의 지혜를 모아 한명의 영재도 놓치는 일 없이 좋은 교육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모든 영재들이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꽃피우도록 도와야 한다.


고중숙 | 순천대학교 교수 · 이론화학 jsg@sunch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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