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길라잡이 | 사람이란 무엇인가 4]
이성 해체론에도 배울 게 있다
현대 철학에서는 이성을 해체하려는 움직임이 아주 많아. 이건 논술 문제로도 언제든지 출제될 수 있는 거지. 이런 문제를 풀라고 해보면, 너나 없이 곧장 이성의 필요성쪽으로만 달려가던데, 그러면 곤란해. 왜 이성을 해체하려는 움직임이 있을까, 그건 이성 중심의 사고방식에 뭔가 문제가 있어서 아닐까 따위의 의문을 가져야 한단 말야.
이성의 자기중심성
이성 해체론이 주목하는 가장 큰 대상은 이성의 ‘자기중심성’이야. 이성이란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아는 능력’인데, 여기서 이성은 어떤 것을 ‘대상’으로 놓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이렇게 타자를 대상화해서 그 이치를 자기 식으로 설명하다보니 자기중심적으로 타자를 이리저리 판단하고 바꾸려는 문제가 생기는 거지. 자연에 대한 인간중심주의, 비서구에 대한 서구중심주의, 여성에 대한 남성중심주의 따위가 그 예라 할 수 있어. 이건 자기 생각만이 가장 과학적이고 가장 진리에 가깝다는 아집으로 이어지기 쉽고, 여기서 온갖 폭력적인 행동이 나온다는 거야. 이성 해체론은 이 이성의 일방성을 쌍방성으로 바꾸려는 시도라 할 수 있어. 한마디로 ‘홀로 주체’에서 벗어나 ‘서로 주체’로 가자는 거지. 그러나! 생각하자 이런 해체론의 노력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그럴수록 더더욱 이성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봐. 지금까지 봤듯이 ‘나 → 생각’이 아니라 ‘외부적 힘 → 생각’이라는 도식이 맞다 하더라도, 그 생각이 ‘나’를 통해서 나온다는 것마저 부정할 수는 없어. 나아가 우리의 의도대로 결과가 이뤄지는 경우가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 결과가 우리 행동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어.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리 좌절하더라도 생각하기를, 행동하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와. ‘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하는 것’(知其不可而爲-<논어>)이 진정한 자유인의 길 아닌가 말이지. 이성, 깨달으려는 노력 이제 이성의 개념을 다시 규정하자고.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아는 능력’에서 ‘깨달으려는 노력’으로 말이야. 주어진 세계, 주입된 생각을 거부하고 그 한계를 보려는 노력, 그리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밀어붙이는 노력 말이지. 카뮈의 <페스트>의 주인공 리유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는 어둠 속에 있고, 거기서 뚜렷이 보려고 애쓴다”고 말해. 그렇게 해서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 “앞으로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이 일들이 모두 끝난 다음에는 무엇이 올 것인지 나는 모릅니다. 당장에는 환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치료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반성할 것이고, 또 나도 반성할 것입니다.” 이거야! 똑바로 보려는 것, 본 대로 실천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를 회피하지 않고 반성함으로써 다시 나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가 새로 발견한 이성이야. 그렇다면 우리의 새로운 이성이 추구할 진리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 아닐까?
이성 해체론이 주목하는 가장 큰 대상은 이성의 ‘자기중심성’이야. 이성이란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아는 능력’인데, 여기서 이성은 어떤 것을 ‘대상’으로 놓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이렇게 타자를 대상화해서 그 이치를 자기 식으로 설명하다보니 자기중심적으로 타자를 이리저리 판단하고 바꾸려는 문제가 생기는 거지. 자연에 대한 인간중심주의, 비서구에 대한 서구중심주의, 여성에 대한 남성중심주의 따위가 그 예라 할 수 있어. 이건 자기 생각만이 가장 과학적이고 가장 진리에 가깝다는 아집으로 이어지기 쉽고, 여기서 온갖 폭력적인 행동이 나온다는 거야. 이성 해체론은 이 이성의 일방성을 쌍방성으로 바꾸려는 시도라 할 수 있어. 한마디로 ‘홀로 주체’에서 벗어나 ‘서로 주체’로 가자는 거지. 그러나! 생각하자 이런 해체론의 노력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그럴수록 더더욱 이성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봐. 지금까지 봤듯이 ‘나 → 생각’이 아니라 ‘외부적 힘 → 생각’이라는 도식이 맞다 하더라도, 그 생각이 ‘나’를 통해서 나온다는 것마저 부정할 수는 없어. 나아가 우리의 의도대로 결과가 이뤄지는 경우가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 결과가 우리 행동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어.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리 좌절하더라도 생각하기를, 행동하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와. ‘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하는 것’(知其不可而爲-<논어>)이 진정한 자유인의 길 아닌가 말이지. 이성, 깨달으려는 노력 이제 이성의 개념을 다시 규정하자고.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아는 능력’에서 ‘깨달으려는 노력’으로 말이야. 주어진 세계, 주입된 생각을 거부하고 그 한계를 보려는 노력, 그리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밀어붙이는 노력 말이지. 카뮈의 <페스트>의 주인공 리유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는 어둠 속에 있고, 거기서 뚜렷이 보려고 애쓴다”고 말해. 그렇게 해서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 “앞으로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이 일들이 모두 끝난 다음에는 무엇이 올 것인지 나는 모릅니다. 당장에는 환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치료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반성할 것이고, 또 나도 반성할 것입니다.” 이거야! 똑바로 보려는 것, 본 대로 실천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를 회피하지 않고 반성함으로써 다시 나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가 새로 발견한 이성이야. 그렇다면 우리의 새로운 이성이 추구할 진리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 아닐까?

우한기 | 광주 플라톤 아카데미 논술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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