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아시아 음식을 드셨나요?

486
등록 : 2003-11-26 00:00 수정 :

크게 작게

입맛의 세계화 이끄는 첨단 유행음식의 사회사… ‘정통’은 골목에 숨고, 미국식 고급요리 열풍

동양의 민족적 특성을 반영했다는 ‘에스닉 푸드’가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토종의 참맛’과 거리가 있다. 미국식으로 재탄생한 맛이기 때문이다. 유행음식의 사회사를 살펴본다.

유행을 선도하는 도시인들이 타이나 인도, 베트남에 간 듯 꾸며진 이국적인 레스토랑에 앉아 특별한 ‘에스닉 푸드’를 즐기게 된 것은 벌써 2~3년쯤 무르익은 유행이다. 서울 강남의 청담동이나 압구정동·역삼동, 강북의 신촌·동부이촌동 같이 몹시 세련된 동네에서 나타난 이런 유행은 이제는 ‘보통 사람들’에게까지 퍼져나가 절정에 이르고 있다. “점심 때 톰양쿵과 팟타이(타이 스프와 국수) 먹을까, 퍼(베트남 국수)를 먹을까?” 하는 질문은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꽤 흔하게 들을 수 있다. 백화점 문화센터마다 베트남 요리 강좌가 개설됐다.

사진/ 한국의 유행음식은 미국의 흐름을 그대로 보여준다. 최근 대기업들이 외식 산업에 진출하면서 대형 레스토랑이 잇따라 문을 열었다.(김진수 기자)

특별한 맛을 찾아 이국 레스토랑에…

음, 뭐 더 특별하고 흔하지 않은 첨단 유행 요리 없을까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지난해 말부터 문을 연, 모든 재료가 유기농으로 준비돼 원하는 대로 골라서 만들어주는 고급 샌드위치 가게나 유기농 재료로만 만들어진 ‘오가닉 푸드’ 레스토랑에서 식사한다면 역시 유행에 민감하다는 ‘찬사’를 들을 수 있다. LG그룹 계열의 급식·외식 산업 전문기업인 아워홈 홍보실의 송혜경씨는 “동남아와 인도 음식은 몇년 전부터 꾸준히 인기이고, 올해는 ‘건강’이 강조되면서 유기농 샌드위치와 햄버거를 줄 서서 먹을 정도다. 에스닉 푸드가 각광받으면서 한물간 것으로 여겨지던 중국이나 일본 음식도 훨씬 전문화돼 새롭게 등장했다. 사천요리, 광동요리 등 ‘자장면 없는 중국집’들이 세련된 인테리어와 함께 인기이고 일본 음식도 퓨전일식이나 간사이식 등으로 전문화됐다”고 전한다.


요즘 유행 음식들을 살펴보면, 언제부터 이렇게 다양한 세계의 음식들이 우리 곁에 왔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근대 개화기 이후 1990년께까지 거의 100년 동안 한국에서 맛보는 외국 요리란 중국과 일본 음식, 일본에서 서양 여러 나라 요리를 뒤섞어 만들어 건네준 ‘양식’ 정도였다. 1990년대 이전에도 브라질, 멕시코, 파키스탄 등 그동안 한국인들이 접하기 힘든 지역의 음식들이 그곳에서 살다온 상사주재원, 역이민 교포, 외교관 등을 중심으로 소개된 적은 있다. 그러나 이들 음식은 극소수의 소비자들만을 대상으로 한 예외적인 음식으로 대중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새 세상이 달라졌다. 지난 몇년 동안 베트남 음식점은 서울 대학로의 라우제를 효시로, 그린파파야 향기, 사이공, 포 호아, 아오자이 등이 잇따라 문을 열었다. 타이 식당은 국내 최초의 ‘오리엔탈 레스토랑’이라는 실크 스파이스를 비롯해 타이 오키드, 타이 수키 등이 인기를 얻고 있다. 특히 타이 음식은 열대기후에 맞게 자극적인 향신료를 넣어 독특한 향과 매우면서 달콤새콤한 맛이 입 안에서 톡 쏘며 퍼지는 매력으로 세계 4대요리로 꼽힌다. 태국과 베트남 음식에 이어 최근 인기를 얻은 것은 인도 요리, 몇년 전만 해도 인도 식당은 한국에 근무하는 이슬람 국가 출신 외국인들을 주고객으로 하는 이태원의 몇몇 식당들뿐이었지만, 한국인을 주고객으로 하는 레스토랑 ‘강가’가 인스턴트가 아닌 인도 고유의 재료와 향신료로 만들어낸 다양한 카레와 화덕에 구운 숯불구이 탄두리와 전통 빵 난을 내놓으며 사람들을 끌고 있다. 최근에는 러시아, 이집트, 파키스탄, 터키 음식들에까지 미식가들의 손길이 닿고 있다. 지난 몇년 사이에 음식혁명이라도 일어난 것 같다. 다양한 문화에 눈과 입을 열었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히 긍정적인 변화다.

