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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만화] “우리는 김태권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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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2-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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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복통 <십자군 이야기> 듣다보면 배움 깊어가… 충격과 공포의 기억 되살리려 서적 60여권 독파

그가 만화로 들려주는 ‘십자군 이야기’에 빠져들면 요절복통할 수밖에 없다. 그토록 ‘웃기는’ 전쟁이 없기 때문이다. 900여년 전의 충격과 공포는 부시에 의한 이라크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으하하, 중세의 십자군 이야기가 이렇게 ‘웃기는’ 이야기였어?”

<십자군 이야기 - 충격과 공포>(길찾기 펴냄)는 읽다가 데굴데굴 구를 수밖에 없는 만화다. 그런데 그냥 구를 수만은 없다. 고대 로마 사회의 모순과 분열부터 시작해 중세 사회의 형성을 거쳐 동·서 로마와 이슬람 세계가 휘말려드는 참혹하면서도 어처구니없는 분쟁으로 나아가는 깊이 있는 역사서술은 웃으며 계속 공부를 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과거가 지금 우리의 세상과 얼마나 닮아 있는가를 느끼면서 소스라치지 않을 수 없다. 인류 역사의 가장 어두운 한 페이지인 피비린내 나는, 복잡한 전쟁사에서 배우며 웃으며 감탄하며 이렇게 눈을 떼지 못하도록 만드는 이 만화가는 도대체 누구일까?

“부시 때문에 열받아 900년 전으로”


그 주인공, 만화가 김태권(29)씨는 ‘발견’이라고 칭해도 될 만한, 지적이고 즐거운 만담꾼이며 개성 있는 그림쟁이다. <십자군 이야기>는 그의 첫 단행본 만화지만, 그는 <문화일보>의 ‘장정일 삼국지’ 삽화를 그리는 최연소 신문 연재 삽화가이자, 대학시절부터 많은 교지와 사회과학 서평지에 시사만화를 연재하면서 대학생들 사이에 이름이 높았더랬다.

그런 그가 900년 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십자군 이야기와 씨름을 하게 된 것은 순전히 “부시 때문에 ‘열받아서’였다”. “우리의 역사적 책임은 테러를 응징하고 악의 세계를 제거하는 것이다. 미국이 벌일 21세기 첫 전쟁은 ‘십자군’ 전쟁이다”라는 부시 대통령의 전쟁 선언을 들으며 이 남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 복잡한 정쟁사를 만화로 풀어낸 김태권씨. 김씨는 십자군 전쟁과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비교하기도 한다.(한겨레 김종수 기자)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이 직접 나서 세계를 돌며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해 용서를 구하고, 당사자인 서구의 학자들도 십자군을 어리석은 행동으로 평가하는 마당에 이럴 수 있나. 더구나 이 땅에서는 일부 우익들이 덩달아 ‘미국이 십자군이 되어 이라크를 해방해야 한다’고 하는데 기가 막히지 않나?” 소설가 귄터 그라스의 “부시의 십자군 발언은 그 잔혹한 역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십자군이 종교적 열정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멍청함도 보여준다”는 말처럼 부시의 전쟁 선언이야말로 미국 이라크 침공의 부당함을 자인한 꼴이 아닌가.

그때부터 그는 책 속에 파묻혀 중세사를 공부했다. <더 알렉시아드> 같은 당시의 역사서부터 자크 르 코프의 <서양 중세 문명> 같은 대표적인 중세 역사서까지 60여권의 참고자료는 이번 만화책 뒤에 실려 있어 다른 이들에게도 독서를 권한다. “당시 역사서들을 읽다보니 십자군 전쟁에는 어이없는 순간이 많았다. 명분 없는 전쟁에 휘말리는 지금의 역사도 나중 사람들이 보면 황당할 것이다. 수백년의 시간도 필요 없다. 20~30년만 흘러도 이라크 침공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이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지난 4월부터 그가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에 연재했던 만화들을 모은 것으로, 그는 1년에 2권씩 작업해 6권으로 이야기를 끝맺을 계획이다.

<십자군 이야기>는 십자군 전쟁과 오늘의 이라크 전쟁을 비교하며 두 전쟁의 어처구니없는 진행과정과 억지스런 침공논리, 양민학살 등의 공통점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십자군 전쟁에서 지배층들이 종교를 이용해 어떻게 경제·정치적 이득을 챙겼는지, 전쟁을 부추기는 언론(여론) 조작, 십자군의 유대인 학살, 당대 유명한 기사들의 술수 등 사건들이 이어진다. 내용은 당시 문헌 등에 근거하지만, 특유의 언어유희와 유머를 통해 생생한 역사현실로 살아난다. 당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중세의 대표적 미술작품인 바이외 태피스트리와 비잔틴·이슬람 회화 등을 참고해 중세 로마네스크풍으로 그린 그림도 매력적이다.

