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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성폭력 증언, 상처의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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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1-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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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생존자 말하기’… 끔찍한 기억 풀어놓으며 자아 회복 기대

성폭력 범죄의 70~80%는 대개 아는 사람에 의해 일어난다. 범죄의 속성상 10% 정도만 경찰에 신고된다. 그럼에도 이 범죄는 미연방수사국(FBI) 통계로 미국 전역에서 평균 6분당 한번꼴로 발생할 만큼 빈도가 높다.

성폭력은 도처에서 일어나지만 숨겨져 있는 범죄다. 가해자를 처벌하는 법률적 근거가 있으나 당사자들이 나서 ‘내가 피해자’라고 외치는 순간, 또 다른 의심과 편견의 눈길이 쏠리게 마련이다. “왜 너는 그처럼 부주의했느냐, 조심하지 않았느냐”라는 질책에, “혹시 너도 그 상황을 즐긴 건 아니냐”는 어처구니없는 의혹까지 따라붙는다. 피해자들은 사건 뒤 심한 자책감에 시달리며 대인관계의 어려움뿐 아니라 필요 이상의 경계심과 두려움, 집중력 장애, 무력감을 겪는다.

한국성폭력상담소(www.sisters.or.kr)가 11월 말에 벌이는 ‘1회 생존자 말하기 대회’는 성폭력을 겪은 이들이 피해자의 그늘에서 은둔하기를 멈추고 세상에 스스로의 고통을 밝히는 자리다. 행사 슬로건을 ‘들어라! 세상아. 나는 말한다!’로 정한 것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세상에 대고 경험자들이 모여 공식적인 발언을 함으로써 자신의 아픔을 세상으로부터 이해받고 싶다는 의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처음 마련되는 자리인 만큼, 말하는 이가 거리낌 없이 발표할 수 있도록 행사 일시와 장소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다. 당사자 이외에는 취재진을 비롯해 누구도 참관할 수 없도록 했다.

성폭력상담소의 성과인권팀 권김현영 부장은 “흔히 쓰는 ‘피해자’라는 말을 접어두고 ‘생존자’라는 처절한 말을 선택한 까닭은 희생자라는 소극적 의미 대신 용케 살아남았다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다”라고 설명한다. 시간을 견디는 것 자체가 삶의 목표가 되어버릴 정도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이들에게 보내는 격려이기도 하다.


그날의 기억을 떨치려는 고통의 몸부림

우리나라에선 처음 열리는 행사지만, 외국에선 15년 전부터 ‘스피크 아웃 데이’가 열려 생존자 말하기의 장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경험이 쌓이면서 피해에 대해 말하는 두려움이 많이 사라지게 됐고, 처음에는 외부에 굳게 문을 닫았던 ‘스피크 아웃 데이’는 이제는 관심 있는 남녀라면 누구나 참관할 수 있도록 개방돼 있다.

흔히들 사람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나쁜 기억은 저절로 지우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어떤 경우엔 망각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주위 사람들이 “그같은 일은 또다시 벌어지지 않을 거다. 빨리 잊어라”며 ‘상식적인’ 충고를 던지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렇다면 과연 성폭력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 치유 효과를 가지는가. 혹 고통스런 이야기를 반복함으로써 더욱 그 기억에 매몰되는 것은 아닌가.

최근 우리말로 옮겨진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수잔 브라이슨 지음, 여성주의 번역모임 ‘고픈’ 옮김, 인향출판사)는 성폭력을 겪은 여성 철학자가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성찰적인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다.

◁ 가스파 노에 감독의 최근작 <돌이킬 수 없는>은 여자친구가 참혹한 성폭력을 겪은 뒤 남자친구가 복수하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폭력으로 찢겨진 삶을 보여준다.
홀로코스트, 성폭력, 살해의 위협과 같은 끔찍한 기억들은 사건이 끝난 뒤에도 사람들에게 끈질기게 매달려 평생 장애처럼 발목을 잡아매는 일이 많다.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라고 불리는 이 경험은 사건의 내용들이 사람의 의식을 거쳐 기억으로 남는 정상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기억 자체가 그대로 피해자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다. 뇌리에 박힌 이 기억은 때때로 돌발적인 플래시백(과거의 경험이 현재에 재현되는 체험, 당시 이미지와 감각을 그대로 느끼는 동시에 근육긴장 등의 극적인 운동반응을 일으킨다)을 일으키거나 심하면 자아분열 같은 정신장애를 가져온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는 몸과 마음속 어딘가에 잠복해있다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시기에 모습을 드러내며 괴롭힌다.

수잔 브라이슨은 집단 치료나 공식적인 ‘스피크 아웃’이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한다. “트라우마에 대해서 이야기를 만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함으로써, 그 이야기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서, 자신의 삶에 불쑥 끼어든 트라우마를 자신의 이전 삶과 이후의 삶 속으로 통합시킬 수 있게 된다. 트라우마를 증언함으로써 더 이상 트라우마의 기억이 불쑥 떠오르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통제해 자신의 삶을 훼방하지 않도록 한다.” 트라우마를 말하는 것은 날 것 그대로의 기억을 이야기 속의 기억으로 바꿔 자아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그는 분석한다.

△ 무방비 상태의 어린이들이 당하는 성폭력은 일생동안 회복되지 않는 기억으로 남기도 한다.(김진수 기자)

숨어서 떨지 말고 당당하게 화를 내라

트라우마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라졌던 분노를 건강한 상태로 표출하게 도와준다. 트라우마 연구자들은 저항할 수 없는 힘 앞에서 완전히 무기력하게 된 상태를 트라우마로 규정한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에게 막연한 두려움을 갖게 된다. “누구도 도저히 복수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분노를 키우지 않으며, 우리보다 훨씬 더 힘센 사람에게는 상대적으로 작게 분노하거나 조금도 분노하지 않는다”(아리스토텔레스)는 것은 씁쓸한 진실이다. 여러 사람 앞에서 무대에 올라 진행되는 ‘스피크 아웃’은 놀라서 벌벌 떠는 대신 화내는 법을 가르쳐준다. 분노는 자신의 무력감에서 비롯된 두려움을 사라지게 만들며 비난의 화살을 가해자에게 겨눌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한다.

지은이는 “비극은 나무가 휘는 것이 아니라 부러지는 것”이라는 말을 인용함으로써 말을 맺는다. 생존자들이 성폭력이 일어나기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트라우마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깨진 삶을 본래 모습으로 맞추려는 노력 대신, 자신에게 벌어졌던 일의 의미를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추스릴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성폭력에서 살아남은 우리들은 사실 화려한 축하행진을 하지도 못하고 명예 시민증을 수여받지도 못했지만 생존자가 된다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다. 살아남았다는 것이 비록 나의 이력서에 가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성취물이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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