사진/ 최근 유행하는 아시아 음식들은 대부분 미국인 입맛을 따르고 있다. 국내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 잡는 타이 요리들.(김진수 기자, 한겨레)

“음식도 미국을 거쳐야 유행을 탄다”

그런데 질문들이 떠오른다. 인도, 베트남, 타이 음식들이 미식가들의 인기요리로 떠오르는 동안, 외국인 노동자들이 즐겨 찾는 동대문운동장 근처의 조그만 러시아·네팔 음식점과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꼬치구이(양로우촨)집, 가리봉동의 ‘정통’ 중국 식당에는 왜 한국인들의 발길이 향하지 않을까? 일요일 오후마다 서울 대학로 혜화동 성당 앞에는 미사를 끝내고 나오는 필리핀 노동자들을 상대로 온갖 필리핀 요리 재료와 물건들을 파는 간이 장이 선다. 그렇지만 수많은 필리핀 사람들만 물건을 사고 팔뿐, 필리핀 요리에 관심을 가지거나 재료를 눈여겨보는 한국인은 왜 없을까? 왜 한국 사람들 사이에 타이와 베트남 요리는 열풍인데, 옆 나라인 필리핀이나 네팔 요리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을까?

이달 초 열린 한국사회사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민족음식, 그 유행의 역사와 의미’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한 서현정 서울대학교 비교문학연구소 연구원은 “한국에 온 에스닉 푸드는 한국이 직접 만난 베트남, 타이, 인도의 문화가 아니라 미국을 거쳐 만난 그곳의 문화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몇년 전부터 미국에서 새롭고 건강에 좋은 음식으로 각광받은, 특정한 몇몇 아시아 국가의 민족음식이 다시 한국에 수입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새로운 민족음식은 결국 미국에서의 인기와 영향력 아래 수입됐으며, 한국인들과 동남아 사람들과의 역사적 연계나 한국인들의 경험 등은 이 새로운 음식문화를 선택하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 나라 문화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 역시 충분하지 않다. 타이 음식의 톰양쿵이나 말레이시아의 사테 등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중요한 음식 몇 가지가 메뉴에 들어 있고 ‘아시아스러운’ 장식품들이 놓여 있을 뿐이다. 레스토랑에서 에스닉 푸드를 우아하게 먹으면서 그 요리들이 베트남·인도·타이에서 와서 하루 12시간 이상 중노동을 하고 단속에 쫓겨다니는 40만명이 넘는 외국인 ‘불법’ 노동자들의 나라에서 온 것임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다. 미국이라는 ‘대단한’ 나라를 통해 수입된 이 음식들은 베트남·타이·인도의 음식이기 이전에 미국인들이 좋아하고 유행의 첨단에 있는 멋진 음식이다. 이 음식들은 그곳 노동자들과 달리 이국적이고 동양적일뿐 아니라 낭만적인, 긍정적인 이미지를 상징한다. 미국이 이들 지역을 바라보는 ‘오리엔탈, 신비, 낭만’의 시선까지 함께 수입되었기 때문이다.

현지인 “제맛 아니다”… 고급화의 대가

그래서 한국의 에스닉 푸드는 정작 그곳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낯설다. 베트남 하노이대학에서 한국학을 전공하고 2년 전 한국으로 유학온 하민 타인(26)은 “한국에 온 베트남 사람들은 이곳의 베트남 식당에 가지 않는다. 베트남에서 아침식사나 밤참으로 노점에서 싸고 간단하게 먹는 국수 퍼(pho)가 고급음식으로 변해 7천~8천원씩 하는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베트남 음식의 제맛이 나지 않는다. 여기 베트남 사람들은 몇몇 사람들끼리 모여 직접 만들어 먹는다”고 말한다. 그는 베트남에서 보통 사람들이 먹는 국수는 바로 만들어 말리지 않고 먹는 젖은 국수인 데 비해, 이곳에서 상품화된 음식들은 완전히 말린 국수를 가져와 다시 끓이는 것이어서 맛이 많이 다르다고 했다. 또 베트남의 주식은 쌀밥에 갈비 같은 여러 반찬을 곁들여 먹는데, 이곳 베트남 음식점들에서 내세우는 메뉴는 외국인들이 좋아하는 국수가 중심이라고 말했다.

