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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출판] 스티븐 킹, 그 오싹한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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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2-03 00:00 수정 : 2008-09-17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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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이야기꾼의 진면모 보여주는 걸작선… 그의 작품에 열광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스티븐 킹(Stephen King)은 모르는 사람도 드물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도 드문, 이른바 가장 유명한, 미지의 작가다. 그것은 <미저리> <쇼생크 탈출> <돌로레스 클레이본> <샤이닝> <그린 마일> 등 임의의 간단한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의 작품 대다수를 먼저 영화로 접하게 돼 있어 사람들이 킹을 ‘읽기’보다는 ‘보는’ 경우가 훨씬 더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 『스티븐 킹 걸작선』(전5권), 스티븐 킹 지음, 한기창 등 옮김, 황금가지 펴냄.
흔히 문학을 위기에 빠뜨린 원인(遠因)으로 TV·영화·컴퓨터 등 영상문화의 급속한 발달과 그로 인한 활자문화의 위축을 지목하는데, 킹의 경우에는 이런 식의 관점이 잘 들어맞지 않는다.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나 TV 드라마만 해도 무려 70여편에 육박할 정도이며, 이미 수십개국에 그의 작품이 번역·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독자들이 킹을 잘 모르고 굳이 알려는 노력을 하지 않지만 그의 작품을 모르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그가 만들어낸 이야기들은 어느새 현대인들의 삶의 일부로 일상화되어 있다. 과연 ‘호러 킹’ 혹은 공포문학의 제왕 등의 별호대로 그는 현존하는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스토리 텔러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인들이 국경을 초월해 그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이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폭넓고 다양한 이야기 구조에 집단 중독

그의 작품들이 지니는 강력한 대중적 호소력의 원인은 일단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는 판타지·공상과학(SF)·호러 등에 이르기까지 그가 폭넓은 이야기 구사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이버 공간상의 수많은 팬클럽과 카페들이 입증하듯 취향과 기호가 다양한 변덕스런 네티즌들을 하나로 묶어낼 정도로 킹의 이야기들은 폭넓고 다양하다. 다른 하나는 그의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징, 이를테면 공포물을 포함한 대다수의 작품들이 책을 읽는 내내 그것이 허구적인 이야기임을 전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현실감을 준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예컨대 학교 친구들의 혹독한 ‘왕따’와 어머니의 종교적 학대를 견디다 못해 잠재돼 있던 위험한 염력을 분출해버리고 마는 캐리 화이트의 이야기로 킹의 처녀작이면서 출세작이었던 <캐리>, 독자에 대한 작가의 무의식적 공포와 한편의 소설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되는가를 흥미롭게 보여주는 <미저리>, 그리고 외부세계와 단절된 공간에서 일가족을 파멸로 몰아가는 참혹한 이야기로 영화팬들에게는 명장 스탠리 큐브릭의 작품으로 각인돼 있는 <샤이닝> 등이 그러하다. 뿐인가. 우리에게도 이제는 더 이상 강 건너 남의 불이 아닌 발등의 불이 된, 가정폭력의 심각성과 이 문제를 공포와 연민과 감동의 마음으로 응시하게 하는 <돌로레스 클레이본> 역시 강렬한 흡인력과 호소력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일찍이 프로이트는 공포의 본질을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일상적이고 익숙한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낯선 것으로 변형되어 돌아올 때 생겨나는 심리적·정서적 반응’으로 규정한 바 있다. 이처럼 공포물에 많은 사람들이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히 흥미로운 현상이다. 작가와의 공모하에 독자 대중들이 스스로 공포를 자처하는 것은 경기침체, 살인적인 실업률, 정경유착 등등의 끔찍한 현실에 대한 대중들의 망각에의 욕망과 불만 그리고 일종의 집단적 노이로제, 다시 말해서 이성과 합리의 힘으로도 통제가 불가능해져버린 끔찍한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왜곡된 반응이며 퇴행적 저항의 일종인 셈이다. 이런 점들이 킹의 이야기가 가진 매력이며, 그의 작품들을 현실도피적이며 엽기적인 대중소설로 재단해버릴 수 없게 하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킹은 국내의 연구자나 비평가들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돼왔다. 그것은 B급영화들로 혹은 천박한 상업주의적 발로에서 마구잡이로 찍어낸 군소 출판사들의 조야한 책들로 인해 킹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중서 전문출판사인 황금가지가 작정하고 펴낸 <스티븐 킹 걸작선>은 주목에 충분히 값한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열성팬들조차 쉽게 접할 수 없던 킹의 단편소설들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점에서 이 걸작선은 국내 독자들에게 오싹한 즐거움의 향연을 선사할 것이다. 가령 현실의 지도상에 나타나지 않은 ‘개틀린’이란 가공(可恐)의 마을에서 맞게 되는 버트와 비키의 공포를 그린 <옥수수밭의 아이들>, 죽은 애인 노마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다가 희대의 살인마가 돼버린 청년의 이야기로 반어적인 작품 제목이 인상적인 <꽃을 사랑한 남자>, 그리고 우리들의 대표적인 기호품인 담배를 둘러싼 금연의 공포와 고통을 은유적으로 그린 <금연주식회사> 등 거의 모든 작품들에서 다시 한번 탁월한 이야기꾼의 솜씨를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똑똑한 이야기 장사꾼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해서 킹을 지나치게 우상화하거나 과잉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현대사회에서 그의 이야기들이 갖는 의미를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전혀 만족스럽지 못한 참혹한 우리 현실과의 선명한 대비에서 생겨나는 보색대비 효과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으며, 킹 역시 우리 시대의 수많은 매설가(賣說家)들처럼 어떤 이야기들이 대중에게 먹히는지를 잘 파악하고 있는 이야기 장사꾼의 한명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끝으로 출판사들 역시 ‘킹 걸작선’처럼 검증된 ‘외국상품’들만 골라서 출판하고 손쉽게 이익을 얻어내려는 유혹을 떨쳐버리고 국내 작가들을 발굴하고 새로운 이야기 장르들을 개척하는 데 좀더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전문 출판사들이 앞장서서 이 심각한 이야기의 무역역조 현상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았으면 하는, 나아가 세계시장에서 유통되는 우리의 이야기를 보고 싶다는 순진한 바람 때문만은 아니다.

조성면 | 문학평론가 · 인하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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