부시 대통령도 등장한다. 그는 십자군 전쟁을 촉발하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참전해 혼란을 일으킨 피에르 은자가 타고 다니던 호전적인 나귀로 나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자는 그 역사를 되풀이해서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만담꾼의 재능이 엿보이는 대사도 곳곳에 등장한다. ‘기사도 정신’이라는 번지르르한 포장과는 달리 중세 초기 기사들이 얼마나 거칠고 잔인한 전사였는지를 보여주는 일상 대화는 이렇다. “주군 오셨습니까”를 해석하면 “형님! 나오셨습니까”란 뜻이고 “드래곤 군대와의 교전상황은?”은 “용가리파하고 붙은 거 어떻게 됐어?”라는 뜻이며 “우리의 용감한 기사들이 출전했습니다”는 “애들 쫙 풀었습니다”, “그나저나 영지에는 별일 없소”는 “‘나와바리 관리는 잘되고?”로 해석돼 기사들의 세계와 오늘날 조폭 세계가 닮아 있음을 보게 한다.

이 책에서 그가 특히 강조하려는 것은 기독교와 이슬람은 십자군 전쟁 이전까지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했고, 이슬람이 다른 종교 신자들을 강제로 개종시키지 않았으며, 두 종교간의 ‘문명 충돌’ 개념이 십자군 전쟁 동안 고의로 만들어져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의 씨앗을 뿌렸다는 점이다. 그는 또 “십자군 전쟁 초기에 억압받고 사람 취급도 못 받던 농민, 빈민들이 엄청나게 군대를 조직해 참전하면서 동유럽의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난동과 끔찍한 폭력을 저지른 부분이 특히 마음 아프다. 근대사에서 희생자였던 한국인들이 베트남전·이라크전에 참전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멸시하는 것이나 아프간·이라크로 간 많은 미군 병사들이 실제 미국에서는 흑인, 히스패닉 등 하층민, 심지어 비시민권자인 것도 비슷하다”고 말한다.

김태권씨는 미학을 전공했지만 만화를 소통의 도구로 삼아 만화가의 길로 나섰다. 처음 만화를 그린 것은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돌려보기 위해 그림을 그리면서. “글은 아무리 열심히 써도 반응이 시큰둥한데 만화로 그리니까 다들 재미있다고 했다. 그때부터 만화는 소통의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전문적으로 그림 공부를 한 것은 한겨레문화센터 일러스트·시나리오학교를 수료한 것이 전부이고, 미술사의 유명한 작품을 보면서 많은 그림을 그렸다.

과거와 현재의 모든 침략자를 향해…

‘주독야경’으로 낮에는 책 읽고 밤에는 만화를 그리며 살고 있는 그는 다음 작품으로, 히틀러의 집권과 러-일 전쟁을 소재로 한 두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히틀러 집권과정을 보면 우익들이 궁지에 몰렸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되는지 볼 수 있다. 알려진 바와 달리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는 히틀러에 대한 지지가 그리 강하지 않았다. 당시 독일 기득권층이 요직은 다 가지고 있었지만 국민들의 지지를 못 받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얼굴마담으로 히틀러를 끌어들여 지원했다. 그 과정에서 남북의 강한 지역주의, 반공주의, 족벌언론이 많은 역할을 했다. 한국 근현대에 일어난 권력의 드라마와 소름 끼칠 정도로 비슷하다.” 또 “2004년은 러-일 전쟁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인데 당시 대한제국의 부황제로 불리던 대신 이용익에게 외국 외교사절들이 러시아와 일본이 곧 전쟁을 할 것 같은데 한국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자 “미국이 책임져줄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이 있다”며 “강대국 사이에 낀 한국의 비틀린 자세는 100년의 시간과 관계없이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그렇게 기억을 되살려 현실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에 관심이 많다. “기억은 살아남아 있다는 것 그 자체와 더불어 폭력이 빼앗아 갈 수 있는 마지막 무기다. 독선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는 십자군 전쟁의 기억을 통해 다른 문화를 지닌 사람들을 이해하기는커녕, 다르다는 이유로 죽이고 핍박하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침략자들에게 맞설 수 있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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