퓨전 음식을 거쳐, 에스닉 푸드, 올해 유행한 건강 음식인 ‘오가닉 식당’ 열풍에 이르기까지 최근 한국의 유행음식은 거의 미국과 동시대적인 감각을 보여준다. 베트남식당 포호아 홈페이지에는 ‘미국식 베트남 쌀국수 전문 레스토랑이며, 세계 최대·최초의 베트남 쌀국수 전문점으로서 한국에서도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 미국에서 먹어본 그 맛을 잊지 못한 사람들이 그 맛을 이곳 한국에서도 볼 수 있어 많은 고객층을 확보하고 있다’는 홍보 문구가 떠 있다. 올해 대단한 인기를 끈 유기농 샌드위치 전문점 오봉팽이나 슐라스키델리도 유학생이나 해외동포가 들여온 미국계 업체인데 샌드위치 가격이 7천원~8천원대다. 요리 전문 캐이블TV <푸드채널> 홍보실의 김대희씨는 “패션뿐 아니라 음식 역시 뉴욕의 유행이 반년도 안 돼 서울에 등장한다. 에스닉 푸드나 유기농 레스토랑도 야채가 풍부하고 칼로리는 낮은 건강식으로 알려지면서 얼마 전 미국이나 유럽에서 대단한 인기였다. 한국에서는 유학을 다녀오거나 해외여행을 즐기는 젊은 사람들이 그곳을 그리워하면서 이런 음식을 즐긴다”고 말한다.

사진/ 에스닉 푸드는 민족의 맛을 간직하고 있는가. 서울 명동의 한 인도 음식점.(한겨레 윤운식 기자)

최신 유행을 타는 이들 요리를 파는 곳은 대중음식점보다는 고급 음식점이며 값도 만만치 않다. 새롭고 자극적인 것을 원하는 소비자들의 욕구에 맞도록 이국적인 분위기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꾸며진다. 20년 이상 경력을 지닌 베트남 현지 요리사들이 직접 요리를 하고, 다양한 식재료를 베트남에서 공수해온다는 청담동의 한 베트남 궁중 음식점은 ‘궁중음식’에 맞게 식기도 로젠탈, 베르사체, 리델 와인잔 등 명품만들 고집하며, 곳곳에 베트남의 유명작가가 그린 그림과 소품들이 있다.

대기업들의 잇딴 외식시장 진출도 이러한 유행음식의 고급화 흐름에 기폭제가 되었다. 롯데, CJ, 동양제과 등이 이미 패밀리레스토랑을 소유하고 있는 데 이어, 광주요의 한식 전문점 ‘가온’, 동양제과의 차이니즈 레스토랑 ‘미스터 차우’, CJ의 타이 레스토랑 ‘애프터 더 레인’ 현대지네트의 퓨전레스토랑 ‘휴레아’ 등 대기업의 대형 고급 레스토랑들이 최근 문을 열었다.

우리는 정말로 아시아 음식을 먹는 걸까

푸드채널에서 아시아 음식을 소개하는 프로그램 <메이드 인 아시아>를 만든는 이우철 PD는 “새로 개업하는 강남 레스토랑의 절반 이상에는 대기업이 참여한다고 봐도 틀리지 않다. 대기업들이 한꺼번에 외식산업에 진출하면서 전체적으로 레스토랑의 유행도 민감해지고, 규모나 인테리어도 훨씬 화려해졌다. 보통 초기 투자비용이 20억원이 넘는다. 대기업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식당을 하려면 상당한 자본이 있어야 하고 일반인들은 투자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유행 1번지 청담동과 압구정동에서는 너무나 빨리 변하는 사람들의 취향을 따라잡기 위해 6개월마다 유행을 파악해 음식맛도 바꾸고 인테리어도 모두 고친다. 거기에 맞추지 못하면 손님이 끊긴다.

이렇게 정신없이 변하는 음식 유행의 소리 없는 전쟁터에서 내가 베트남 요리를 좋아하게 된 것은 나의 선택일까, 미국인들의 선택일까, 시장의 선택일까?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