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진정한 여자다움을 아는가

486
등록 : 2003-11-27 00:00 수정 :

크게 작게

[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패션과 뷰티에 관한 게이 친구들의 정말로 솔직한 충고

패션계와 화류계, 그 중간쯤에서 일하다 보니 내게도 게이 친구들이 많아졌다. 이기적인 남자들한테 상처받은 여자들 중 상당수가 영화 때문인지 ‘내게도 게이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를 외치는 모양인데, 한 마디 충고하자면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일단 여자로서의 그 알량한 질투심이나 자존심부터 제거해야 한다.

왜냐하면 게이들이 여자친구한테 결코 들을 수 없는 저담백 고칼로리 충고를 많이 해주기는 하지만, 이미 세상의 고정관념과 대판 싸우며 산전수전 다 겪은 인생인지라 대개 입이 거칠고 꽤나 독설적이다. 게다가 사냥감의 성별이 같다 보니까 종종 본의 아니게 서로 경쟁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영화에서처럼 술김에 게이랑 자는 일은 거의 없다. 다만 술김에 내 애인이 내 게이 친구랑 자게 될지도 모른다).

도식화된 세상의 윤리와 편견, 그리고 여염집 여학생 같은 교양과 자존심을 벗어던지고 만나면 사실 게이만큼 멋지고 재밌고 쓸 만한 친구도 없다. 마치 흑인들이 미적 감각과 재능을 타고난 것처럼.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학대받는 것처럼 게이들도 그러한데, 특히 패션에 관해서라면 우리 여자들이 배울 게 정말 많다. 예를 들어 장 콕토(참고로 올 겨울 명품 남성복으로 유명한 ‘랑방’에서는 남색가 장 콕토의 매력을 실루엣에 담은 우아한 스타일의 가을·겨울 컬렉션을 선보였다)가 그랬듯이 진정한 ‘르네상스맨’이라고 할 수 있는 내 게이 친구는 내 스타일에 대해 언제나 이런저런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남성용 커플 시계를 차라. 세트로 나온 여성용 시계보다 그게 더 시크하고 멋지다.” “파멜라 앤더슨처럼 보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지나치게 섹시하게 입으려고 노력하지 말아라.” “스타일리시해지기 위해선 무엇보다 몸에 잘 맞는 옷을 입는 게 중요하다.” “와이드 팬츠는 그만 좀 입어라. 아예 나쁜년이라고 신문 광고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골격이 클수록 탱크 톱으로 어깨를 드러내라.”

이런저런 패션정보의 홍수 속에서 거의 익사할 것 같은 순간에 내게 손을 내민 건 정말로 그 녀석뿐이었다. 게다가 ‘아주 트렌디하게 80년대 복고풍의 퍼머 머리를 하면 어떻겠냐’는 내 질문에, 거두절미하고 ‘아줌마처럼 보일 거라’고 솔직하게 말해준 것도 그 녀석뿐이었다. 오, 고마워라. 안 그랬으면, 내 후배들 꼬임대로 했으면 지금쯤 거금 20만원이나 쓰고 망신을 당할 뻔했다.

아직까지 친구라고 할 수는 없지만 최근에 서로 안면을 트게 된 또 다른 나의 게이 ‘선생’ S. 그에게는 웬만한 여자 연예인에게서조차 들을 수 없는 끝내주는 뷰티 노하우가 정말로 많았다. 어느 미용실에 가면 마사지를 받으면서 동시에 속눈썹 파마를 할 수 있어서 좋다는 둥, 얼마 전 홈쇼핑에서 황토팩을 샀는데 트러블이 있던 피부를 순식간에 진정시켜주더라는 둥의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실질적인 미용정보들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외적인 아름다움을 향한 그의 당당한 소신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위선적인 말은, 외면의 아름다움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야. 정말 웃기지들 말라고 해. 노력한 만큼 아름다워진다고, 알았어?” 참고로 속눈썹 파마를 한 그는 얼마 전 부와 교양을 동시에 갖춘 남자에게 시집가서 잘 살고 있다. 나도 못 가본, 진정한 여자의 길을 그는 가고 있다.

김경 |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