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 따르면 하느님이 아담을 깊은 잠에 들게 한 뒤 그에게서 갈비 하나를 떼어 이브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냥 떼면 아플까봐 깊은 잠에 들게 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은 최초의 마취의사이기도 하다. 이것은 첫 인류인 아담도 통증을 느꼈다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태초부터 존재했던 통증은 오늘날에도 계속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과학이 발달해 사람들이 달나라나 화성으로 이민가서 살더라도 통증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아프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통증의 분위기 속에서 태어나 통증의 위협 속에서 평생을 살다가, 통증으로 신음하면서 죽게 마련이다. 통증이 생명의 일부인 셈이다. 아니 생명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는 “아예 통증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개 일찍 죽는다. 그러니 통증을 못 느끼는 사람을 부러워할 이유는 없다. 통증은 “지금 몸의 일부가 손상되고 있으니 빨리 손을 써라” 하는 경고신호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통증은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라 할 수 있다.
통증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우선 생리적인 통각이 있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픈 감각인데, 이는 정상적인 것이며 필요한 것이다. 다음은 증상으로서의 통증이 있다. 신체조직 일부가 손상되거나 염증이 생겼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부상을 당하거나 신경이 눌리고 살이 곪은 것 등이 여기에 속한다. 고통 또는 고뇌로서의 통증도 있다. 이것은 신체적인 증상에다 ‘고민하는 감정이나 걱정·비관·우울·분노·비애·좌절’ 등이 첨가된 느낌이다. ‘행태로서의 통증’도 있다. 이 경우에는 이미 증상으로서의 통증이 아니다. 통증이 몸과 마음에 새겨져 생활이 좌지우지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때에는 통증 행태를 고쳐야 한다. 통증의 증상을 치료해도 별다른 효과가 없는 단계다.
이처럼 통증은 서로 다른 구조를 가지고 나타난다. 그래서 통증을 효율적으로 치료 관리하려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통증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왜’(Why) 해야 하는지보다 ‘무엇’(What)을 해야 하는지가 중요하며, 그보다 ‘어떻게’(How) 해야 하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수없이 많은 치료 중에 가장 알맞은 치료법을 선택해주는 것은 의사의 지혜요, 그 많은 의사 중에 “나에게 가장 도움을 줄 의사”를 선택하는 것은 환자의 지혜이다.
전세일 | 포천중문의대 대체의학대학원 원장

일러스트레이션 | 방기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