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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출판] 이상향 세운 ‘신화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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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1-26 00:00 수정 : 2008-09-17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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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킨 교수의 삶을 통해 <반지의 제왕>의 뿌리 찾아… 원정대의 모험에 저자의 경험이 살아 숨쉰다

2000년부터 영화팬들과 판타지 문학팬들은 겨울을, 12월마다 개봉하는 피터 잭슨 감독의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애타게 기다린다. 이 영화를 통해 ‘중간계’에 사는 호빗족인 프로도, 왕의 후예 아라곤, 마술사 간달프, 요정 아르웬, 골룸 같은 주인공들은 판타지 마니아를 넘어 일반 대중에게도 이제 낯설지 않게 되었다. 절대반지를 없애기 위해 목숨을 걸고 길을 떠나는 이들 원정대의 모험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 <톨킨-판타지의 제왕>, 마이클 화이트 지음, 김승욱 옮김, 작가정신 펴냄.

카펫 구멍을 통해 호빗이 태어나다

1930년대의 어느 초여름날, 학생들의 시험지를 채점하던 존 로널드 류엘 톨킨 교수는 책상다리 옆의 카펫에 난 작은 구멍을 발견하고 한참 동안 그것을 바라보며 몽상에 잠긴다. 그러고는 책상 위의 종이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땅에 난 구멍 속에 호빗이 살고 있었다.” 이렇게 톨킨의 무의식에서 현재까지도 최고의 판타지 문학으로 꼽히는 <반지의 제왕>이 시작됐다.

영국의 전기작가 마이클 화이트가 쓴 <톨킨-판타지의 제왕>은 ‘판타지 소설의 제왕’이며, 탁월한 고대언어 학자였던 J.R.R.톨킨(1892∼1973)의 삶을 파고들어가 그가 평생을 걸고 써내려간 <반지의 제왕>과 이 고집스러운 학자의 일생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나간 톨킨 평전이다.


아버지의 근무지이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나 여섯살 때 아버지를 잃은 톨킨은 경제적 능력은 없었지만 지적이고 우아했던 어머니와 영국의 시골에서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어머니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영국 국교도인 친척들은 등을 돌리고 경제적 지원을 끊음에 따라 이들 모자는 처절하게 가난한 생활을 했다. 결국 어머니는 당뇨병에 걸려 톨킨이 12살 때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죽은 직후 그는 고대의 신화와 환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언어에 대해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는 옥스퍼드대학에서 고대언어에 대한 뛰어난 연구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학위 논문을 쓴 지 얼마 안 돼 일어난 1차대전의 전장으로 간 그는 처참한 살상의 비극을 보게 됐다. 가장 친한 친구들이 죽어나갔고 그도 전염병으로 18개월 동안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그가 겪은 삶의 이 모든 경험들이 <반지의 제왕>에 녹아 있다. 지은이는 평생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톨킨이 무의식 속에서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가톨릭이었다고 믿고, 또한 영국의 국교를 같은 이유로 탄핵했으며, 더 나아가 그를 불행에 빠뜨린 현실 자체를 거부하게 됐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그는 반현대적인 세계로 걸어들어가 어머니가 가톨릭을 받아들이기 전 잠깐이나마 행복했던 시절을 소설 속의 ‘중간계’로 만들어냈고, 그 세계를 둘러싼 선과 악의 싸움, 광명과 암흑의 대결을 빚어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톨킨은 이교적으로 보이는 <반지의 제왕>의 많은 인물들을 기독교적인 틀 속에 배치했다. 그리하여 진정한 믿음이 현실을 극복하고, 선과 악의 대결에서 선은 항상 승리한다. 그러나 중간계의 저 아래에는 슬픔과 연약함 그리고 덧없음이 엷게 깔려 있다. 1차대전에서 체험한 비극은 언제나 그의 가슴 속에 남았고, 중간계에는 톨킨의 기계와 현대 문명에 대한 반발이 녹아들어 있다.

과학 · 기계 불신… 중간계에 강한 애착

살아남은 톨킨은 20세기를 불신하고 경멸했으며, 과학과 기계는 인간의 삶을 전혀 긍정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평생 텔레비전을 사지 않았으며 라디오도 가끔 들었을 뿐이다. 정치에도 무관심했으며 현대문학과 음악, 연극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으며 인간의 모든 노력은 헛된 것일 뿐”이라는 생각을 평생 간직했다. 자연 속에서 나름의 삶을 살아가는 호빗들의 ‘중간계’가 그에게는 이상적인 세상이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그는 매우 유능한 학자이며 자상한 아버지라는 ‘정상의 삶’을 살았다. 그는 40년 동안 명문 옥스퍼드대학의 교수로 재직했고, 항상 사교적이고 외향적이었으며, 뛰어난 강의와 언변으로 인기가 높았다. 10여개 언어의 구조와 문법, 그와 관련된 고대 북구 신화에 정통했으며, 이것들은 그가 <반지의 제왕> 속 신화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됐다.

<반지의 제왕>에 모든 사람이 환호한 것은 아니다. ‘유치한 글짓기’로 폄하하는 평론가도 많았고, “톨킨은 인종주의자다” “성차별주의자다”라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반지의 제왕>은 30여개 언어로 번역돼 1억부 이상 팔렸고, 현재 영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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