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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하얀리본운동’ 벌이는 마이클 코프먼 박사] “터프가이 꺼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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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1-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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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9년 12월6일 캐나다 몬트리올의 한 공과대학 캠퍼스에 수십발의 총성이 울렸다. 총탄은 강의실과 도서관으로 걸어가던 14명의 여학생을 관통했다. 반자동소총을 난사한 범인은 여성혐오증에 빠진 한 남성이었다. 시민들은 충격에 빠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캐나다 전역에는 예상치 못했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추모행사가 열리면서 여성을 향한 남성의 폭력에 남성들 스스로가 심각한 문제제기를 시작했다. 2주기 추모식에서 이들은, 남성의 폭력에 희생된 여성들을 추모하고 양성간 평화를 기원한다는 뜻의 하얀 리본을 가슴에 달고 나와 이렇게 외쳤다. “여성을 괴롭히는 터프가이는 지구를 떠나라!”

전 세계에서 ‘하얀리본운동’(White Ribbon Campaign)을 주도하고 있는 캐나다의 마이클 코프먼(Michael Kaufman) 박사가 지난 11월18일 한국을 찾았다. 이미 지구촌 30여개 나라에서 이 운동을 펼쳐온 코프먼 박사는 “한국 남성들의 가정 내 폭력이 매우 심각한 상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하얀리본운동’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을 ‘심각한 전염병이자 끔찍한 테러리즘’으로 규정한다. 남편에 의한 아내 구타, 직장에서의 성희롱과 성폭력 등 다양한 형태로 평범한 남성들에게까지 확산돼가는 폭력 때문에 매년 수십~수백만명의 여성들이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시달리거나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전염병이자 테러리즘은 왜 박멸되지 않는 걸까? 코프먼 박사는 “남성들이 사악해서가 아니라 여성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는 문화가 첫째 이유”라고 설명한다. 가정·학교·직장·거리 등에서 남성들은 ‘남성다움’을 증명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가해자인 대부분의 남성 스스로가 이런 폭력에 침묵을 지켜왔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정부·경찰·법·기업·언론 등의 권력을 통제하고 있는 남성들의 침묵은 곧 이런 폭력에 대한 ‘허용’을 뜻한다. 하얀 리본을 가슴에 다는 것은 여성에 폭력을 저지르지도 않고 이런 폭력을 묵과하지도 않겠다는 서약이다.

‘하얀리본운동’은 보통 11월25일을 전후해 1~2주 동안 소년과 성인남성들이 가슴이나 가방·책상·게시판 등에 하얀 리본을 달 것을 권유한다. 유엔은 이날을 전 세계 여성폭력 근절의 날로 선언하기도 했다. 코프먼 박사를 초청한 국내 친여성주의 단체인 딸사랑아버지모임(daughterlove.org)은 50여개의 다른 아버지모임·남성단체와 함께 내년부터 ‘하얀리본달기운동’을 펼칠 계획이다. 11월25일을 ‘남성폭력 근절의 날’로 정하고 이와 관련된 글짓기·포스터대회, 각종 세미나 등을 열어 남성폭력 근절을 확산시킨다는 생각이다.

글 김성재 기자 | 한겨레 문화생활부 seong68@hani.co.kr
사진 황석주 기자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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